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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16)화 (16/122)

<16화>

“왜 늘 그리도 ‘적당히’를 모르시는 겁니까? 이 일은 또 어떻게 보고를 해야….”

“뭐, 아무도 안 죽였잖아. 그럼 됐지.”

“될 일입니까?”

“안 될 건 또 뭐야.”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탄하는 유진과 함께 뚱한 얼굴의 아르제오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줄 알고 노크를 생략하고 들어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 레이라는 다시 눈을 떴다.

“어, 공녀님. 정신이 드셨군요.”

투덜거리던 아르제오는 유진의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그는 단숨에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서며 물었다.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우며, 눈빛도 유혹하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다정한데 전체적인 분위기에 색기가 흘러, 묘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하자, 아르제오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손목과 팔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본 아르제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의사가 말했지만, 아르제오가 고집을 부렸다.

이 얇은 손목에 밧줄을 풀려 애쓰다가 쓸린 상처도 있었고, 여러 번 묶인 상태로 넘어져 멍이 심했다.

그러니 붕대를 감아야 한다고 아르제오가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 놓고는 막상 붕대가 감긴 팔을 보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게나 분풀이를 하고 왔는데 다시 울컥 화가 치솟는 기분이었다.

“역시 가서 그 자식들 손모가지도 부러뜨리고 와야….”

“제발 고정하시죠. 공녀님도 깨어나셨으니, 곁에 있어 드리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레이라를 언급한 유진의 설득이 먹혀들었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아르제오가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레이라가 조금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응?”

“구하러 와 줘서.”

지극히 당연한 그 감사 인사가, 아르제오는 의외였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고, 곧 눈매를 곱게 휘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 미소만큼은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다정했을 뿐.

“그런데 전 어떻게 찾았어요?”

“응?”

“아이고, 말도 마세요. 치안대를 이끌고 온 도시를 뒤졌습니다.”

제 노고를 알아 달라는 듯 유진이 과장되게 제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치안대를요?”

그에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곳의 치안대는 상인의 요청에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나요?”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 아닌 이상 주어진 일들, 그리고 황궁의 명령을 최우선시하는 게 치안대였다.

물론 ‘치안’을 관리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고, 범죄 조직 소탕은 치안 관리의 일부였다.

게다가 신고가 들어온다면 마땅히 나서는 게 당연하지만, 그녀 하나 찾자고 온 도시를 뒤지다니.

아무리 공작가에서 좋은 것만 보여 주려고 했다고 해도, 정말 좋은 것만 보고 자란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이들이 버젓이 있으니.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즐거운 시간만 보낸 것도 아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긴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치안대가 그저 상인의 일로 그렇게까지 나서 주었다는 것이 의아했다.

레이라의 질문에 유진은 아차, 싶어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지. 난 돈이 많거든.”

하지만 아르제오는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치안대에 돈을 주고 움직이게 했다고요?”

“그래. 그만큼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어.”

“리히덴의 치안대는 돈만 주면 움직이나요?”

맑은 청록색 눈동자가 똑바로 부딪혀 왔다. 줄곧 뻔뻔하게 대답하던 아르제오도 그 물음에는 입을 닫았다.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리히덴 제국의 치안대는 전부 그저 돈에만 움직이는 하찮은 단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고작 말이라고 치부하고 대답해 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 갖는 힘은 생각보다 컸다.

아르제오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무니 레이라가 동그란 눈으로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아르제오.”

“왜.”

“정체가 뭐죠?”

“말했잖아, 상인이라고.”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 상인이었으면 치안대를 움직이는 건 말이 안 돼요.”

“말이 안 될 거라는 건 편견이야. 편견을 버려.”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뻔뻔한지. 그런데 이상하게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냥 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래요. 일단은 상인인 걸로 해요. 구해 줬으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고맙네.”

참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다.

그가 상인이라고 말하면 덥석 믿어 버릴 만큼. 그가 무언가 물건을 사라고 권유하면 덥석 사 버릴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이어진 질문에 유진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세요. 엄청나게 응징하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응징이요?”

아르제오가 직접 응징한 건가?

그런 의문에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얼굴을 보던 아르제오가 날카롭게 유진을 노려보았다.

“유진, 쓸데없는 말이 많다.”

짤막한 한마디에 유진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입을 합 다물었다.

눈치를 주는 아르제오를 힐끔거린 레이라는 살포시 웃고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유진, 일은 다 끝났나요?”

“아, 예.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곧 다시 출발할 겁니다. 그전까지 푹 쉬세요.”

“고마워요, 유진. 구해 준 것도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마치 기사처럼.

레이라는 그런 유진을 물끄러미 응시했고, 그 눈빛을 견디다 못한 유진이 그만 가 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어차피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있다며.

“다시 누워.”

“네?”

