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유진이 숙소로 오기에는 아직 일렀다. 게다가 그가 돌아온 거라면 노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제 뒤로 감추며 문을 응시했다.
“사람을 부른 기억은 없는데.”
“급한 서신을 전하러 황궁에서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에 레이라는 심장이 털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아르제오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황궁이라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빛이었다.
아르제오도 설마 대놓고 황궁을 언급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곳에, 발루아 제국의 귀족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사실 규명을 명 받아 왔습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잠깐, 멈춰라.”
아르제오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2층이기는 했지만, 그 높이가 그리 높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잡히는 대로 로브를 집어 레이라에게 둘렀다.
“아르제오?”
“일단 지금은 얌전히 있어. 알겠지?”
특유의 색기가 흐르는 눈빛과 씩 올라간 입꼬리. 그가 검지로 살포시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레이라는 멀뚱멀뚱 그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르제오는 곧장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금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오겠다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아르제오는 그녀를 안은 채 창가로 다가섰다.
단단한 가슴에 얼굴이 닿았다. 보기보다 꽤 다부진 몸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조금 불안하게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항하실 시, 황태자 전하의 명을 우선시하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들어가라.”
그 말과 함께 그들은 벌컥 문을 열었다.
리히덴 제국의 황궁 문양이 새겨진 옷을 입은 남자와 그 뒤로 병사들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을 본 건 찰나였다.
“꽉 잡아.”
아르제오는 나직하게 한 마디만 속삭이고는 문이 열림과 동시에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전하!”
뒤에서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라를 안은 채로 뛰어내린 아르제오는 바로 아래에 보이는 천막으로 몸을 던졌다.
일차적으로 천막이 충격을 막아 주어서 그는 무사히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멈추십시오! 전하!”
창문으로 달려든 남자가 소리치고, 그 뒤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전하라고 부르는데요?”
“일단 뛰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레이라의 물음에도 아르제오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끌었다.
땅에 내려선 그는 그녀를 붙들고 빠르게 달려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렇게 뜀박질을 해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아르제오의 손에 강하게 이끌려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달렸다.
레이라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멀리서 병사들이 쫓아오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아르제오는 어쩐지 재미있어하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는 ‘하하하!’하고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사람들 틈새로 재빠르게 뛰던 아르제오는 갑작스럽게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 정도로 쉽게 떨쳐 낼 상대가 아니란 걸 알아서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골목을 요리조리 달렸다.
그러고는 구석진 곳에 딸린 작은 가게로 쏙 들어갔다.
재빨리 문을 닫은 그는 레이라를 이끌고 곧장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들어선 곳은 허름한 약초방이었다.
“어서 오십쇼, 찾으시는 약초라도…?”
드물게 찾아온 손님을 반기며 안쪽에서 주인장이 나왔다.
그러고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손님?”
“쉿.”
아르제오는 검지를 입술에 대며 싱긋 웃었다. 그 매혹적인 미모에 주인장은 순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르제오가 아무런 설명도 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레이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이곳에 머물러도 될까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주인장에게 조곤조곤 물으니,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힐끔거렸다.
“쫓기시는 겁니까?”
“그게….”
“아주 나쁜 놈들에게 쫓기고 있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야. 우리가 이곳에 숨어 있는 걸 안다면, 이 가게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잠시만 조용히 해 주겠나?”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곱게 웃으니 주인장은 반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어쩐지 이쪽이 더 악당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제게 커다란 위협이 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그럼 잠시 이쪽에서 몸을 숨기시죠….”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한 주인장은 밖을 살펴보겠다며 문가를 서성거렸다.
호흡은 꽤 진정됐지만,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슴께에 손을 얹은 레이라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아르제오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재미있어 보이네요?”
그녀는 아직도 놀래서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말이다. 아니,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한 탓일 수도 있다.
“재밌잖아. 이런 경험을 언제 또 하겠어. 재미있지 않아?”
아르제오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얼굴이었다.
레이라는 어느 쪽이냐고 굳이 묻는다면, 재미있다기보다는 놀란 마음이 더 컸지만.
“그것보다,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지 않나요?”
“아.”
눈을 가늘게 뜬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문가를 서성이는 주인장을 힐끔거리고는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전하’라고 부르던데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겠어요.”
짐짓 엄한 그녀의 표정에 아르제오는 눈을 도르륵 굴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난 재밌는데.”
“어서 설명하시죠.”
“뭘?”
“상인이라고 하셨잖아요.”
“믿었어?”
“완전히 믿지는 않았어요.”
“상처인데.”
여전히 장난식으로 대답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다시 주인장 쪽을 힐끔거렸다.
“어쨌든 설명은 하셔야죠.”
“어떤 설명을 원해?”
“‘전하’라는 호칭에 대해서요.”
“말 그대로야.”
아르제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차고 있었다.
