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3)화 (13/122)

<13화>

도시 카리아의 대서고. 왕궁 서고만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개방되어 있는 곳이었다.

책을 외부로 가져갈 수는 없지만,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하여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곳. 그리고 누구나 출입할 수 있으니 안으로 들어서는 이들을 검문하는 일은 없었다.

서고를 나서는 이들은 자료나 책을 빼돌리지 못하도록 꼼꼼히 확인했다. 손에 든 것이 없다면 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을 테지만.

덕분에 레이라와 아르제오는 어려움 없이 서고로 들어설 수 있었다.

“와아.”

작게 탄성을 흘린 레이라는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서고는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책이나 문헌을 조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상도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된 곳이라는 점이 레이라는 썩 마음에 들었다.

“좋은 곳이네요.”

“그렇지?”

아르제오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으니, 그녀는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분 상관없이 개방된 서고는 처음 봐요.”

“그쪽 나라에는 없었어?”

“글쎄요. 들어 본 적이 없네요. 가본 적도 없고.”

어차피 돌아가도 볼 수 없는 처지이고.

그 뒷말은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자꾸만 되새기지 않으면 자신이 놓인 처지를 잊을 것만 같아서.

“그래? 여기서 보고 가면 되겠네.”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가볍게 받아치는 아르제오가 편안했다.

“그러네요.”

싱긋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그가 먼저 걸음을 뗐다.

“마음껏 둘러봐.”

“아, 전 그럼 식물 쪽 책 좀 보고 올게요.”

“같이 가자. 마침 그 ‘레벤’이라는 꽃에 대한 자료를 좀 보고 싶으니까.”

“그래요.”

아르제오가 서고 직원에게 물어 식물 관련 자료가 있는 곳을 파악할 동안, 레이라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동화책을 모아 놓은 곳에는 아이들이 까르륵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입구와 가까운 곳은 비교적 시끌벅적했다. 아이들도 있었고.

그리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더 위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소음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두 사람이 안내받은 식물 관련 서적이 있는 곳은 의학 서적과 비교적 가까웠다.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는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엄청난 집중력으로 공부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의사가 되려는 사람인가?’

그런 그들을 설핏 웃으며 바라본 레이라는 이내 책장으로 다가섰다.

빼곡하게 꽂힌 책들을 쭉 훑는데, 아르제오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쪽이야.”

워낙 고

요한 곳이니 목소리를 낮춰 말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라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거리였다.

어깨를 흠칫하긴 했지만, 그녀는 금세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살피고 있던 책장의 반대쪽으로 레이라를 이끈 그는 마음껏 보라며 책장으로 손을 뻗었다.

“그 전에, ‘레벤’이라는 꽃에 대한 자료가 실린 책은 찾아 주고.”

“알아서 찾을 생각은 전혀 없군요.”

“난 원래 이런 걸 내 손으로 찾아본 적이 없어서.”

당연하다는 듯 싱긋 웃는 아르제오를 흘겨본 레이라가 픽 웃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책장으로 돌려 유심히 살폈다.

본 적이 있는 책도 보였고,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그중, 레벤의 자료가 짤막하게나마 실린 책을 발견한 그녀는 손을 뻗었다.

꽤 두꺼운 터가 묵직한 책을 펼친 레이라는 목차를 훑고는 아르제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주변이 너무 고요한 탓에,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레이라는 제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 들리도록 발뒤꿈치를 살짝 들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은 목차의 네 번째 순서를 짚고 있었다.

“여기 내용 중에 레벤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걸 보시면 될 거예요.”

“아, 응….”

제가 불쑥 거리를 좁힐 때는 좀처럼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레이라를 탓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가 성큼 거리를 좁히니 아르제오는 순간적으로 평소의 여유로움을 잃을 뻔했다.

가까이 다가오니 눈부신 백금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워 보이네.’

희고 고운 피부와 책을 보며 빛내는 청록색 눈동자. 가까이 다가오니 햇살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가는 목 근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올을 아르제오가 홀린 듯이 바라봤다.

‘간지럽겠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의 목 부근으로 손을 뻗었다.

“저쪽에 가서 읽고 있을래요?”

그때 책을 응시하던 레이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화들짝 놀란 아르제오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응?”

목 언저리를 향해 다가오던 손을 보지 못한 레이라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친 손인가? 이 손이 미친 건가? 지금 뭘 하려고….’

등 뒤로 감춘 손을 꾹 쥔 아르제오는 멀뚱멀뚱 레이라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책도 받아 들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니 그녀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르제오?”

탐스러운 입술 사이로 제 이름이 다시 불렸을 때에서야 정신을 차린 아르제오는 재빨리 책을 받아들었다.

“저쪽에서 읽고 있을게.”

“아, 네.”

괜스레 술렁이는 제 마음을 추스르며 아르제오는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책을 살피는 레이라의 모습이 보이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책장은 보이는 곳이었다. 이쪽으로 나오면 곧장 보일 터였다.

책을 찾으면 자신에게 올 거라는 생각에, 그는 레이라가 짚어 준 챕터를 펼쳤다.

