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다른 가능성이요?”
“그래.”
레이라가 의아한 듯 묻자,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도주한 죄인을 붙잡았다는 명목으로 발루아 제국 황제에게 그대를 바칠 수도 있지. 너희가 잡지 못한 도망친 죄인을 우리가 잡았으니, 넘겨주는 대신 체면을 차려라, 와 같은. 아니면 은밀히 데려와 공작가와 연락을 취할 수도 있지. 전쟁이 일어나도 회유된 공작가가 막아 준다면, 문제 될 건 없으니까.”
로이드에게 곧장 바쳐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레이라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건 그녀가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공작가에도 피해가 갈 테니까.
“어떻게든 몰래 국경을 넘어서 조용히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걱정스러움을 드러낸 얼굴로 레이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에 아르제오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 끝을 살짝 매만졌다.
“원하는 게 그거라면, 들어줘야지.”
“고마워요. 이 빚은 꼭 갚을게요.”
“기대할게.”
아르제오는 여전히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는 듯 보였지만, 유진은 걱정만 늘어갔다.
그들로서는 황궁이 요구하는 대로 그녀를 넘기는 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아르제오가 저리 말하는데, 본인이 단독으로 뜻을 달리하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도대체 그는 왜 굳이 이런 상황이 되어서까지 레이라를 도와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앞으로는 아무 마을이나 도시로 들어갈 수가 없어졌습니다.”
급하게 이동하느라 마차도 없었다. 당장 노숙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로 가시죠. 제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살피고 그다음 함께 들어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겠어?”
가녀린 그녀의 다리로 먼 거리를 이동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게다가 굽이 높은 신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두를 준비했던 탓에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플 터였다.
“괜찮아요.”
하지만 아르제오의 걱정이 무심하게 레이라는 금세 앞서는 유진을 따라나섰다.
그러고는 오히려 잘됐다며 중간중간 꽃을 심기까지 했다.
레이라는 오히려 산책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걸었다.
숲길이라서 마음이 놓인 것인지 편안한 표정으로 걷다가, 길가에 꽃을 심겠다고 멈춰 섰다.
레이라가 꽃씨를 심자, 자연스럽게 아르제오가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같이 씨앗을 심었다.
유진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이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상황은 심각한데 저 둘은 너무나도 태평해 보였으니.
“이렇게 이동하다가는 날이 새도 마을에 도착하지 못할 텐데?”
레이라의 옆에서 씨앗을 심던 아르제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밖에서 자는 건가요?”
“아니, 아니, 밖에서 자면 안 되잖아.”
“그런가요? 저도 밖에서 자 본 적은 없긴 해요.”
“근데 왜 이렇게 태평한 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요.”
“내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는 건 맞지.”
아르제오는 레이라가 너무 태평하다고 했지만, 유진이 보기에는 두 사람 다 똑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제오는 레이라와 함께 꽃을 피우고 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물론 유진도 그녀가 꽃을 피우는 건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르제오의 말대로, 이렇게 천천히 가다가는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질 것이다.
“조금 서두르시는 게 어떨까요?”
“네, 그럴게요.”
발을 동동 구르는 건 유진뿐이었고,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느긋하기만 했다.
마구 등을 떠밀 수도 없어서 속이 타는 유진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진의 걱정과 달리 그들은 해 질 무렵 작은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기고, 유진이 먼저 마을로 들어섰다.
꼭 정찰병을 먼저 보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왜 웃어?”
“그냥요.”
“이 상황에 잘도 웃네.”
아르제오가 씩 웃으면서 나직이 중얼거리자, 레이라가 슬쩍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쪽이 할 말은 아니죠. 더한 상황에서도 재미있다고 웃었잖아요.”
병사들에게 쫓기는 상황이 재미있다고 웃었던 그였다.
누구는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말이다.
확실히, 황자의 신분으로는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병사들에게 쫓길 일은 흔치 않을 터였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며, 마을에 불이 밝혀지는 게 보였다.
몸을 숨긴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레이라는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가만히 아르제오를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이렇게 숨어다녀야 하면, 역시 레벤의 씨앗은 찾기 힘들겠네요.”
“무슨 소리야, 찾을 수 있어.”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기부터가 이렇게 어려운데도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무리라니.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한테는 무리 아니야. 내가 못 찾을 리가 없어.”
“그건 황자이기 때문인가요?”
“아니지, 내가 유능해서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의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네요.”
“재미있으라고 한 말 아니야. 진짜야.”
“네, 네, 알겠어요.”
아르제오는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함께 있으면 웃을 일이 많아서 즐거웠다.
