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뜬 로이드는 흔치 않게 개운함을 느꼈다.
햇볕을 받으며 정원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기분이 맑아지고 피로가 가셨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따스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마음이 평온하고 위로받은 기분.
‘정원에서 낮잠이라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로이드는 잠시 혼란스러운 듯 넋을 놓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아마 기겁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레이라가 사라진 황후궁은 방치되었고, 다행히도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있다면 레이라의 시중을 들던 시녀장 정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맛본 단잠. 지독히도 괴롭히던 피로가 싹 사라진 기분이었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 로이드는 근처에 피어 있는 꽃을 나른하게 응시했다.
‘무슨 꽃이지.’
언뜻 레이라가 무언가 설명을 한 것도 같았지만, 기억나지는 않았다.
손에 흙을 묻히고 햇볕에 쭈그리고 있는 것이 보기 싫었다.
꽃이니 약초니, 식물에 관해서 떠드는 것도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싶은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으니까.
그 스스로, 이 황궁에서 살아남는 것에만 온 신경을 쏟아 부었다.
저를 위협하는 것들을 몰아내는 것에 급급했다. 그들이 사라지면 자신은 평온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 손으로 끝낸 지금, 그가 느끼는 건 갑갑함과 삭막함뿐이었다.
만약 당신이 있었다면, 덜했을까.
‘남겨진 이 정원처럼.’
이곳에 있으니 평화로웠다. 만일 레이라도 이곳에 있었으면, 남겨진 정원 따위가 아니라 더 큰 위로를 얻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무슨.’
스스로 했던 생각을 비웃으며 몸을 일으킨 로이드는 다시 걸음을 뗐다. 주인이 떠난 지 오래인데도 아직도 시들지 않은 정원에는 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아주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 정신이 해이해진 거라고 여기며.
* * *
다시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간 로이드는 정무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 한쪽에 세워 놓은 피 묻은 검. 제 동생을 저걸로 베었다. 그 이후로 로이드는 검을 저곳에 놓아두고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새 검을 주문했다. 앞으로도 줄곧, 저것에는 손대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최근 로이드는 다시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지끈거리며 괴롭혔다.
한숨을 푹 내쉴 즈음, 며칠 전과 같이 엘라가 집무실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직접 차를 들고 들어왔다.
“폐하, 차를 내왔습니다.”
평소보다 노출이 적은 옷차림. 틀어 올린 머리 대신 차분히 늘어트린 머리칼에 옅은 화장. 이번에는 지독한 향수 냄새도 사라졌다.
로이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엘라는 덥석 달려드는 대신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 조신하게 차를 따랐다.
오늘은 차향이 나쁘지 않았다.
로이드는 기품이 넘치는 자태로 차를 머금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떠신가요?”
조금 기대하는 듯한 표정에 로이드가 덤덤히 물었다.
“직접 내린 차인가?”
“네? 아, 그게…. 어렵게 구한 귀한 차입니다. 마음에 드시나 해서요.”
본인이 내린 차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레이라는 자주 직접 차를 내주었지.’
문득 그녀를 떠올리던 로이드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더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조금 표정이 풀어지나 싶었는데, 곧 다시 얼굴을 굳히는 로이드를 보며 엘라는 몰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로이드의 자리를 위협하던 귀족들도, 다른 황자도 다 사라졌다.
눈엣가시였던 레이라조차 없는데, 도대체 왜 제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 걸까.
그래도 엘라는 로이드가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고는 정무로 바쁜 그를 배려한다며 찻주전자를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로이드는 적막 속에서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집중력이 조금이라도 떨어질 때면, 멋대로 시선이 피범벅의 검을 향했다.
제가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릴 리가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심기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다시 쌓인 피로에 로이드는 미간을 짚었다.
눈이 뻐근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편히 잠을 청하고 싶은데, 잠들지 못했다.
‘폐하, 또 잠을 못 주무셨습니까?’
눈을 지그시 감은 로이드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고 정원에 가서 잘 수도 없고….”
‘잠이 잘 오는 차를 내드릴까요?’
귓가에 맴도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로이드는 미간을 짚었던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 주면 고맙겠….”
감았던 눈을 뜬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황제의 집무실에는, 로이드 본인과 피가 말라붙은 검뿐이었다.
분명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곁엔 아무도 없었다.