되묻는 레이라를 아르제오는 조금 뚱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밀어 넘어뜨리려는 줄 알았더니 다른 손으로는 등을 받쳐 조심스럽게 눕혔다.

의외로 자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얌전히 누웠다.

“아르제오.”

“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이 없는지 확인했다.

“고마워요.”

“뭐가?”

“치안대를 움직이느라 돈을 어마어마하게 썼다면서요.”

“아, 그랬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듯 아르제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레이라가 눈을 가늘게 뜨니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감사 인사는 한 번이면 됐어.”

“그냥, 신기해서요. 절 찾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르제오는 입술을 비죽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마도 그래서 소란이 일 만큼 혼자서 도망치려고 발버둥 친 것이리라. 구해 줄 사람은 없으니, 스스로 해결하려고.

문득, 정말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잃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싶었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예시였다.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불길한 상상을 털어 낸 아르제오가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로 말했다.

“불렀잖아.”

분명 그를 부르긴 불렀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도 없어서. 도움을 바라는 마음에. 하지만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걸 들었어요?”

“들었지.”

끌어 올린 입꼬리, 눈매가 곱게 휘며 지그시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또다.’

레이라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애써 동요를 감췄다.

아르제오가 저렇게 웃을 때면, 왜 유혹당하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치 꼬셔서 한입에 꿀꺽 삼켜질 것 같은 기분.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앞선 레이라는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냥 태연해 보이는 표정에 아르제오는 내심 섭섭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미모인데 말이다. 얼굴을 붉히거나 시선을 피하는 일들은 많았다.

물론 넋을 놓고 바라보는 이들도.

하지만 레이라처럼 마냥 태연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아르제오는 의미 모를 아쉬움을 뒤로하고 싱긋 웃었다.

“그나저나, 대단하던데?”

“뭐가요?”

“건물 지하는 물론, 밖까지 풀숲이던데. 그거 그대가 한 거지?”

“네.”

레이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 것도 가능한 거야?”

“그러게요. 가능하더라고요.”

그녀로서도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가능할지 확신도 없었고, 그저 뭐라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으니 무턱대고 한 일이었다.

그 지나친 체력 소모와 더불어 아르제오가 나타나서 긴장이 풀린 탓에 정신을 잃었지만. 그래도 가능했다.

“근데, 눈에 너무 띄었어.”

“역시 그렇겠죠?”

당시에는 그저 도망치는 것에 필사적이어서 다른 건 생각하지 못했지만, 너무나도 눈에 띄는 짓을 했다.

“발루아 제국만큼은 아니겠지만, 이쪽에서도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주목하는 이들은 많아. 당연히 공녀의 소문을 아는 사람도 많고.”

“그렇겠네요.”

“이번 일이 귀족들 귀에 들어가면 좀 곤란해질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현재 그녀의 상황으로서는 그랬다. 폭풍우에 휩쓸려 리히덴 제국으로 흘러들어왔으니, 따지고 보면 밀입국이었다.

더군다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발루아 제국 사람이.

레이라는 그 특별한 힘 때문에 알아보기도 쉬웠다.

“아무튼, 뭐라도 좀 먹을래? 아니면 더 잘래? 지금 푹 쉬어. 곧 출발할 거니까.”

“음…. 괜찮으면 차를 한잔 마시고 싶어요.”

“그래? 그럼 준비시킬게.”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방을 나서려다 말고 다시 몸을 빙글 돌렸다.

다시 침대로 다가선 아르제오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상체를 숙였다. 그러고는 싱긋 웃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은 미소였다.

“왜요?”

“다시 말하지만, 앞으로 수도로 가는 길에는 그 힘, 숨기는 게 좋을 거야.”

무턱대고 소녀의 시든 꽃을 피워 주니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아르제오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함부로 그 힘을 쓰지 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차를 내오지.”

경고처럼 들린 말을 남긴 그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아르제오까지 방을 나서니 침묵이 맴돌았다.

시든 꽃을 보고 무심코 손을 뻗었었다.

‘조심해야겠네.’

이제껏 살아오며 신분을 숨긴 적도, 힘을 구태여 숨긴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발루아 제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삼 제가 얼마나 좁은 세상에 살았는지 와닿았다. 이제 와서 알아도 아무 소용 없는데 말이다.

‘…빨리 돌아가야지.’

돌아가면 이런 무서운 일은 다시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노려지는 일도 없을 테고.

돌아갈 곳에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이 힘 때문에 노려지는 일도, 아르제오가 구하러 오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일을 겪고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스워서 레이라는 팔을 들어 눈가를 덮었다.

하루라도 빨리 수도로 가서 타국 상인과 함께 국경을 건넜으면 하고 바랐다.

조금이라도 서둘러, 자신에게서 이 자유로운 생활을 빼앗아야 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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