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9)화 (19/122)

<19화>

“이건 내 개인적인 일이라 괜찮아.”

귀족, 황족을 가리지 않고 리히덴의 사람이라면 레이라에게 손을 뻗을 것이다.

“형님이든 다른 귀족이든, 그대를 넘겨줄 수는 없지. 이 빚은 이자까지 합해서 받을 거니까.”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는 얼굴이 꽤 약삭빠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 꼭 정말 장사치 같은데 말이다.

차분한 얼굴로 고민하던 레이라는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귀족들이나 황태자 전하께서 절 찾으시려는 건, 역시 공작가 때문인가요?”

아르제오는 의외로 제 가문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라는 세상을 잘 모르는 듯하다가도 핵심을 잘 짚어 냈다.

“그대를 통해서 포레스티아 가문을 회유하려는 거야. 귀족들은 형님께 그대를 바치려고 손대는 거고.”

“아르제오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건가요?”

아르제오 역시, 레이라를 황태자에게 데려가면 득을 보는 입장이었다. 확실히 그런 방법도 있었지만, 그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르제오는 눈매를 곱게 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라는 그 눈웃음에 홀린 사람이 분명 여럿 있을 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내 약속은 그게 아니니까. 포레스티아 공작가는 굳이 이쪽에서 회유하려 들지 않아도 국경을 지켜 주고 있잖아? 그대를 억지로 잡아 두는 건 오히려 역효과지.”

아르제오의 말이 맞았다. 만일 그들이 레이라의 뜻과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공작가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난 당장 생기는 이득만 생각하진 않거든.”

“황자보다는 정말 상인 같네요.”

“감쪽같이 속았지?”

“감쪽같지는 않았고요.”

“매정하네.”

“아르제오한테는 어쩐지 그렇게 되는 편이네요.”

장난스럽게 웃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가만 보면 레이라는 은근히 장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진짜 곤란하게 됐네.”

“역시 그렇겠죠?”

“그래. 수도로 들어가기가 조금 복잡해질 것 같아. 일단, 병사들 따돌렸으면 유진 데리고 바로 여길 떠나자.”

“네.”

정말 문제는 수도로 들어가는 거였다. 검문을 지나야 하니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수도까지 조금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어.”

문가를 살핀 아르제오가 레이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녀는 차분한 얼굴로 그 손을 찰나 응시하다가 이내 붙잡았다.

“이쯤이면 이 근처에는 병사들이 없을 거야. 움직이자.”

“그들이 이곳을 봉쇄할 가능성은 없나요?”

“그러니까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거야.”

아르제오는 문가를 서성이던 주인장에게 금화 하나를 건네주었다.

씩 웃으며 검지를 곧게 펴 입술에 댄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장을 확인하고는 그곳을 나섰다.

그는 숙소를 나설 때 레이라에게 둘렀던 로브의 후드를 씌워 주었다.

꼼꼼히 얼굴이 가려지도록 하고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르제오는 주변을 살피고는 좁은 골목, 혹은 사람이 많은 거리에 섞여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은 곧 숙소 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가도 괜찮은 건가요?”

“아직 이쪽으론 오지 않을 거야. 좀 더 수색하다가, 숙소로 사람을 보내겠지.

그리고 우리의 짐이 없으면, 급하게 도시를 봉쇄하려 할 거야. 어쩌면 봉쇄를 먼저 할 수도 있고.”

아르제오는 숙소 쪽으로 접근하기 전, 레이라의 후드를 다시 꼼꼼히 체크했다.

“근데, 저만 가려도 되나요? 아르제오도 가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난 병사들 아니면 알아볼 일이 없으니까.”

싱긋 웃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붙잡고 재빨리 숙소로 들어섰다.

레이라가 짐을 챙기는 동안, 아르제오는 숙소 주인에게 작은 쪽지를 남겼다. 유진이 돌아오면 전해 주도록.

대충 짐을 챙긴 후에는 아르제오도 로브를 둘러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도시 외곽 쪽으로 향했다.

“유진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바쁜 걸음을 옮기면서도 레이라가 뒤를 힐끔거리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지금은 우리 걱정이 우선이야.”

병사들이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던 건지, 외곽으로 빠질수록 병사가 빈번히 보였다.

아르제오와 레이라는 골목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밖의 상황을 먼저 살폈다.

저렇게 병사들이 많아서야, 로브를 뒤집어쓴 두 사람은 너무나 수상해 보일 터였다.

‘여기 있으니 잡아가쇼.’ 하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떡해요?”

아직 검문을 시작한 건 아니지만, 병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손을 힘주어 다잡으며 말했다.

“저거, 저걸로 빠져나가면 되겠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짐마차가 있었다. 그 근처에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두 사람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짐마차와 일행에게로 다가섰다.

먼저 말을 꺼내려는 아르제오를 막아선 레이라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한 걸음 나서 일행에게 말했다.

“실례합니다.”

“예? 무슨 일이시죠?”

마지막 점검 중이었던 듯, 짐마차를 살피던 이가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을 지나는 상인인데, 저희 일행이 감기를 얻어 조금 쉬게 해 주고 싶어서요.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만 짐마차에 태워 주실 수 있으실까요?”

레이라가 말을 건 남자는 얘기를 듣고는 아르제오를 힐끔거렸다. 덩치는 큰데 로브를 뒤집어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핑계를 대려면 반대로 되어야 더 효과적인 거 아닌가.’

