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가게를 나선 레이라는 곧장, 바쁜 거리 위에 꺾어질 듯이 서 있는 한 소녀에게로 향했다.
다 시들어 버린 꽃이 든 바구니를 들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었다.
꽃을 파는 아이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했고, 꽃도 다 시들어 있었다. 차림은 허름했고, 피부도 거칠었다.
레이라는 그 소녀와 비슷한 아이를 본 기억이 있었다. 오래전 공작령을 벗어난 곳에서 말이다.
그때를 떠올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어디가?”
아르제오의 목소리가 조금 멀리서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소녀가 어쩐지 눈길을 끈다고, 대답해야겠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는 정작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꽃 사세요….”
목소리에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시들어 버린 꽃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소녀 앞에 레이라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아르제오가 의아한 얼굴로 따라 섰다.
아이는 제 앞에 선 레이라를 마주 볼 자신이 없는지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꽃 사세요….”
빼빼 마른 아이를 레이라가 가만히 내려다보니, 뒤에 선 아르제오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 줘?”
그 물음에 레이라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쭈그리고 앉아 아이의 시야에 제 얼굴이 보이도록 했다.
“미안해요, 제가 지금 가진 것이 없어서.”
“아니에요….”
아이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들어버린 꽃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꽃이 이리 시들었으니 아무도 사지 않았다.
“그 대신, 이 꽃들이 모두 팔리길 바랄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라는 바구니에 담긴 꽃으로 손을 뻗었다.
‘아, 또 말릴 새도 없이 움직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르제오는 멍하니 그녀의 하얀 손끝을 응시했다.
그 손은 바구니에 담긴 시든 꽃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에서는 기적이라도 일어나는 듯 청록빛이 꽃으로 스며들었고, 다 시들었던 꽃들이 거짓말처럼 싱그럽게 피어났다.
무심코 제 바구니를 힐끔거렸던 아이는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뜨고는 입도 다물지 못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마도 레이라가 마법사가 아닐까, 이었을 것이다.
싱긋 웃은 그녀는 소녀의 푸석푸석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법사님이세요?”
“아니요, 그냥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소녀는 몽롱한 얼굴로 바구니의 싱싱한 꽃과 레이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작은 행동이 귀여운 아이였다.
“예쁜 꽃이니 꼭 다 팔렸으면 좋겠네요.”
“가, 감사합니다!”
활짝 핀 꽃은, 시들기 전보다 더 향기롭고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소녀는 들뜬 얼굴로 토닥거리며 거리를 걸어 사람들에게 꽃을 권했다.
자신 없어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웃으며 꽃을 권하는 얼굴이 어여뻤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레이라의 뒤에서 아르제오가 투덜거렸다.
“그 힘은 나만을 위해서 쓰기로 한 거 아니었어?”
“전 동의한 기억이 없네요.”
“매정하네.”
“그런가요?”
차분하게 받아치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는데, 눈빛에 색기가 담긴 것이 꼭 유혹하는 것 같았다.
자꾸만 그렇게 느껴지는 게 이상해서 레이라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어 상념을 털어 냈다.
“그러고 보니 그냥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기로 했던가.”
“그러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는 픽 웃었다. 그리고 슬쩍, 일순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그래도 너무 존재를 드러내는 건 좋지 않아. 소문의 특별한 힘을 지닌 포레스티아 공녀가 리히덴 제국에 있다는 게 알려졌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조심할게요.”
양국의 사이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딱히 없었고, 크게 눈에 띄는 능력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 존재가 알려지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면 사실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빨리 자리를 뜨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레이라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어디로 가나요?”
“쇼핑을 즐길 마음이 생긴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좋아, 그대가 말을 꺼냈으니까.”
어깨를 으쓱인 아르제오가 저벅저벅 앞으로 나아갔다.
레이라는 쇼핑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픽 웃으며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시선이 뒤로 따라붙었다.
소녀의 꽃을 다시 활짝 피워 주었을 때부터 레이라를 집요하게 따라붙은 시선이었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 * *
레이라는 아르제오에게 받은 주머니에, 타냐 지역 피난민 마을에서 가져온 씨앗을 넣었다. 그리고 줄을 매달아 목에 걸었다.
그녀는 수도로 가면 있다는 리히덴 제국에만 있는 과일이나, 식물을 씨앗으로 만들어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을 전부 심어 즐거운 유배 생활을 누리고 싶었다.
‘유배’와 ‘즐거운’이 함께 쓰이니 우스운 기분이었지만.
똑똑.
“레이라.”
주머니를 매만지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던 레이라는, 절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아르제오? 무슨 일이에요?”
문을 열고 나선 그녀는 씩 입꼬리를 올린 아르제오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대가 원했던 꽃씨를 구했지. 최대한 많이.”
그가 슬쩍 비켜서니, 방 세 개가 이어져 있는 로비에 큼직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레이라는 단숨에 화색을 띠며 로비로 나섰다.
“이게 다 씨앗인가요?”
들뜬 얼굴로 상자를 살피는 모습에 아르제오는 왜인지 모를 보람을 느꼈다. 어쩜 저리도 식물에 관하면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는 걸까. 평소에는 차분하기만 한데 말이다.