로이드는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건가.’
아무래도 피로가 쌓여 몸 상태에 이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집무실을 나섰다.
마침 로이드를 찾아온 세실에게 그는 잠시 쉬고 오겠다며 침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도 잠들지 못한다. 얼마나 더 견뎌야 편안해질까. 억지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을 청할 수 없었다.
한숨과 함께 거칠게 몸을 일으킨 로이드는 결국, 레이라가 머물던 궁으로 향했다.
이전에 방문했던 날 이후로 그는 그 궁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내가 다시 나올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예, 폐하.”
엄한 얼굴로 이르자 병사가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답했다.
병사들을 배치한 이후로 이 정원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런데 여전히 레이라를 잃은 이 정원은 만개한 꽃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데 시들지도 않았다.
‘용케 피어 있군.’
온기 없는 시선으로 정원을 훑은 로이드는 곧장 이전의 그 벤치로 가 털썩 누웠다.
폭신한 침대도, 부드러운 이불도 없는데 이곳에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안정을 되찾았다.
다른 곳과 뭐가 다른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곳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쉴 수가 있었다.
눈을 감은 로이드는 언제 잠들지 못했냐는 듯 잠이 들었다.
‘너무 무리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부드럽고 고운 손이 이마를 짚는 감각에 로이드는 고른 숨을 내쉬었다.
상냥한 표정으로 괜찮냐 묻는 레이라에게 꿈속의 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그 친절함도 익숙했고, 꽃을 들고 간혹 찾아오는 것도 익숙했다.
당연한 것들에 가까웠다. 정무로 바쁠 때는 조금 귀찮기까지 했다.
그래도 안색이 좋지 않다며 이마를 짚었던 건 레이라가 처음이었다. 부모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로이드는 잠결에 제 이마에 얹어진 손을 붙잡으려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손은 허공을 헤매다가 툭 떨어졌다.
“…….”
천천히 눈을 뜬 로이드는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가만히 하늘을 응시했다.
제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전쟁을 위해 홀든 후작가를 흡수하려 엘라를 곁에 두었다.
그때에도 레이라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평소와 똑같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그 침착함이 조금은 일그러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도대로 질투에 괴로워하기를.
막 잠에서 깨어 멍한 상태로 생각하던 로이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잠시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후회, 하는 건가.’
고개를 살짝 흔들어 상념을 털어 낸 로이드는 이내 레이라가 남겨 둔 정원에서 벗어났다.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잠을 청할 수 있었던 로이드의 안색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 * *
보름에 한 번, 홀로 죽음의 섬을 지키는 누이에게 보급품을 전하러 가는 날.
그 정해졌던 일정마저 늦춰졌다. 폭풍우의 피해가 큰 항구도시의 보수로 병사들까지 투입되었다며.
그에 헤레이스는 물론, 에드가까지 들고일어나 항의했다.
제럴드 후작은 제가 중간에서 죄인에 대한 처사를 멋대로 결정한 것이 황제의 귀에 들어갈까 겁냈다.
물론 레이라에게 더는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에 자신에게 큰 화가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냥 방심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 조금 조급하게 보급선을 출발시켰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보급선의 병사들은 저마다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헤레이스 앞에서는 감히 내색도 하지 못했지만.
시타델 섬이 있는 곳의 해안가는 멀쩡했다. 공작령도 다른 항구 도시들에 비하면 피해가 적었다.
그리고 그 피해가 큰 곳은, 그들이 있는 곳과 한참 떨어진 제국의 변방이었다.
그러니 병사들은 포레스티아가에서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다.
헤레이스는 차라리 유난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를 타고 시타델 섬에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은 더 커져만 갔다.
이유는 해안가에 레이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보급선을 타고 시타델 섬으로 갈 때면, 레이라가 해안가에 나와 있었다. 헤레이스는 배에서 내리는 게 금지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보급품을 전하는 날에는 얼굴을 보려 레이라가 해안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늦잠이라도 주무시는 건가….’
불안을 떨쳐 내고자 헤레이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레이라가 늦잠을 잤다든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원을 가꾸고 있다든지. 그래서 조금 늦어지는 거라고.
하지만 배가 섬에 완전히 정박하고 나서도 레이라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도 내리겠다.”
