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이니까요.”
식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레이라는 식물에 관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부탁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설 터였다.
그러니 아르제오의 제안은 그녀에게 나쁠 것이 없었다.
뚱한 얼굴의 아르제오는 그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럼,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건 하지 않는 걸로.”
“전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아요.”
“아냐, 아냐. 그건 그대 생각이야. 엄청 저돌적이라니까.”
“제가요? 전 딱히 그런 쪽은 아닌데요.”
“아냐, 그런다니까. 잠깐만 봐도 알 정도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그랬나?’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물론 헤레이스는 비슷한 말을 몇 번 했었지만, 공작가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믿지 않았다.
“굳이 어느 쪽이라고 말한다면, 침착한 쪽일 것 같은데요.”
확실히 레이라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잠시만 눈을 떼면 불에 손을 델 것만 같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기분이 들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지만, 눈을 떼는 것이 불안했다. 덥석덥석 위험한 걸 손에 쥘 것만 같아서.
“아마도 차분한 사람 쪽에 가깝다고 나도 생각은 해.”
그렇게 대답하면서 아르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도 어린애처럼 덥석덥석 아무거나 입에 넣을 것 같단 말이지.”
씨앗을 대뜸 삼키려고 했던 걸 꼬집은 건데, 꼭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았다.
“…먹을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아닌데요.”
“아까 그 씨앗은 먹으려고 했잖아.”
“제가 만들었으니 괜찮은 걸 알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조심성이 없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데 왜 조심성이 없다는 거죠?”
“본래에 가지고 있던 꽃가루가 몸에 해로우니 혹시 모르잖아.”
아르제오는 투덜거리듯이 말하다가 아차 싶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이라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제 말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네요.”
거래도 할 줄 모르는 귀족 영애 같다가도, 이런 건 또 예리하게 알아챘다.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야. 그냥 혹시 모른다는 말이지.”
“그 말이 그 말이에요.”
단호하게 대꾸하며 그녀는 더는 아르제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어쩐지 마차 안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침묵 때문에 아르제오가 바람도 쐴 겸 말을 타고 달릴까, 고민할 즈음 레이라가 조용히 물었다.
“아르제오는 리히덴 제국의 상인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제국의 이곳저곳을 떠돌겠네요.”
“그런 편이야.”
전혀 다른 이야기 주제에 아르제오는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아까와 같은 마을이…. 많나요?”
레이라의 물음에 아르제오는 그다지 대답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그 반응만으로도 그녀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많아.”
“그렇군요.”
가난하고, 병을 앓고, 나라가 베푸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아마 그런 이들은 어딜 가나 존재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아무리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도 어둠은 생기기 마련이다. 공작령에도 힘들게 사는 사람은 존재할지도 몰랐다.
“젊은이들은 없고, 노인이나 힘없는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는 마을도 있지. 밭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식물은 다 말라비틀어지고.”
말을 잇는 아르제오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 살아가는 그들을 기다리는 건 죽음밖에 없어 보였다.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온 곳에서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죽음뿐이라니.
그리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럴 힘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원통했다.
“영주에게 알려도 달라지는 건 없나요?”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던 아르제오는 창문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리고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벽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그건 그저 상인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구역이 아니야.”
‘상인이 아니어도 다를 건 없겠지만.’
제게 높은 신분, 지위, 그런 것들이 주어졌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것도 그렇겠네요.”
“근데 그런 건 왜 물어?”
“저분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하셨으면 싶으니까요.”
“발루아 제국 사람들도 아닌데?”
“그게 상관이 있나요?”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으로.
“적국이든, 우호국이든, 어차피 다 사람 사는 곳이잖아요. 국민이 행복을 느끼는 곳이 좋은 곳이죠.”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그러니 레이라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모든 영주가 제 아비와 같진 않을 터였다. 발루아 제국만 해도 귀족들의 파벌이 나뉘니. 그중에는 영지민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도 있었고, 갈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귀족들이 아니어도, 역사만 봐도 그랬다. 성군이 있으면, 폭군도 있는 법.
“참, 그렇지. 어떤 씨앗이든 구해 줄 수 있다고 했죠?”
“그래. 말만 해. 제국 상인으로 지낸 지 오래이니 못 구할 것도 없으니까.”
실제로 아르제오는 리히덴 제국 곳곳을 돌아다닌 일이 많았다. 상인인 척 위장한 일도 여러 번이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제국 내에서 꽃씨를 구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
“그럼 꽃씨를 부탁하고 싶어요. 가능한 한 많이.”
“종류는 상관없고?”
“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꽃씨로 뭘 하려고?”
그저 단순한 의문을 표하는 아르제오에게 레이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가능하다면, 수도로 가는 길에 꽃을 잔뜩 심고 싶어서요.”
“꽃을 왜?”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아르제오는 더욱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레이라는 이런 반응들이 익숙했다. 꽃이나 식물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꽃을 보고 조금이나마 사람들이 더 웃었으면 좋겠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레이라는 마치 청초한 꽃 같았다.
‘그러네.’
확실히 따라 웃게 될 것도 같았다.
