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7)화 (17/122)

<17화>

* * *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은 그들은 카리아를 떠났다.

마차를 타고 달리는 동안, 레이라는 가만히 마차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르제오는 그녀가 창밖을 구경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의아했지만, 가만히 턱을 괴고 그녀를 관찰했다.

타냐 지역을 들러 카리아까지 오는 내내, 레이라는 재잘재잘 떠드는 대신 창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발루아와 풍경은 조금 다르겠지만, 어딜 가나 있는 똑같은 나무, 똑같은 풀숲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그리도 좋아하면서 보니 아르제오는 신기할 따름이었고.

그런데 카리아를 나서면서부터 레이라는 시선을 마차 바닥에 떨어트린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가?’

귀족가에 유흥거리로 팔아넘기겠다며 납치.

공작가의 비호 아래에 자라면서 절대 겪었을 리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유배되기 전에는 황후였으니 더더욱.

하지만 아르제오도 짐작만 할 뿐, 그녀의 속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차분하기만 하니, 표정을 읽기가 어려웠다.

겁먹은 거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차분했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사람들과는 달랐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타입이 아닌 건 확실했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니 제지하는 이도 없고 한참을 레이라를 관찰하던 아르제오는 마차 창문을 열고 말했다.

“이쯤에서 쉬고 가지.”

“예.”

숲길을 가던 마차가 한쪽에 멈춰 섰다.

먼저 내린 아르제오는 자연스럽게 레이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내리는 것도 그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줄곧 마차 바닥에 붙어 있던 레이라의 시선이 드디어 주변을 살폈다.

휴식을 취하는 마부의 옆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다 먹고서는 출발하기 전에 조금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한시가 시급해도 마차로 긴 시간 이동하는 건 꽤 피로가 쌓이는 일이었다.

레이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차에서 씨앗이 잔뜩 든 상자를 꺼냈다.

“지금 심으려고?”

“네. 그래도 되죠?”

“그럼.”

아르제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얌전히 응시했다.

레이라는 상자에서 씨앗을 한 움큼 꺼내고는 풀숲으로 조금 들어갔다.

주변을 살피며 어디에 심으면 좋을지 고민한 그녀는 곧 자리를 잡았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레이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벌떡 몸을 일으킨 아르제오도 풀숲으로 따라 들어갔다.

유진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지켰지만.

맨손으로 살살 흙을 파내는 그녀를 본 아르제오가 바짝 옆으로 다가섰다.

“내가 할까?”

“아니요, 제가 해요.”

“손목이랑 팔, 아직 아플 텐데?”

“괜찮아요.”

붕대를 감은 손목이 신경 쓰였지만, 레이라는 묵묵히 씨앗을 넣고 다시 흙을 덮었다.

토닥토닥 부드럽게 두드리며 흙을 어루만지는 그녀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까지 본 표정 중, 역시 꽃이나 식물을 만질 때 제일 좋은 표정을 보였다.

곧 어루만지는 레이라의 손에서 옅은 청록빛이 땅으로 스며들었다.

씨앗이 묻힌 자리에서는 금세 싹이 터 올랐고 계속 자라나 꽃을 피웠다.

땅에 손을 대고 있는 동안은 계속 자라는 것 같았다.

“신기하네.”

얌전히 지켜보던 아르제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가요?”

그런 반응마저도 레이라는 익숙해 보였지만.

“발루아 제국에서는 그다지 신기해하지 않아?”

“신기해하죠. 별로 관심 없는 사람도 있고요.”

레이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르제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관심 없는 사람은 발루아의 황제인가?’

하긴, 관심이 없으니 이리도 특별한 그녀를 폐위시켰겠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아르제오는 퍼뜩 제 생각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 황제가 레이라의 힘에 관심을 보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그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폐위되어 이제는 끝난 사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또 흙을 파내는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아르제오는 물끄러미 그 손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저도 손을 뻗어 그 옆의 흙을 살살 파냈다.

“이렇게 하면 돼?”

그 행동에 레이라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여기에도 씨앗 넣어 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함께 손에 흙을 묻힌 아르제오가 그녀를 재촉했다.

레이라는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쪽에도 씨앗을 놓아주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손에 흙을 묻히고 식물을 돌보는 자신을 보면, 또 이런 일을 직접 한다며 잔소리하는 이들은 많았다.

공작가에서는 무리하지 말라는 잔소리가 대부분이었고, 그녀가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로이드는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았고.

이렇게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쭈그리고 앉아 함께 손에 흙을 묻힌 건 아르제오가 처음이었다.

그는 레이라의 옆에 딱 달라붙어 함께 꽃씨를 심었다.

“레이라.”

“네?”

돌연 이름을 부르기에 레이라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든 꽃씨를 떨어트릴 뻔했다.

그가 이름을 부르는 게 처음도 아닌데.

“재미있어? 꽃 심는 거.”

“아, 네. 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흐응, 그렇구나.”

얼굴에 흙이 묻지 않도록 손등에 턱을 괸 아르제오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문득, 그 얼굴에서 요전번 자신을 구하러 땀범벅이 되어 달려온 그 모습이 떠올랐다.

‘본인이니까 당연한 일인가.’

같은 얼굴이었으니 어쩌면 떠오르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에, 다른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떠올랐다.

