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서고를 나선 아르제오는 즉시 카리아의 치안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을 찾았다.
“유진을 불러와라.”
안으로 들어선 아르제오는 옷 속에 감추고 있던 제 목걸이를 치안대에 내보였다. 황족의 문양이 새겨진.
“황자 전하! 자, 잠시만, 금방 불러드리겠습니다!”
다급히 안쪽으로 유진을 찾으러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아르제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팔짱을 낀 손이 팔을 톡톡 두드리며 초조함을 드러냈다.
자신이 함께 있으면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아르제오는 그게 부아가 치밀었다.
아래층은 조금 소란스러울지 몰라도, 그들이 있던 층은 조용했다. 그 고요한 가운데 어떻게 아무런 소란 없이 그녀를 데려간 것인가.
그는 혀를 차며 유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치안대에서 아르제오가 지시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던 유진이 곧 말을 전해 듣고 달려 나왔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 아르제오는 어느 도시에 들르든지 치안대나, 영주와 대면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황궁이 아닌 곳에서 귀족과의 접점은 절대로 만들지 않았다. 신분을 드러내며 다니는 것을 불편해하기도 했다.
“레이라가 사라졌어.”
“네?”
유진은 무슨 상황인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굳은 아르제오의 표정에 점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공녀께서 사라지셨습니까? 어디서요?”
“키리아 대서고. 함께 있었는데,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사라졌어. 누군가 데려간 것 같아.”
그의 대답에 유진은 참담한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레이라의 신분이 발각되었을 리는 없어. 그러니 유진, 지금부터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의 리스트를 받아 와.”
“치안대에서 말입니까?”
“그래. 사람을 파는 일을 업 삼는 놈들은 물론이고, 몰려다니는 양아치 패거리라도 빠트리지 마.”
“예.”
“치안대도 움직이게 해. 입단속은 철저히 시키고.”
“예, 전하.”
그 호칭은 생략하라는 말을 하려다, 아르제오는 인상만 찌푸리고 넘어갔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
“움직여.”
“예.”
나지막한 한마디에 유진은 곧장 치안대로 뛰어 들어갔다.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두웠을 뿐.
그리고 묶여 있는 건지,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야, 눈을 떴네?”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슬쩍 시선을 돌리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라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제 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면 뭐 어때, 당신은 이제 곧 팔려 나갈 텐데.”
나지막한 말에 일순 레이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자신의 신분을 아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마음 졸이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제가 당신들에게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나요?”
침착하게 그런 걸 묻는 레이라를 보며 남자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초면인데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나?”
“그런데 왜 저를 데려오신 건가요?”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한 표정에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전에 보니까, 길거리에서 꽃을 팔던 어린아이의 시든 꽃을 다시 피우더군.”
“무언가 잘못됐나요?”
“잘못되지 않았지. 오히려 아주 잘 되었어.”
의자에 앉은 남자는 그녀를 보며 턱을 괬다.
“그런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유흥으로 꽃을 피워 주는 여자, 딱 귀족들이 좋아하겠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레이라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운이 좋았어, 길거리에서 그런 장면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착하게 살고 볼 일이야, 안 그래?”
“…….”
“다른 건 뭘 할 수 있지? 보여 줄 수 있나?”
“…….”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보며 남자는 씩 웃었다.
그녀의 찌푸린 미간을 보며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레이라는 그가 자신의 신분을 아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몰래 안도했다.
“뭐, 걱정 마. 그나마 멀쩡한 곳으로 보내 줄게. 얼굴도 반반하니 말이야. 보낼 곳이 정해질 때까지는 이곳에 얌전히 있어.”
남자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고는 어두운 방에 레이라만을 남겨 두고 나섰다.
서고에서 아르제오가 함께 있었으니 구하러 오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설령 그가 자신을 구하고 싶고, 구하려고 애쓴들 찾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을 무슨 수로 찾는다는 말인가.
이들은 그저 길을 지나던 중, 우연히 소녀의 시든 꽃을 피워 주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아르제오가 자신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방이 너무 어두워서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 혼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해.’
구하러 올 사람은 없었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 외에 방법은 없었다.
레이라는 등 뒤로 묶인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밧줄을 풀어내려 움직이니 점점 손목이 쓸렸다.
그래도 그만둘 수는 없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자신을 잡아 온 남자가 했던 말처럼 귀족들의 유흥거리로 팔려 갈 것이다.
뜻하지 않게 발을 들인 타지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돌아가야만 했다. 다시 그 아무도 없는 섬으로 돌아가야 공작가가 안전할 테니까.
“읏….”
레이라는 손목의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 고통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은 레이라는 긴 숨을 내뱉었다.
밧줄을 푸는 것도 문제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곳이 어디고,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땅과 가까우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레이라는 나무로 된 바닥을 짚었다.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이게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도는 해야 했다.