‘레벤.’ 푸른 빛을 띠는 꽃으로, 생명이 담긴 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꽃은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찾기도 힘들고, 피워 내기도 힘들었다.

피워낸 사람의 기록으로는,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도 살려 내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죽기 직전인 사람을 살렸다는 얘긴가.’

어떻게 그저 한낱 꽃이 그런 일을 한단 말인가. 책을 읽으면서도 아르제오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을 쓴 사람은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는지,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그나마 신빙성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이라 여겼다.

딱히 완전히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이라의 힘을 이 두 눈으로 보았으니 모든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이러한 효능이 있다는 것 역시 믿기 어려웠을 뿐.

‘뭐, 레이라가 길러 냈을 때 그런 효능을 발휘한다고 하면, 더 믿을 수 있겠네.’

눈으로 직접 본 그 힘을 통해 그러한 꽃의 효능이 생긴다면 한층 더 믿음이 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아르제오는 슬쩍, 식물 관련 서적이 늘어선 책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늦네.’

뭘 하느라 이렇게 늦는 건가 싶어 아르제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읽던 책을 그대로 책상에 놔둔 그는 조용히 책장으로 걸어갔다.

“레이라, 왜 이렇게 오래 걸….”

책장 코너를 돌며 목소리를 낮춰 묻던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책장 바로 앞에 웬 책 한 권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아르제오는 즉시 주변을 살폈다.

‘어디 갔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어딜 간 건가. 정말이지 생각이 들면 곧장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책이 묘하게 거슬렸다.

얕은 한숨을 내쉰 아르제오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식물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의학 서적, 그리고 다른 서적들의 코너 쪽도 살폈다. 하지만 레이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빨라진 걸음은 이내 달리다시피 아래층이 보이는 난간으로 향했다.

빠르게 아래층을 훑고, 조급한 걸음으로 다른 층들까지 살폈지만, 그 어디에도 레이라는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아르제오는 우뚝 멈춰 섰다.

포레스티아 공녀. 그 존재가 드러났다면, 사방에서 그녀를 손에 넣으려 손을 뻗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가 탄로 났을 리가 없었다. 그럴 만한 일이 전혀 없었으니.

그렇다면 마음에 걸리는 건, 카리아에 도착한 첫날 길거리에서 만난 꽃 파는 소녀였다.

‘누가 본 건가.’

지나는 사람들이 그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능력을 쓴 건 경솔했다.

아마도 레이라는 줄곧 힘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살아와 무심코 나온 행동이었겠지만.

정체를 감춘 적도, 힘을 숨겨야 했던 적도 없을 터였다. 발루아 제국에서 감히 포레스티아 가문에게 손댈 리 없으니.

리히덴 제국에도 공작가에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이들은 많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좋게 생각하는 것과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아르제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제길.’

속으로 욕설을 읊조린 그는 굳은 얼굴로 빠르게 서고를 벗어났다.

* * *

서고에서 식물 관련 서적들을 살피던 레이라는 책상 쪽으로 향한 아르제오를 힐끔거렸다.

그러고는 책장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책에 집중하는 그를 확인했다.

‘정말 찾아 주려나.’

황태자비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끝내 찾지 못한 꽃이었다. 황궁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포기하고 있었지만.

다시 책장 사이로 들어선 레이라는 턱을 매만지며 꽂힌 책들을 훑었다.

‘이건 읽어 봤고, 저것도….’

기억에 있는 책들을 보니 그녀는 새삼 반가워졌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책을 살피던 그녀는 곧, 책장 아래쪽에서 눈길을 끄는 책을 발견했다. 곧장 쭈그리고 앉은 레이라는 그 책을 향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땅의 이치.’

어쩐지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이라고 생각하며 그걸 꺼내려는데,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비쳤다.

슬쩍 고개를 드니, 눈매가 길게 찢어진 남자가 생긋 웃고 있었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잠시 도와주시겠습니까?”

“네?”

“얼마 전 서고 밖 길거리에서 꽃을 팔던 그 소녀가 아가씨를 찾습니다. 잠시 저희와 함께 가시죠.”

꽃을 팔던 소녀라면, 레이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소녀였다. 그녀가 다 시들어 버린 꽃을 다시 피워 준.

레이라가 곧장 몸을 일으키니, 반쯤 빼 들었던 책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녀는 그걸 주우려고 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요, 일행에게 다녀오겠다고 얘기하고 올게요.”

아르제오를 떠올린 레이라가 몸을 틀려는데, 남자가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는 그녀의 입가에는 영문 모를 손수건이 대어졌다.

레이라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책이 발에 챘지만, 그리 멀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화들짝 놀라, 숨을 훅 들이마시니 더욱 약 기운이 빠르게 퍼지는 느낌이었다.

‘아르제오…!’

그에게 이 상황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레이라는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쳤지만, 실제로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주 찰나 자신을 붙잡은 팔을 붙잡았고, 금세 힘이 빠져나가며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인물에 의해, 레이라는 카리아의 서고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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