땀에 흠뻑 젖어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런데도 여유로운 척 웃던 얼굴이.

“아르제오는 재미없지 않나요?”

“뭐가?”

“식물을 돌보는 것이요. 그리 즐길 것 같지 않아서요.”

“글쎄, 지금까지 즐겨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나쁘지 않아.”

“그런가요?”

“그리고 옆에서 열심히 심고 있는데 가만히 서 있기도 뭐하잖아.”

레이라의 기억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로이드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네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미소를 감추려 고개를 떨어트리며 다시 땅으로 손을 뻗었다.

흙을 파내고 꽃씨를 뿌리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는다. 그리고 땅에 손을 올려 꽃을 피우기를 반복했다.

아르제오는 그녀가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며 하얀 손으로 땅을 짚을 때는 싹이 트는 걸 구경했다.

흙 아래에 감춰진 씨앗에서 싹이 터 올라오는 건 생각보다 더 볼만 했다.

게다가 하얗고 고운 손에 흙이 묻어났는데, 그 모습이 또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르제오였다.

레이라와 함께 한참이나 꽃을 피울 동안 꽃이 자라나는 걸 줄곧 눈에 담았다.

한동안 봤는데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풀숲 안쪽에 작은 꽃밭을 만든 두 사람은 다시 길 쪽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길 끝자락에 다시 또 꽃씨를 뿌렸다.

아르제오는 풀숲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녀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땅을 파고 꽃씨를 심었는데, 그걸 본 유진은 입을 떡 벌렸다.

단언컨대 긴 시간 아르제오의 곁에 머물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황당함에 넋을 놓고 있던 유진이 아르제오에게 다가서 물었다.

“보면 몰라? 씨앗을 심고 있잖아.”

“왜 그걸 직접 하세요?”

“그럼, 손목이랑 팔에 붕대까지 감고 있는 레이라에게 혼자 다 하라고 해?”

“…….”

그가 그렇게 말하니, 마치 자신이 구제 불능의 망나니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유진, 그렇게 안 봤는데 매정하구나. 사람이 덜됐어.”

아르제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유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었다.

그러더니 아르제오의 옆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하면 되잖습니까, 하면.”

투덜거리면서도 레이라가 하는 걸 유심히 살피며 따라 하는 유진을 보며 픽 웃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입꼬리를 씩 올리는 것이, 꼭 장난꾸러기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도 하는구나.’

그를 힐끔거린 레이라는 몰래 고개를 돌리고 작게 웃었다.

아르제오의 옆에서 함께 땅을 파고 씨앗을 심은 유진은, 레이라가 손을 얹어 꽃을 피워 내는 걸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타냐 지역에서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신기한 힘이었다.

그리고 이런 걸 볼 때마다 실감했다. 그녀가 정말 포레스티아 공녀인 거라고.

그들은 마차나 사람이 다니는 길 한쪽에 한가득 꽃을 심었다.

마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지나던 길을 꽃으로 장식한 그들은 마부의 입단속을 잊지 않고는 곧 다시 길을 떠났다.

* * *

레이라 일행은 일직선으로 수도로 향하며, 작은 마을이나 도시에 짧게 머물렀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잠깐 쉬는 시간에는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꽃을 심었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부도 나중에는 그런 세 사람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여행을 즐기며 금세 수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런 즐거운 일들이 쌓이며 레이라는 점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옛날 공작령에서 꽃을 심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을이나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아르제오는 꽃씨를 구해다 주었다.

하지만 구하기 힘들다던 레이라의 말대로, 레벤의 씨앗은 구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못 찾았나요?”

“찾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발루아로 돌아가기 전까지 찾아 줄 테니까.”

“무리면 어쩔 수 없죠.”

“찾아 줄 거라니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에게 아르제오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절대 휘둘리는 타입이 아닌데, 레이라에게는 어째서인지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종종 반격도 하지만.

출발한 지역에서 수도까지 절반. 현재 도착한 도시는 그쯤에 있는 곳이었다.

조금 큰 도시에 올 때마다 유진은 자주 자리를 비웠고, 아르제오도 레이라의 부탁으로 레벤의 씨앗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씨앗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방들이 이어진 로비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애초에, 꽃씨가 이렇게까지 찾기 어려워도 되는 건가?”

“그만큼 귀한 꽃이니까요.”

아르제오의 태도가 재미있는 듯, 레이라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는 종종 어린아이처럼 굴다가도 돌연 색기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종잡을 수 없는 그는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양이 같았다. 변덕을 부리다가도 성큼 다가서 머리를 부비는 것처럼.

보고 있기만 해도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더 찾아봐도 되죠. 이곳에는 얼마나 더 머무를 건가요?”

“글쎄, 유진이 곧 돌아올 테니 그리 오래 있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내가 그 씨앗을 아직까지 찾지 못한 건, 곧장 수도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야. 다른 도시로 가면 찾을 수 있어.”

“수도에 가면 있지 않을까요? 타국의 상인들이 잔뜩 모이는 곳이라면서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제오를 보며 그녀는 애써 웃음을 참았다. 전에는 서둘러 수도로 향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이 느긋한 시간이 좋았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유진이 온 걸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레이라를 아르제오가 다급히 붙잡았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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