바닥을 짚은 손으로, 평소 흙을 만지며 힘을 쓰던 대로 했다. 자신의 힘이 땅에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혹시나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건물의 고층이 아니라면. 오히려 땅과 가까운 지하로 내려온 것이라면.
빛이 들지 않는 걸 보면 지하일 가능성이 조금 더 컸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땅이 가까울 터였다.
땅에 닿아 있다면, 근처에 자라난 풀 한 포기라도 있다면. 그럼 그걸 이용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개가 낀 곳을 더듬거리며 걷는 기분으로 힘을 쏟아 내는 레이라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힘을 쓰는 것과 동시에 꼼지락거리며 밧줄을 풀려 애썼다.
이렇게 장시간 집중해서 능력을 쓴 적이 없어서 레이라는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정신을 잃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힘을 흘려보낸 끝에, 레이라는 안개 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찾았다.”
그와 동시에 나무 바닥 사이로 푸릇한 풀이 고개를 내밀었다.
* * *
“끄악…!”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손목을 거칠게 짓밟은 아르제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고에서 레이라가 사라진 직후부터, 곧장 치안대를 움직여 도시에서 범죄를 일삼는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하지만 날이 저물고, 밤이 된 지금까지도 레이라를 납치한 이들을 아직 잡아들이지 못했다.
때문에 아르제오는 지금 극도로 신경이 예민했다.
날이 저물고부터는 과하다 싶을 만큼 그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후….”
“전하, 여기도 안 계십니다.”
“가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차게 식은 그의 눈이 한차례 밝은 달을 힐끔거렸다.
아직도 레이라를 찾지 못했다. 인생을 막사는 놈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들이었다.
“다음은 이쪽에….”
지도를 짚으며 말을 잇던 유진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들렸던 소란스러운 목소리들에 유진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르제오도 들었는지, 같은 방향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래.”
이 늦은 시각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것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지금까지도 레이라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 * *
몇 시간이고 꼼지락거렸지만, 밧줄을 푸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레이라는 제힘을 이용해, 갇혀 있던 그 방을 풍성하게 자라난 잔디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흙으로 직접적으로 힘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만큼 더 큰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한번 하고 나니 더 수월한 느낌은 들었다.
건장한 성인의 허리까지 올 만큼 풍성하게 자란 풀이 방을 가득 채우니, 바닥에 앉은 레이라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밧줄을 푸는 대신 조금씩 무릎으로 기어 움직였다.
문이 있는 위치는 알고 있었다. 방에 함께 있던 남자가 나가는 걸 봤으니.
문가에 다다른 레이라는 다시 바닥을 짚었다. 힘이 빠져서 손이 바들바들 떨려오기에,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으니 당연하다는 듯이 잠겨 있었다. 레이라는 허리까지 자라난 풀 자락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그걸 문고리 아래의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풀이 자라나며 달그락거리더니 이내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그대로 다시 주르륵 주저앉은 레이라는 문밖까지 풀을 풍성하게 키우고서 문을 열고 나섰다.
문 앞은 휑하니 누군가 지키고 있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 겁을 잔뜩 집어먹고, 혼자서 도망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할 거라고.
물론 찰나, 누군가 구하러 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레이라는 스스로 움직였다.
아르제오의 말마따나, 그녀는 생각하면 곧장 행동하는 저돌적인 면이 있었으니.
문을 열고 나서니 어두운 와중에, 정면에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 게 보였다.
‘들키면 안 돼.’
제 모습이 보여서는 안 됐다. 레이라는 벽에 바짝 붙어서 다시 주저앉았다. 풀 속에 모습을 감추고는 다시 바닥을 짚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계단을 다 뒤덮고도 남을 만큼.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계단 위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야, 이거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당황하는 목소리들과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레이라는 계속 풀을 키웠다.
“계속 자라잖아!”
“야, 일단 나가!”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마주하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게 된다. 레이라는 슬금슬금 계단을 올랐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는 말소리와 그 발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갔는지 확인한 레이라는 그 근처로 열심히 움직였다.
풀숲에 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그녀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발소리가 밖으로 향한 방향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곧 찬바람이 뺨에 와 닿았다.
‘밖이 가까워.’
풍성히 자란 풀들이 살랑이며 바람에 흩날렸다.
답답한 저 안에서 얼마나 갇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가까이 느껴지는 바깥 공기가 반가웠다.
밖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곳을 벗어나면 곧장 내달릴 생각이었다.
비록 두 손은 여전히 뒤로 묶여 있었지만, 도움을 청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며 서두르는데,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안에 그냥 두고 나왔어!”
“누굴.”
“그, 시든 꽃을 피웠다는 그 여자. 귀족가에 보낸다고 했잖아.”
“야, 미리미리 챙겼어야지!”
몇 마디 말이 오가더니 발소리가 정면으로 다가왔다. 그에 레이라는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