‘로이드와 있을 때는 소리 내서 웃어본 적도 그다지 없는 것 같은데….’
꽤 오래 함께였던 것 같은데 지금처럼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은 적도 거의 없었다.
처음 다정했던 모습도, 한없이 자상하여 배려하는 태도였다. 다만 자신을 편히 여기고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로이드는 자신과 있는 시간을 그다지 즐거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재미있는 성격은 아니니까.’
스스로도 주변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제오와 있을 때는 뭔가 달랐다.
그와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 편안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당연하게 느꼈다.
“부럽네요. 전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라서.”
나직이 이어진 레이라의 말에 아르제오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대도 재미있는 사람이야.”
“제가요?”
살면서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레이라가 놀라 되물으니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지.”
“어디가 재미있다는 거예요?”
정말 모르냐는 얼굴로 아르제오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피며 설명했다.
“스스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 게다가 스스로 유배지로 돌아가려고 하지, 가진 것이 넘치는 데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하지. 누가 봐도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그다지 억울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거든. 이렇게 신기한 사람은 처음 봐.”
주르륵 늘어놓는 아르제오의 말을 듣던 레이라가 눈을 흘겨 떴다.
“재미있는 것들이 아니잖아요.”
“왜? 재미있는데?”
“아르제오의 재미 기준은 뭔가 이상해요.”
“독특하단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
씩 웃는 그를 보며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따라서 픽 웃어 버렸다.
아르제오는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데에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는 사이, 마을을 살피러 갔던 유진이 돌아왔다.
“일단은 마을로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숙소를 미리 구해 놓았으니 그리로 곧장 가시죠.”
마을만 살피기에는 시간이 좀 걸린다 싶었더니, 유진은 숙소까지 미리 알아보고 온 모양이었다.
아르제오는 역시 유능한 부관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유진은 어깨가 슬쩍 올라갔다.
* * *
깊은 밤, 곤히 잠을 청하던 레이라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레이라, 일어나 봐.”
“으음….”
슬쩍 눈을 뜨니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아르제오의 얼굴이 보였다.
“아르제오? 무슨 일….”
“쉿.”
그는 검지를 곧게 뻗어 입술에 댔다. 슬쩍 주변을 살핀 아르제오는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짐 챙겨, 나가자.”
“네?”
화들짝 놀란 레이라는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는 유진이 밖을 살피며 서 있었다.
챙길 짐이라고는 간단한 가방 하나가 끝이니 금방 나설 수 있었다.
다만 레이라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자, 밤바람은 차니까.”
그런 그녀에게 로브를 둘러 주며 아르제오가 싱긋 웃었다.
로브를 꼼꼼히 여며 주고는 자연스럽게 레이라의 손을 붙잡았다.
“어두우니까.”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앞장서고 그 뒤를 따라 숙소를 나선 그들은, 고요한 밤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동하는 거예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아르제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레이라가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딱히 누군가 쫓아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만 조용히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황궁에서 병사들을 푼 모양이야. 그래서 부득이하게 지금 움직이는 거지.”
앞장선 유진은 미리 준비한 말 두 필이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런 상황에 유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녀님은 저와 같이….”
유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르제오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나랑 같이 갈게.”
부관이자 황자인 아르제오의 호위를 겸하고 있는 유진으로서는 머쓱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유진이 혼자 타고, 아르제오가 레이라를 앞에 태우고 말에 올랐다.
“마, 말 처음 타 봐요.”
“그래? 생각보다 재미있을걸?”
생각보다 높아서 레이라는 고삐를 있는 힘껏 말아쥐었다.
“위험하다고 허락해 주시지 않았거든요.”
“일단, 손에 힘 좀 빼 봐. 너무 세게 잡았어.”
“그래요?”
말에 올라탄 높이가 높아서 여전히 불안했지만, 레이라는 순순히 손에 힘을 뺐다.
등 뒤에 앉은 아르제오의 온기가 따뜻해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무서워?”
긴장으로 몸이 잔뜩 굳어진 레이라를 바라보며 아르제오는 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늘 태연하고 차분해서 이런 면이 더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높아서 마음이 편하진 않네요.”
무섭다는 말을 저리 돌려서 얘기하는 것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뒤에서 안는 것처럼 팔을 뻗어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떨어질 일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안긴 듯한 자세에 레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긴 했지만,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출발과 동시에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아르제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안 떨어져.”
씩 입꼬리를 올린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특유의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요.”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은 별개였다.
말과 표정은 평온하기만 한데,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르제오는 결국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