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슬쩍 옆으로 비켜 주저앉은 레이라는 방향을 조금 틀었다. 그리고 숨을 죽이고는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로 나아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쾅거리는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레이라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녀는 몸을 더 바짝 수그리며 등 뒤로 바닥을 짚었다. 그런데 안쪽으로 걸어가던 걸음이 어째서인지 레이라의 근처에서 우뚝 멈춰 섰다.
레이라는 꼼짝도 못 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왜 그러십니까?”
함께 있던 동료가 묻자, 남자가 제 근처의 풀을 뒤지기 시작했다.
쿵!
레이라의 바로 근처에 발이 바닥을 찍었다.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눈물이 절로 맺힐 만큼의 공포였다.
“아닌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곧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발소리가 조금 더 멀어지자, 레이라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겨우 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에 처져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를 악문 그녀는 다시 밖을 향해 나아갔다.
문을 찾아낸 직후에는, 다시 바닥을 짚어 풀이 자라나게 했다.
“우왁! 야, 이거 계속 자라!”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이 더 뒤로 물러나는 걸 확인한 레이라는 최대한 빨리 밖으로 나섰다.
“야! 그 여자 없어졌어!”
“뭐?”
건물 모퉁이를 돌아 어둠에 몸을 숨긴 직후, 그녀를 찾으러 안으로 들어갔던 남자가 소리치며 뛰쳐나왔다.
그 목소리를 신호로, 레이라는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밖은 밤이었다. 길거리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쪽이다!”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달리니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레이라는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달렸다.
제발, 제발. 제발 누구라도.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 보이길.
하지만 달리는 길은 텅텅 비어 있었고, 뒤쫓아오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거기 서!”
호통치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까워서 레이라는 등골이 서늘했다.
‘안 돼.’
잡히면 안 돼. 저 손에 붙잡히는 순간 끝일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제발, 제발…. 아르제오…!’
저도 모르게 그를 찾았다. 제발, 제발 다시 붙잡히기 전에 아르제오가 나타나 주길.
“악!”
빛나는 백금발이 남자에게 붙잡혀, 레이라는 한순간 머리를 휘어 잡힌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어딜 도망가! 아오! 괜한 체력 낭비하게 하고 있어.”
머리를 잡힌 반동으로 뒤로 넘어진 레이라는 손목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읏…!”
바닥에 고꾸라진 레이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린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설마, 아까 그 풀숲도 네 짓이야? 이야, 이거 대단한데?”
“야, 그럼 더 대단한 가치 아니야? 더 비싸게 팔 수 있나 알아봐야지.”
뒤늦게 쫓아온 다른 남자와 낄낄거리며 주고받는 대화에 소름이 끼쳤다.
다시 붙잡혔다. 이대로 끌려가면 정말, 어딘가로 팔려 가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안 돼. 오직 그 생각만 들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고 하자, 남자가 거칠게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어딜!”
“꺅!”
손이 뒤로 묶인 탓에 넘어질 때의 통증이 배로 느껴졌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그들은 비웃었지만, 그 웃음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르제오. 그 이름이 강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아르제오.”
“뭐? 살려 달라고? 걱정하지 말라니까, 안 죽여.”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레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숨을 훅 들이마시며 외쳤다.
“아르제오!”
“야! 입 안 틀어막고 뭐 하냐!”
퍼억.
돌연 쏟아진 폭력에 레이라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괜히 큰소리 내지 마, 어차피 달라지는 것도 없으니까.”
“너무 소란 피웠어. 빨리 가자.”
험악하게 얼굴을 굳힌 남자가 레이라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상태로도 그녀는 끝내 발버둥을 쳤고, 몸부림치는 이를 끌고 가는 것이 번거로워진 남자가 손을 치켜들었다.
“거참 귀찮게 하네.”
기절시켜 둘러업고 가려는 속셈이었다. 그 손을 발견한 레이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이어 퍼억, 하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레이라의 머리카락을 강하게 휘어잡고 있던 손길이 사라졌다.
“나 불렀어?”
