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 *
타냐 지역에서 수도까지 곧장 가는 길에 자리한 도시, 카리아.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다며 숙소를 잡았다. 깔끔한 방 세 개가 하나의 로비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줄곧 마차를 타고 이동한 탓에 온몸이 찌뿌듯했다. 레이라는 가장 먼저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아르제오는 곧장 유진에게 무언가 일을 지시했고, 유진은 다녀오겠다며 숙소를 나섰다.
그도 여독을 풀며 씻고 나와서는 레이라를 기다렸다. 로비 소파에 앉은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번엔 생각보다 자리를 길게 비우게 되었다. 받았던 서신에 대한 보고는 지금 유진에게 지시해 보내 두었으니, 조금 더 복귀가 늦어져도 이해해 주겠지.
게다가 레이라와 함께 움직이니,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아닌 마차를 타고 이동해서 시간이 배로 걸렸다.
‘다음 도시에서 늦어지겠다는 보고도 해야겠네.’
수도까지,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할지 가늠하고 있자니 레이라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를 다 말리지 않은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이상 무방비할 수 있나 싶을 만큼 무방비하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뚱한 얼굴로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마차로 꽤 오래 이동했으니, 쉬라고 하고 싶기도 한데. 자, 그럼 우리도 나가자.”
몸을 벌떡 일으키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딜요?”
“수도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데, 계속 그 차림으로 있을 수는 없잖아.”
“하지만 전 돈이 없는데요.”
“걱정하지 마, 빚으로 다 달아 둘 거니까.”
앞장서는 아르제오를 레이라는 입술을 비죽이며 바라봤다.
어쨌든 뭘 사면 제 빚이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그의 말처럼 긴 여행이라는데 계속 옷 한 벌로 지낼 수는 없었다. 필요한 물건들도 있었고.
‘뭐, 정 빚이 많아진다 싶으면 꽃이라도 피워 줄까.’
태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라는 아르제오와 함께 숙소를 벗어났다.
* * *
카리아는 타냐 지역에서 보고 온 마을과는 정말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고, 기침 소리 대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있잖아요, 아르제오.”
“응?”
주의 깊게 도시를 둘러보던 그가 레이라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상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상인이지.”
“근데 허리에 검은 왜 찬 건가요? 꼭 기사 같네요.”
그 물음에 아르제오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뭘 모르네. 나같이 돈 많은 대상인은 언제 어디서 위협이 닥칠지 모르는 법이야.”
“그럼 보통 호위를 두지 않나요?”
“유진이 호위 비슷한 거야. 지금은 일 처리를 시켰으니까 내가 알아서 지키는 거지. 그런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내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
“부자였군요.”
“그냥 부자가 아니야. 엄청난, ‘엄청난’이 붙는 부자라고.”
“네, 네, 좋겠네요.”
“말투가 지금 상황에는 부적절한 것 같은데?”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걸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가 픽 웃었다. 절로 새어 나와 버리는 웃음이었다.
“일단은 옷부터 사는 게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아르제오는 비싸 보이는 가게로 들어서려고 했다.
“잠깐만요, 아르제오.”
“응? 왜?”
“이렇게 비싼 곳에서 살 필요는 없지 않아요?”
“공녀였으니까 어차피 늘 이런 곳의 옷을 입었을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배지로 들어가고 나서도 공작가에서 물건을 보름마다 보내 줬으니, 화려하진 않아도 허름하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니까요.”
“나 돈 많아.”
“전 돈 없어요.”
갚을 수 없을 만큼 비싼 빚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레이라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르제오 역시 싸구려 옷을 그녀에게 사 주고 싶지는 않았다. 폐위되긴 했지만, 명색이 전 황후인데.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아르제오는 힐끔, 제가 들어가려던 가게를 바라봤다.
“내가 싸게 해 줄게.”
“뭘요?”
다른 가게에서 파는 옷을 어찌 그가 싸게 해 준다는 말인가. 이해되지 않는 말에 레이라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특별히 할인해서 가격 전부를 빚으로 지우진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고. 나 그렇게 야박한 사람 아니다?”
능글맞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에 레이라는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너무 비싼 건 사양할게요.”
“최대한 노력해 볼게. 대상인의 씀씀이가 생각보다 커서.”
그렇게 말하고는 아르제오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직원들에게 레이라에게 맞을 옷을 사러 왔다고 말했다.
그에 직원들이 재빨리 움직이니, 그녀가 기성복으로 가져다 달라고 재빨리 덧붙였다. 가게 주인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마셨다.
“맞춰도 되는데.”
“그렇게 오래 머무를 필요는 없잖아요.”
“느긋하게 가는 게 어때?”
“전 서둘러야 해요.”
아르제오는 ‘쳇.’ 하고 혀를 차며 직원들이 가져오는 기성복들을 살폈다.
과하게 화려한 것들에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단호한지, 직원이 풀이 죽어 옷을 가져갈 정도였다.
그 모습도 어쩐지 재미있어서 아르제오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가도 레이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할 것 같으면 미소를 쏙 감췄지만.
레이라는 편안하고, 가장 수수한 것들만 골랐다. 결국 아르제오는 그녀가 고른 것 중에서 몇 벌을 구매했다.