픽 웃은 아르제오는 머리를 기댄 상태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수도로 곧장 가는 길에 도시가 있어. 거기 도착하면 원하는 만큼 꽃씨를 얻어 주지.”
“네, 고마워요.”
고운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
아르제오는 머리를 기댄 채로 곧 잠이 들었다.
‘피곤했나.’
레이라는 물끄러미 잠든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설령 귀족, 혹은 이러한 사태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같은 나라에 살며 저리 어렵게 사는 이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할 게 당연했다. 타지인인 자신마저 도움을 줄 수 없어서 안타까웠으니.
‘리히덴 제국은…. 생각보다 앓고 있는 느낌이네.’
발루아 제국과 국경을 공유한 또 다른 제국. 이곳에 오기 전에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제국이라고 칭하는 만큼, 발루아만큼이나 강대국일 거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포레스티아 공작가가 전쟁을 막고 있는 덕에 리히덴 제국에서까지 공작가를 좋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리히덴 제국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레이라는 천천히 손을 뻗어 창문 밖의 풍경을 매만지듯이 창문에 손을 댔다.
이미 아름다운 풍경이다. 여기에 제가 꽃을 더 심는 것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번거롭다며 밟고 지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하지만 꽃은 밟힌다고 사람을 원망하진 않지.’
비슷한 생각으로 저 역시 로이드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니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도 그저 한 명이라도, 마음이 평화로웠으면 싶었다.
제가 심어 놓은 곳에 꽃은 줄곧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러다 지나는 사람이 보고 참 예쁘다며 웃어 주면, 그게 꽃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다.
* * *
황제의 집무실에는 문서가 넘쳐났다. 책상은 지저분하고, 딱히 차를 즐길 시간도 여의치 않았다.
피곤한 눈으로 제 부관을 보던 로이드는 이내 미간을 짚었다.
“폭풍우의 피해가 생각보다 크군.”
“사망자가 나온 곳도 있으니까요.”
특히나 제국 동부의 항구도시 쪽이 피해가 컸다. 국경과도 거리가 멀고, 수도에서도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쪽은 광활히 펼쳐진 바다뿐, 다른 나라에서 공격할 염려는 없는 곳이었다.
다만, 바다가 거칠어, 줄곧 이어 오던 무역에도 문제가 생긴 듯했다.
항구 일부가 무너지며, 떠내려간 배도 많다는 보고였다.
‘골치 아프군.’
로이드의 부관, 세실은 덤덤한 얼굴로 보고를 이어 나갔다.
“그쪽에 가능한 지원은 얼마나 되지?”
“피해 지역이 항구도시에 제한되지 않는 만큼, 큰 금액은 무리일 겁니다. 공정히 모든 곳에 도움을 주어야 하니까요.”
“금액도 문제겠지만, 돈만 보내는 건…. 국민들이 행복해하진 않을 것 같군.”
“예?”
로이드에게서 의외의 말을 들은 세실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부관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발견한 로이드는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제길.’
자주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남아서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 사유재산에서도 지원금을 보태도록 하지. 항구 복구에도 힘을 쓰도록 해. 무역이 다시 활성화되어야 나라에도 도움이 될 테니.”
“예,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음.”
이어 줄줄이 세실에게서 다른 보고를 듣는 로이드는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레이라의 흔적을 털어 냈다.
자주 그녀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라며, 국민이 행복해야 좋은 나라라는 얘기를 했었다.
아무것도 쥐여 주지 않고 황후궁에 갇힌 것과 같은 신세일 때도, 여러 번 그런 말을 했다. 함께 차를 마실 때라든가.
괜한 것을 저도 모르게 떠올린 로이드는 이내 세실의 보고에 집중했다.
일 처리를 끝낸 로이드는 그만 물러가려는 세실을 붙잡았다.
“아, 세실.”
“예, 폐하.”
“포레스티아 공작은 아직인가?”
“아….”
세실은 조금 곤란한 듯 찰나 눈썹을 늘어뜨렸다. 물론 금세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리히덴 제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포레스티아 공작은 여전히 골치 아프게 굴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2황자 쪽은?”
이어진 질문에 세실은 이번에는 뚜렷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가능하면 관여하고 싶지 않은 문제인 듯.
하지만 마냥 대답을 미룰 수도 없어서 세실은 떨어지지 않은 입을 억지로 뗐다.
“귀족들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조만간 기회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렇군.”
“저….”
“뭔가.”
잿빛 눈동자가 저를 향하니 세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묻고 싶지 않은 마음이 물살처럼 밀려들었다. 아니,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했다.
“정말…. 내치실 겁니까.”
고민 끝에 단어가 순화되기는 했지만,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게 식은 로이드의 시선이 찌르듯이 향하자, 세실은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부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로이드는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반역의 무리를 그냥 둘 수는 없지.”
“…….”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우습겠지?”
“예? 그, 그렇지 않습니다.”
세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로이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단언컨대, 그토록 차갑고, 소름 끼치는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야. 형제이면서, 황족이기에 공존할 수 없으니.”
로이드는 이내 나가 보라며 손을 내저었고, 세실은 도망치듯이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