훗날,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도움이 필요해졌을 때가 아니라면 밝힐 생각이 없었다. 제가 리히덴 제국의 황자라는 건.
“설마, 황자라도 된다는 건가요?”
혹시나 누가 들을세라 한껏 목소리를 낮춘 그녀가 속삭여 물었다.
한 손으로는 입 옆을 가리기까지 했다. 입 모양으로 들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아르제오는 입가의 미소를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리히덴 제국의 막내 황자, 아르제오 반 리히덴이야.”
성큼 거리를 좁혀도 태연하기만 하던 레이라도 이번에는 표정에 당혹스러움을 드러냈다.
‘리히덴 제국의 황자라니….’
그 얼굴에 낭패감이 떠오르자, 아르제오도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제 신분을 밝혔을 때 이런 얼굴을 하는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의 신분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이들의 표정.
불편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런 이들과의 관계는 늘 끝이 좋지 않았다.
“걱정 마, 국경은 제대로 넘게 해 줄 테니까.”
금세 미소를 싹 지운 그가 퉁명스레 말하니, 레이라는 동그란 눈으로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어요?”
“뭐가?”
“좀 전까지 아이처럼 웃었는데, 왜 갑자기 기분이 상한 얼굴인가 싶어서요.”
아르제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레이라를 응시했다.
‘보통 이런 건 그냥 눈치만 보고 묻지는 않던데.’
황자라는 신분에 눈치만 살필 뿐, 직설적으로 묻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조금 독특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신분을 그대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기에.”
“당연하잖아요. 황자님을 오래 잡아 둘 수도 없으니까요. 혹시나 황궁으로 불쑥 가 버리시면 전 어쩌나 싶어서요.”
투덜거리는 아르제오의 말에 레이라는 무슨 당연한 얘길 하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황자인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전 황후였어요.”
비록 과거형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대답이 어쩐지 우스워서 아르제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 알고 있지 않았나요? 그러면서도 말은 편하게 했지만.”
“아, 기분 상하셨습니까? 황궁 밖에서는 습관이 돼서.”
“됐어요. 편하게 대해 주는 게 저도 편하니까요.”
“그럼 문제없는 걸로.”
능글맞게 웃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도 따라 웃었다.
“약속하신 대로, 제가 무사히 국경을 넘어 시타델 섬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요.”
그녀는 황자보다도 높은 위치의 황제를 반려로 둔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아르제오의 신분이 곤란하다기보다는, 그가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 난감했다.
“아르제오가 상인이든 황자이든, 약속만 지켜 주신다면 문제 될 건 없어요.”
재차 강조하듯 말한 레이라는 혹시 병사들이 자신들을 발견한 건 아닐까 싶어 문가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걱정 어린 얼굴로 아르제오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자님이 이렇게 오래 황궁을 비워도 돼요?”
“황태자이신 형님이 계셔. 난 형님의 눈과 귀인 셈이야. 제국 내를 떠돌며 국민들의 생활을 살피고 보고하지.”
실상이 어찌 되었든, 그게 현재 아르제오가 하는 일이었다.
귀족 중에는 황궁에서 쫓겨난 거라고 떠드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무어라 떠들든, 자신만 만족하면 그만이었다.
“그거 좋네요.”
이유나 상황, 리히덴에서의 정치적 입장 같은 건 아무것도 모르지만, 레이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황태자가 국민의 생활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형제가 그 역할을 하면서 함께 힘을 합치는 것도.
‘발루아 제국에선 그런 모습 볼 수 없었으니까.’
로이드에게 형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르제오와는 상황이 다를 뿐.
“리히덴의 폐하께서는 국민을 위하려고 노력하시는군요.”
동그란 눈매가 곱게 휘어지며 웃는 레이라를, 아르제오는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확하게는 찰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는 것이 더 맞았다.
“아르제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겠어요. 멋진 일을 하고 있었네요.”
그 미소가 저를 향하니 아르제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일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형님이 시키니, 국민을 위한 일이니. 황자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 그렇게만 여겼었다.
심지어는 자신은 존재 자체만으로 황태자에게 위협이 되니, 이렇게 궁 밖으로 나돌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멋진 일인가.’
그녀가 그리 말하니 조금 더, 일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칭찬받으면 더 열심히 하는 어린아이처럼.
“아, 그래서 타냐 지역을 갔었군요? 높은 분의 명으로 움직인다더니, 정말 높은 분이셨네요.”
작게 웃으며 말하는 레이라는 조금 재미있어하는 듯 보였다. 식물을 매만질 때만큼이나 표정이 풀어져 있었다.
“그런 셈이지.”
타냐 지역을 방문했던 일을 떠올리며 웃던 레이라는 돌연 얼굴에 근심을 띠었다.
“그런데, 황궁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 때문에 온 것 같던데…. 정말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나요?”
아르제오는 입꼬리를 씩 올려 평소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