“그래, 최대한 많이 구해 달라는 부탁이었으니까.”
어쩐지 ‘잘했지?’라고 묻는 듯한 얼굴인 것 같아서 레이라는 살짝 웃음이 났다.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꽃씨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이걸,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멈춰서 쉴 때마다 꽃을 심을 생각이었다.
레이라는 오래전, 공작령에서도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전염병과 흉년으로 인해 공작령이 힘들었을 때, 그녀가 온 공작령을 돌며 꽃을 심었었다.
그때는 꽃과 함께,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의사가 일러 준 약초를 함께 심었었지만.
“고맙습니다.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얼마든지 더 구해다 줄 수도 있어. 그 씨앗을 다 심을 시간이 없을 테니 이 정도만 한 거야.”
“네, 네.”
“믿지 않는 말투네.”
“그다지 의심하진 않아요. 엄청나게 신뢰하는 것도 아니고요.”
“진짜 매정하잖아.”
“농담이에요.”
“그런 얼굴로 그렇게 농담을 한다고?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하네.”
투덜거리는 아르제오를 살짝 흘겨본 레이라가 다시 씨앗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대단하시니, 좀 구하기 어려운 씨앗을 부탁해도 될까요?”
“어떤 씨앗인데? 대가만 받는다면 난 상관없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아르제오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이 장난꾸러기처럼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씨앗이었다. 끝내 찾지 못했고, 유배지로 들어갈 즈음은 이미 포기 상태였다.
레이라는 조금 조심스러워하며 얘기를 꺼냈다.
“‘레벤’이라는 꽃을 아세요?”
“글쎄? 꽃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닌데.”
“아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담긴 꽃’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씨앗도 찾기 힘들거든요. 피워 내고 나면 만병통치약이 될 거라는 추측도 많고요.”
“왜 추측이지? 그렇게 찾기 어려운 거야?”
“찾는다고 해도, 피워 낼 수 없어서요. 생명의 꽃이라고도 불리지만, 사람이 피워 낼 수 없는 꽃이라고도 불리거든요.”
“거참 귀찮은 꽃이네.”
뚱한 표정의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가 픽 웃었다.
“꽃 자체가 너무 귀해서 씨앗도 구하기 어렵거든요. 그런데도 정말 찾아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슬쩍 미소를 머금고 묻는 것이, ‘이렇게까지 찾기 어려운데 정말 네가 할 수 있겠느냐’라는 표정이었다.
‘도발 좋지.’
그녀의 그 표정을 즐기듯이 아르제오가 턱을 치켜들었다.
“레벤이라는 꽃의 씨앗을 찾으면 되는 건가?”
“가능하시다면, 부탁드릴게요.”
“당연히 가능하지.”
“기대할게요.”
은근한 압박을 주는 말에 아르제오는 눈을 빛냈다. 이런 깜찍 발칙한 태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녀는 그의 신분을 제대로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유진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카리아에 들어서고부터 줄곧, 아르제오가 맡긴 일 처리로 유진이 제일 바빴다.
카리아부터 다음 도시까지 타고 갈 마차도 준비해야 하고, 비상식량과 다른 업무도 그의 몫이었다.
최대한 빨리 수도로 가고 싶은 레이라로서는 유진의 일이 일찍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 유진은 바빠.”
왜 유진을 찾냐는 얼굴로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군요. 제가 뭐 도울 일은 없을까요?”
“글쎄.”
짤막한 아르제오의 대답에 레이라는 어쩐지 힘이 빠졌다.
“그렇군요.”
이 도시에 도착한 첫날, 쇼핑이랍시고 이곳저곳 돌아다닌 이후로는 줄곧 숙소에만 있었다. 씨앗을 보니 그녀는 더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고 싶었다.
갑갑해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 아르제오는 슬쩍 눈을 굴렸다.
“마침, 카리아의 서고에 다녀올 일이 있는데. 같이 갈래?”
“서고요?”
그제야 레이라는 다시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좋아요.”
만족스럽다는 듯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당장 몸을 일으킨 그녀가 빠르게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와서, 좋아하는 일은 서두르는 것이 귀엽다고 느껴졌다.
“갈까?”
“네!”
힘차게 대답하는 모습도, 생긋 웃는 얼굴도, 기대감이 담긴 발걸음도. 보면 볼수록 레이라는 눈길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왜. 왜 발루아 제국의 황제는 그녀를 폐위시킨 걸까.
새로 황후 자리에 앉힌 여자의 가문은 무기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걸 너무 드러내서 이쪽에서도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 때문에 지금 이런 상황이 만들어져, 리히덴 제국 사람은 국경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제오는 슬쩍 제 옆을 걷는 레이라를 바라보았다.
전쟁을 원한다고 해도, 그녀를 버릴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발루아 제국의 움직임에, 이쪽은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알 수 있는 소식들이었다.
‘전쟁을 일으키도록 두지도 않을 테지만.’
황제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던 아르제오는 곧 표정을 갈무리하며 서고로 향했다.
그 서고에서, 말도 안 되는 무리를 마주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