가녀린 레이라가 아프다고 하는 것이 분명 더 효과적일 터였다. 자신은 키도 크고 몸이 다부져 그다지 동정심을 자아내는 쪽은 아니니.

하지만 아르제오는 구태여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지그시 레이라의 어깨를 붙잡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조금 휘청거렸다.

남자는 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여 두 사람을 짐마차에 태워 주었다. 일행들도 몇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으니 의심을 사진 않을 것 같았다.

곧이어 덜컹거리며 짐마차와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최대한 몸을 숨긴 두 사람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보면 그냥 잠을 청하는 것처럼 보여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짐마차에 숨어들어 무사히 도시를 벗어났다.

* * *

황제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던 로이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집무실 구석에 던져 놓은 검을 응시했다.

진득하게 들러붙었던 검붉은 피가 그대로 말라비틀어졌다.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로이드는 부러 그것을 치우지 말라고 명했다.

제 눈에 띄는 곳에 두라고. 그것이야말로, 이제는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없다는 증거였다.

똑똑.

가만히 검을 응시하던 로이드의 시선이 노크 소리가 들려온 문으로 옮겨갔다.

“폐하, 엘라입니다.”

“들라.”

로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라가 다과를 든 시녀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섰다.

탐스러운 주황색 머리칼을 틀어 올려, 가슴께가 파인 드레스가 돋보이게 했다.

선정적인 분위기의 드레스에 다른 이들은 슬쩍 눈을 돌려야 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닐까 염려되어서요. 차라도 들고 하셔요.”

눈매를 곱게 휜 엘라가 살랑거리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로이드는 여전히도 서늘한 눈으로 가만히 바라봤다.

애초에 엘라를 향하는 그의 시선에 온기가 담긴 적은 없었다. 필요에 의해 연기했을 뿐.

하지만 지금 제 상태로 보아서는 휴식도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지.”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로이드는 집무실 소파에 털썩 앉아 기댔다.

그 옆에 엘라가 냉큼 몸을 밀착시키며 앉으니, 시녀는 재빨리 티 테이블에 다과를 두고는 물러났다.

엘라가 슬쩍 턱짓하자 시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구석진 곳에 놓인 검을 보고 바들바들 떨며.

“폐하, 어딘가 불편하신가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엘라가 한껏 유혹하는 티를 내도, 로이드는 묵묵부답이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수 냄새도, 차향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엘라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무엇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나요? 이제 폐하에게 반하는 존재들도 다 사라졌으니 마음을 편히 하셔요.”

부드럽게 짓는 미소도 로이드의 눈에는 그저 가식으로 보였다. 도저히 함께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었다.

“차를 마시거든 돌아가게. 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

“산책이라면 저도 같이….”

“혼자 가겠다.”

“…….”

쾅. 매정하게 닫혀 버린 집무실 문을 노려보며 엘라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로이드는 원래부터 그다지 다정한 편은 아니었다. 신경이 날카로울 때가 많았지만, 그녀는 다 이해했다.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져, 이제는 그를 위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로이드만 제게 마음을 돌리면 되는데.

제일 쉬울 거라고 여겼던 그 마음이, 아직도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욕망으로 번뜩이는 눈은 한참이나 닫힌 집무실 문을 노려보다가 이내 그곳을 떠났다.

이 손으로 동생을 베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걸음을 내딛는 로이드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동생뿐 아니라 자신에게 반하는 귀족들도 전부 베었다.

긴 세월 자신을 위협하며 조롱하던 모든 이들을 베었다.

누군가는 폭군이라 자신을 불렀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폭군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 자리를 두고 벌이는 싸움은 목숨을 거는 것이지.’

그러니 지는 쪽이 죽어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치 머릿속에 먹구름이 낀 듯 갑갑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줄곧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간을 찌푸린 로이드는 찬바람이 이 갑갑함을 씻어 내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황궁은 숨이 막힌다.

아마 제 갑갑함은 떨쳐 낼 수 없을 터다. 그런데도 왜 그리도 황궁에 있고자 황위를 갈망했는지.

로이드는 한없이 걷다가 문득 코끝에 맴도는 향기에 걸음을 멈췄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주인을 떠나보낸 지 한참일 터인데 아직도 꽃향기가 가득했다.

‘…레이라의 궁인가.’

걷다 보니 어느새 레이라가 머물던 황후궁의 정원이었다.

평소였으면 조금도 흥미가 없었을 꽃들이, 오늘따라 조금 향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제껏 느끼지 못했는데, 이곳에 들어서니 햇볕이 따스했다.

어쩐지 나른한 기분이 들어 로이드는 주변을 훑다가 꽃밭 앞에 놓인 작은 벤치에 앉았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로이드는 이제 너무 지쳐 있었다.

사람을 베는 것도, 이 삭막한 황궁도.

그런데 주인을 잃은 황후궁의 정원은 한적하고 고즈넉하여 평온함이 느껴졌다.

마치 다른 세계라도 온 것처럼 제 삶과 다른 분위기였다.

로이드는 그 벤치에 털썩 누웠다. 온몸으로 햇볕을 받으니 먹구름이 개는 것 같았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 주변을 감싼 풀 내음과 꽃향기, 얼핏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모든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눈부신 푸른 하늘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로이드는 이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오랜만에, 아주 편안한 단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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