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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22)화 (22/122)

<22화>

밤중에 말을 타고 작은 마을을 벗어난 그들은, 추격대를 따돌리기 위해 멀리 돌아서 수도로 가기로 했다.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조금 험한 길도 있었지만, 그편이 더 안전했다.

레이라에게 있어서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멀리 돌아가는 것에 동의했다.

추격대가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을 찾아 나설 줄은 몰랐던 레이라는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마을에서 한참을 서쪽으로 말을 타고 달린 그들은, 해가 뜨고 나서야 속도를 늦췄다.

“이쯤에서 잠시 쉬시죠. 밤새 달렸으니, 추격대도 곧바로 뒤쫓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말을 멈춘 유진의 말에 레이라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아르제오가 손을 뻗어 그녀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괜찮아?”

말을 타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이렇게 긴 시간 타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틀거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물으니 그녀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다리를 떨면서도 표정만은 평온했다.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은데, 어찌 저리 덤덤히도 괜찮다고 하는지.

“일단 앉아서 좀 쉬어.”

숲에 있는 작은 바위가 전부였지만, 레이라는 순순히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조금 쉬고 싶었던 건 사실이어서.

이제 막 날이 밝았는데, 벌써 지친 것처럼 보이는 레이라에게 유진이 물통을 건넸다.

“멀리 돌아가는 만큼, 좀 더 빠듯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공녀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곧장 대답했지만, 보기에 매우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마차로 이동하기에는 이동 속도가 너무 떨어졌다. 추격대를 떨치기 위해서는 미리 거리를 벌려 놓는 편이 좋았다.

유진은 레이라의 앞에 지도를 펼쳐 보였다. 옆에 있던 아르제오의 시선도 자연스레 지도로 향했다.

“우선은 이쪽 길로 우회하여 수도로 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전하께서는 어떠십니까?”

“아직은 우리의 목적지가 수도라는 걸 저쪽도 모를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빙빙 돌 수도 없겠지.”

“그렇죠. 수도를 봉쇄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레이라가 지도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물었다.

“저희가 지금 어디쯤인가요?”

“이쯤이죠.”

지도 위의 한 곳을 짚은 유진의 손가락을 유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이쪽도 괜찮지 않을까요?”

도시 두 곳 사이에 있는 갈림길. 각각 수도에서 거리도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갈림길이 많은 곳으로 가면,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조사하는 시간이 또 걸리잖아요. 병력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나뉘면 우리가 빠져나가기 더 쉬워지기도 하지.”

아르제오가 턱을 매만지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네. 그 후에는 이쪽으로 빠지면 금방 수도로 갈 수 있어.”

레이라가 짚은 갈림길과 도시를 지나고 나면 커다란 산맥이 있었다.

“조금 위험한 길이기는 합니다만.”

“괜찮아. 너도 있고, 나도 있는데 저 산맥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가 있어?”

자신만만한 아르제오의 말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다며.

“위험한 길이니 더더욱, 소수인 우리가 움직이기 편해. 추격대가 쫓아오기 버거울 거고.”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얘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유진이 지도를 다시 접어 챙겼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에 간단히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들은 곧바로 말을 타지 않고 조금은 걸으면서 이동했다. 레이라가 말을 타는 걸 버거워하기에.

길가에 꽃을 조금씩 심으며 가다가는 곧 다시 말을 타고 이동했다. 그녀가 지도에 짚었던, 양쪽 도시로 나뉘는 갈림길이 있는 곳.

서쪽으로 한참을 말을 타고 달리는데, 점점 사람들이 한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때는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말의 속도를 늦추자 그들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하나같이 지친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전부 짐가방을 한두 개씩 메고 있었다.

그 기묘한 장면을 눈치챈 아르제오는 천천히 말의 속도를 늦췄다.

“이상하네요.”

“그러게.”

레이라가 작게 중얼거리니 아르제오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황태자에게 받은 임무로, 국민이 어찌 사는지 보고할 의무가 있었다.

“물어볼까요?”

“기다려.”

갈 길이 바쁘긴 했지만, 레이라가 먼저 얘기를 꺼내 주었다. 아르제오와 비슷하게 속도를 늦췄던 유진이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이니 유진이 말에서 내려 근처를 지나는 사람 하나에게 다가섰다.

“말씀 좀 묻겠소.”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느린 걸음을 내디디던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말을 타고 있던 그들을 슬쩍 훑은 중년의 남자가 쉬어 버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 길을 쭉 더 가면 있는 테론 지역입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계속되는 질문에 남자는 귀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걸 묻습니까?”

그 질문에 유진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무니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어요. 테론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살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지원도 없고, 나라에서 팽개친 땅이니 저희가 그곳을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술을 비틀며 비웃음을 흘린 남자는 말에 올라탄 두 사람과 유진을 훑어보았다.