이 순간, 가장 간절한 그 목소리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제 머리채를 잡았던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을 그 남자에게서 떼어 내려는 듯, 아르제오가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여유로운 듯이 슬쩍 올린 입꼬리. 하지만 비 오듯이 흐르는 땀방울과 가쁜 숨을 내쉬는 걸 보니 꽤 다급히 자신을 찾은 듯싶었다.
‘진짜 왔네.’
레이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 도시에서 자신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가 자신을 찾아냈다.
긴장이 한순간 탁, 하고 풀리며 스르륵 눈이 감겼다.
얕은 숨을 내쉬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레이라를 아르제오가 재빨리 붙잡았다.
“전하!”
아르제오는 식은땀이 맺힌 동그란 이마를 부드럽게 쓸었다.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그 동료를 발견한 유진이 검을 뽑아 들었다.
“공녀님은 괜찮으십니까?”
“유진.”
“예.”
“저 새끼들 죽여도 되냐?”
“예…?”
유진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르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고요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저, 이, 일단 진정을….”
유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아르제오는 레이라를 품에 안고는 일어섰다.
냉기가 흐르는 은회색 눈동자가 빠르게 남자 둘을 훑었다.
“패거리가 있을 거야. 저 새끼들 다 잡아들여.”
“예.”
짧게 명령한 아르제오는 그대로 유진을 뒤로하고 걸었다. 등 뒤로 남자들의 고통 섞인 비명이 들리고, 곧이어 치안대들도 그리로 향했다.
아르제오 반 리히덴. 그가 부관인 유진과 함께 카리아에 방문하여, 그 도시에서 대대적인 범죄 조직 괴멸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은 곧 황궁에 전해지게 되었다.
* * *
그날, 하루 사이에 치안대는 미어터질 만큼의 범죄 조직을 잡아들였다.
그들의 처분을 결정하는 건 온전히 치안대의 몫이었지만, 레이라를 납치했던 패거리만은 따로 가두어졌다.
그들은 그녀를 납치했던 건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불법적인 일에 손댄 건 사실이지만, 이제까지처럼 크게 문제가 될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윗분’들 중에는 자신들의 입김이 닿는 이들도 있었고.
태연한 얼굴로 감옥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귀족 나리도, 치안대 관련자도 아닌 모르는 이가 서 있었다.
짙푸른 머리칼에 은회색 눈동자. 그 서늘한 눈빛에 패거리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이 사람이 왜 자신들 앞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망했다’라고.
“그래서. 이 새끼들 죽여도 된다고?”
아르제오는 감옥에 갇힌 남자들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그의 곁에 선 유진은 이번엔 한층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정하시죠.”
“너도 봤잖아, 이 자식들이 어떻게 했는지.”
물론 유진도 목격했다. 저자들이 레이라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주먹을 치켜들었던 것을.
게다가 그녀를 되찾은 즉시 의사에게 꼼꼼히 살피게 하니 맞은 흔적도 있었다. 제일 상태가 좋지 않았던 건 팔과 손목이었지만.
아직 레이라를 잘 모르고,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수도까지 함께할 일행이었고, 제 일행이 그런 일을 겪은 건 불쾌했다.
물론 아르제오의 감정은 단순한 불쾌함을 넘어선 수준이었지만.
‘언제 그렇게 가까워지신 거지?’
카리아에 도착하고부터는 줄곧 일 처리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니, 그사이 둘이 가까워진 것 같았다.
아무리 가까워졌다고 해도, 아르제오의 분노는 조금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두피가 다 벗겨지도록 저 머리채를 뜯어야 직성이 풀리겠다.”
“아니, 고정하시죠? 제 말은 안 들으실 건가요?”
“내가 꼭 들어야 해?”
“너무 과한 일을 하신다 싶으면 막는 게 제 일인데요?”
“그럼 넌 막아. 난 해야겠으니까.”
팔을 걷어붙이는 아르제오를 보며 유진은 질겁하며 매달렸다.
“일단 진정하세요!”
“저 머리털을 다 뜯어 놓아야 진정이 되겠어.”
“그, 그럼 적어도 한 놈만 하시죠? 어제 얼굴 확인하셨으니까, 그놈만요.”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당장이라도 감옥 안으로 뛰어들어 전날 밤 레이라의 머리채를 잡은 놈을 쥐어뜯고 싶었다.