헤레이스는 시타델 섬 안쪽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에 기사들이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공자님, 내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누님이 해안가로 나오지 않으셨으니 섬으로 들어가 확인해야겠다.”
“하지만 그건….”
어떻게든 헤레이스를 말리려 병사가 말을 잇자, 그가 살벌하게 병사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딘가 몸이 좋지 않으신 건 아닌지 확인해야겠다고.”
말리려는 병사들을 향해 헤레이스가 눈을 번뜩였다. 레이라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생의 살벌한 얼굴이었다.
“만일 누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더더욱, 너희 손에 맡길 수 없다. 신임하는 공작가의 사람이 간다고 해도 성에 차지 않을 텐데, 하물며 공작가의 사람도 아닌, 누님을 업신여기는 네놈들이 간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서슬 퍼런 시선에 병사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단숨에 배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다급히 시타델 섬 안으로 달려갔다.
어떤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로.
유배된 죄인들이 머무르던 작은 집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레이라가 심고 가꾸었을 나무들은 쓰러지고 부러져 널브러져 있었다.
물이 들어찼다가 빠진 흔적인지, 조개껍데기도 언뜻 보였다.
꽃도, 채소를 기른 밭도, 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누님…!”
하얗게 질린 헤레이스는 미친 듯이 섬 안을 헤집었다.
병사들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 폭풍우의 피해 지역은 시타델 섬이 있는 이쪽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곳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병사들 앞에서 헤레이스는 한참이나 섬을 헤맸다.
미친 사람처럼 ‘누님’을 부르며.
* * *
부스럭.
저벅저벅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풀숲 밖을 살핀 아르제오는 곧 유진을 발견했다.
“유진, 여기다.”
“으악!”
낮게 속삭이며 풀숲에서 벌떡 일어난 아르제오 때문에 화들짝 놀란 유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숙소에서 쪽지를 확인한 즉시 도시를 벗어난 유진은, 일직선으로 그들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 꽃을 보고 따라왔다.
레이라가 함께 있으니 이런 방법도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유진은 혀를 내둘렀다.
“두 분 모두 무사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넘어졌던 유진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유진, 놀랄 때 표정이 가관이었어.”
“차라리 웃으면서 말씀해 주세요!”
무표정으로 재미있었다고 중얼거리는 아르제오를 보며 유진이 울먹였다.
두 사람은 보고 있으면 어쩐지 재미있어서 레이라가 작게 웃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차가운 인상은 아니었지만, 웃는 얼굴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식물을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꽃을 피울 때 제일 표정이 밝은 그녀여서 그런지, 참 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웃는 레이라를 힐끔거린 유진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공녀님,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아, 미안해요.”
“뭐야, 웃으면 좋잖아.”
유진의 한마디에 금세 미소가 감춰진 것이 불만인 아르제오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좋지 않나요?”
“농담으로라도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카리아에서의 일이 전국에 퍼진 것 같습니다. 때문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궁에서까지 공녀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딱히 절 데려간다고 포레스티아 공작가를 회유할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죠….”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는 말에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닙니까? 사실이 어떻든 그들은 그리 믿으니 공녀님을 찾으려고 혈안인 게지요. 어쨌든 공녀님을 찾으면 공작가와 연을 맺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을 겁니다.”
“억지로 납치하려는 주제에 무슨 연을 맺으려는 건지.”
아르제오가 투덜거리는 걸 보며 유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절 데려가면 오히려 더 곤란해질 텐데 말이죠.”
“곤란해지다니요? 어째서입니까?”
유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으니 아르제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재 레이라의 상황을 잊었어?”
“폭풍우에 조난해 리히덴 제국 해안가로 떠밀려 오셨죠.”
“아니, 아니, 아니지. 그 이전 상황이 어땠느냔 말이야.”
아르제오가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유진은 눈을 한차례 굴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아, 폐위되어 섬에 유배되셨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가 유진은 아차 하는 얼굴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유진의 걱정과 다르게 레이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배지로 떠나던 날도, 유배지에 지내면서도 덤덤했던 그녀였다.
“절 데려가면, 죄인이 유배지를 벗어난 게 발루아 제국에 알려지겠죠. 그럼 죄인의 탈주를 도운 공범으로 여겨질 가능성도 있잖아요.”
확실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죄인이라고 칭하는 게 아르제오는 조금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귀찮아질 수도 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입을 뗐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