“더 물을 게 없으면 전 이만 가겠습니다. 살길을 찾으려면 바빠서.”

비웃음을 흘리는 얼굴은 일그러진 듯이 보였다.

그들의 신분을 밝힌 것도 아니었고,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남자는 어디든 자신의 울분을 토해 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와 같은 처지였으면 신세 한탄이 나왔을 터였다.

그러나 걸친 옷부터가 자신의 것과 달랐다. 어딘가의 귀한 분이시란 생각에 삐뚤어진 태도가 나온 것이다.

멀어지는 남자를 보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거리를 두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한둘씩 또 보이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아르제오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리 홀로 애를 써도, 이 제국은 아직 멀었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유진의 나지막한 말에 아르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이 없고, 나라에서 팽개친 땅’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미안, 레이라. 조금 더 돌아가야겠어.”

“네, 전 괜찮아요.”

레이라도 신경이 쓰이는지 드문드문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실은 붙잡히기 전에 빠르게 국경을 건너 섬으로 돌아가는 게 최우선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런 신기한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말에 오른 유진은 출발하기 전, 레이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테론이면, 공녀님께서 말씀하신 갈림길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유진.”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녀를 확인하고 나서야 유진은 다시 말을 달렸다.

* * *

테론은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물이 부족하기는 했지만, 조금 떨어진 곳의 호수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물을 아끼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지만, 테론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주 내리지는 않았지만, 비라도 내리면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되기도 했다.

물은 부족했지만, 테론의 한쪽을 차지한 돌산에서 나는 돌은 희미한 빛을 머금어 귀한 물건이었다. 그것들을 조각해 팔아 풍요로운 생활을 이어 갔다.

테론의 특정 마을 사람들은 모두 조각 장인의 길을 걸었다. 조각하는 데에 더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건 여자인 경우가 많았다.

조각에 재능이 없는 이들은 돌산에서 돌을 옮기는 일을 했다. 조각하기 전의 돌은 그것만의 아름다움이 있다며 그들은 그 일도 즐겼다.

여기까지가, 유진과 아르제오가 사전에 알고 있던 테론의 정보였다. 조각 마을 외에는 다른 곳과 다를 것 없는 영지였다.

오는 길에 마주친, 테론을 벗어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만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그들은 테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췄다.

멀리서 영지의 입구가 보였는데, 그곳을 웬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병사들이 있는데요?”

한순간 설마 자신들을 잡으려고 지키고 있는 건가 싶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너무나도 희박해서 금세 고개를 저었지만.

“글쎄, 황궁 병사들은 아닌 것 같은데.”

아르제오의 말에 유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병사들이 지키고 있으면, 영지 내로 들어가는 게 까다로웠다.

세 사람이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영지 안쪽에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다.

그는 미련 가득한 얼굴로 영지를 돌아보았고, 병사들은 짜증스러운 태도로 등을 떠밀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듯 남자는 몇 번이나 영지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 느린 걸음이 자신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기를 레이라 일행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러고는 가까이 왔을 때, 병사의 눈을 피해 남자를 붙잡았다.

유진이 남자를 순식간에 덮쳐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순식간에 느린 걸음을 옮기던 남자가 사라졌지만, 병사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쉿. 큰 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남자의 입을 틀어막은 유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남자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유진, 너무 겁주는 거 아닌가요?”

“그게 더 편하지 않을까? 아까 같은 태도 보다는 이것저것 듣기 편할걸?”

레이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진을 말리려 하니 아르제오가 제지했다.

그의 말대로, 두려워하는 게 정보를 캐내기는 유리할지 몰랐다.

“불필요한 공포를 심어 주는 건 좋지 않아요. 좋게 얘기하면 되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걸?”

“호의를 보이면 그대로 돌려줄 수도 있잖아요.”

“호의를 보이면 이용하려는 자들이 더 많잖아.”

“하지만 먼저 호의를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호의를 돌려주지 않아요.”

두 사람의 말씨름을 지켜보던 유진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붙잡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면 놓아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진동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유진이 그를 놓아주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토해 냈다. 딱히 숨을 못 쉬게 한 것도 아닌데, 긴장으로 숨을 멈췄던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딱히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레이라가 묻자, 남자는 흠칫하며 몸을 뒤로 뺐다.

너무 겁을 먹은 모습에 그녀가 유진과 아르제오를 뒤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제가 제일 앞으로 나서 흙바닥에 털썩 앉으며 남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무,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레이라의 뒤에 선 유진과 아르제오를 번갈아 힐끔거린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레이라가 맑은 눈동자로 똑바로 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 테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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