그 외의 패거리들도 전부. 하지만 마냥 욕심부릴 수만도 없어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진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아르제오를 놓아주었다.
그가 지목하는 놈은 치안대의 손에 이끌려 나와 정말로, 한참이나 아르제오의 손에 머리카락을 쥐어 뜯겼다.
그 비명이 어찌나 처절한지, 감옥에 남아 있던 다른 패거리들이 자신들도 불릴까 봐 바들바들 떨었다.
한 놈을 묵사발로 만들고도 아르제오의 분은 풀리지 않았지만, 레이라가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순순히 물러났다. 덕분에 패거리의 다른 이들은 무사했다.
하지만 감옥을 나서기 전에 아르제오는 저들의 처벌을 확실히 할 것을 치안대에게 직접 명했다.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제게 직접 결과를 알리라고.
그들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필이면 레이라를 건드린 탓에.
* * *
폭풍우로부터 며칠 뒤.
헤레이스는 여러 번 시타델 섬으로의 출입을 요구했지만, 황궁은 모조리 거절했다.
폭풍우 피해 지역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렇게 피해가 컸으니 시타델 섬도 살펴야 한다는 게 헤레이스의 주장이었지만, 폭풍우가 덮친 지역과 시타델 섬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확실히 시타델 섬이 있는 쪽 국경과 그 근처 지역은 멀쩡했다.
그저 비가 좀 많이 내린 정도.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헤레이스가 유난을 떠는 걸로 보였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섬에 아무도 없이 혼자 지내는데, 비가 많이 내려 그 피해가 생겼다면 홀로 수습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황제가 시타델 섬의 죄인에 관한 일을 전부 일임한 제럴드 후작이 반대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일단 진정하거라.”
애가 타니 헤레이스는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속이 꽉 막힌 듯이 답답했다.
속이 타는 건 포레스티아 공작, 에드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폐하께서 일을 일임하셨다고 해도, 후작의 오만방자한 태도는 도를 넘었습니다.”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헤레이스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제럴드 후작은 마치 인질이라도 잡은 양, 기세등등해져서는 헤레이스의 요구를 모조리 거부했다.
이유는 전부 폭풍우의 피해 지역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너무 바쁘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곧 보급품을 보내는 날이 돌아오니, 조금만 기다려 보자.”
“…그래도 폐하께 알현 요청은 하겠습니다.”
“그래.”
에드가도 마냥 손 놓고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헤레이스가 황제를 만나는 일든 달갑지 않았지만, 레이라가 걱정되니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우의 피해는 그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지역이었다. 그러니 괜찮겠거니, 싶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죄인들이나 머물던 그 허름한 집에 비가 새지는 않는지, 혹시 비를 맞아 감기에 걸린 건 아닌지.
아무도 없는 섬에 홀로 지내는 딸이 안쓰러워서 마음이 아렸다.
* * *
정신이 든 레이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주 오랜만에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전날 머리채를 강하게 잡혔던 탓에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 같고, 손목과 팔에는 어째서인지 붕대도 감겨 있었다.
밤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망치던 와중에 놈들에게 붙잡혀 몇 번이고 패대기쳐졌으니 팔이 남아나질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을 잃기 전 분명 아르제오를 보았다. 눈을 뜬 곳도 숙소였으니 아마 잘 해결되었겠지.
꼼짝도 하기 싫은 기분에 레이라는 다시 눈을 살포시 감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경험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같은 사람을 제 돈벌이를 위해 귀족에게 팔아넘긴다는 사람이 있는 것도. 그걸 좋아하며 받는 귀족의 존재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그런 금수만도 못한 일을 즐기다니.
그때도 지금도 그런 놈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같았지만.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공작가는 이런 험한 일들이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에 늘 그녀를 과보호했다.
가끔 조금 갑갑하게 느끼긴 했지만, 늘 감사하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가족까지 미치자, 그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시타델 섬에 혼자 두지 않겠다던 헤레이스. 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걱정할까.
게다가 거대한 파도에 휩쓸렸으니 그 섬도 온전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하겠지….’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곧 방문이 소란스럽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