숙소의 위치를 말하고 그리로 가져다 달라는 말만 남긴 그는 다음 가게로 향했다.
“더 뭘 사려고요?”
레이라는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래 다른 영애들처럼 드레스나 장식 같은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수수하고, 편안한 옷을 선호했고.
“옷만 사면 재미없잖아.”
“다른 걸 더 사면 재미있나요?”
“재밌지. 돈은 쓰려고 버는 거니까.”
어깨를 으쓱이는 아르제오를 레이라는 조금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유진이 봤으면 정말 대상인 같다고 놀렸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제오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레이라는 가게로 들어서는 아르제오를 따라가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로 사는 물건들은 제 빚으로 치지 않을 거예요.”
이래도 뭔가를 더 사겠냐는 표정의 그녀에게 아르제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든가. 그럼 난 그냥 공녀에게 보내는 뇌물 정도로 생각할게.”
늘어진 눈매와 씩 올라간 입매가 지나치게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꽤 제멋대로인 면도 있었다.
‘대상인쯤 되면 다 이런가?’
이제껏 상인들을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위화감이 들었다.
제가 누구인지 밝혔고, 포레스티아 공작가 사람인 걸 알았는데도 여전히 태도가 지나치게 편안했다.
귀족이 아닌 이들은 귀족들에게 예를 차리기 마련이었다.
높은 사람을 위해 일한다고 했었는데, 그 탓인가 싶기도 했다.
지나치게 높은 권력인 사람 아래에서 움직이면 간혹, 상관의 권력을 제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었으니.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자연스럽지만.’
그냥 높은 사람 본인이 아닐까 싶을 만큼 아르제오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귀족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것에 아주 익숙한 듯 보였다.
물론, 그 점은 레이라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분이 높건 낮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은 무사히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어깨를 한 번 으쓱이는 걸로 상념을 털어 낸 그녀는 마음 편히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런 레이라도, 그가 보석점에 들어갔을 때는 단호히 끌고 나왔지만.
“어차피 그냥 뇌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받아도 되잖아.”
“보석이라면 정말 뇌물 같잖아요.”
“보석이 아니라면 뇌물로 여겨지지 않을 것 같고?”
“제게 불필요한 물건이니까요. 그리고 전, 기왕이면 보석보다는 꽃씨가 더 좋아요.”
아르제오는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이 미소 지으며 턱을 매만졌다.
“그럼 필요한 물건은 괜찮겠네?”
“딱히 필요한 건 없는데요.”
“자, 자, 갑시다.”
의아한 얼굴의 레이라를 그가 막무가내로 잡아끌었다.
아르제오는 신기하게 생긴 잡화점으로 그녀와 들어섰다. 살롱이나 보석점은 익숙했지만, 이런 잡화점은 레이라에게 난생처음이었다.
신기한 물건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고, 가게가 그리 크지 않아서 더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것들 전부, 이 도시의 물건들인가요?”
“처음 봐?”
“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화려한 문양의 물건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를, 아르제오는 뿌듯한 얼굴로 바라봤다.
비싼 드레스나 보석에도 변화가 없던 표정이, 이제야 조금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다른 나라들의 온갖 물건들을 들여온 곳이야.”
똑같은 물건이 여러 개 있지도 않았고, 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도 한데 모아놓으니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레이라가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정신 팔린 사이, 아르제오는 원하던 물건을 찾았다. 주인장에게 몰래 다가가 값을 치른 그는 은근슬쩍 다시 레이라의 곁으로 돌아왔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것 같았는데, 여기는 마음에 들었나 보네.”
“네, 예쁘네요.”
레이라는 생긋 웃으며 물건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오르골, 신비한 문양의 팔찌나 반지, 장식품 같은 것들이 잔뜩 있었다.
드레스나 보석과는 다른 화려함이었는데, 이쪽은 꽤 마음에 들었다.
“사 줘?”
아르제오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은근슬쩍 물으니 레이라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뇌물은 안 받아요.”
“단호하네.”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쩍 다신 그는 그녀의 눈앞에 구매한 물건을 슬쩍 내비쳤다.
“이 정도는 필요하지 않아?”
비단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주머니였다.
“일전에 보니까 씨앗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으니까. 이건 필요하지?”
“아…. 네.”
레이라는 멍하니 주머니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가 건네는 주머니를 받아 든 레이라는 보들보들한 겉면을 매만졌다.
씨앗을 보관하라는 쓰임새를 붙여주니 얌전히 받아 드는 그녀가 재미있었다.
찾던 물건을 손에 넣은 아르제오는 레이라와 함께 가게를 나섰다. 그러고는 또 뭐가 없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음은 뭘 살까?”
“돈 쓸 생각밖에 없는 사람 같네요.”
“이거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픽 웃은 아르제오는 화려한 모자 가게를 발견했다. 꽃을 심거나, 정원에 오래 있으면 햇볕이 강하니 모자를 써야 하지 않겠냐고 꼬드기면, 그녀는 순순히 넘어올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말하더라도 레이라는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진짜 받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제오는 그냥, 그 작은 실랑이를 하는 시간이 즐거웠을 뿐.
그런데 레이라가 그런 그를 지나쳐 걸음을 뗐다.
“어디 가?”
아르제오의 부름에도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