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9)화 (9/122)

<9화>

작은 중얼거림에 아르제오와 유진의 시선이 레이라를 향했다.

꽃으로 인해 얻은 병이라면, 이 꽃의 뿌리로 치료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의사도, 의학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지만, 식물에 관한 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붉은 비밀이라는 뜻을 지닌 이 꽃은, 꽃가루나 불에 태웠을 때 해로운 연기를 내뿜는다. 하지만 이는 모두 제 뿌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믿음이 안 가신다면, 제가 먼저 먹어 볼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씨앗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를 아르제오가 재빨리 손목을 낚아채 제지했다.

“그대는 확신이 들면 바로 움직이는 타입인가?”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조금 더 기다려.”

아주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르제오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긴 아르제오 대신,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던 유진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공녀님, 그러시면….”

조금 망설이는 기색은 있었지만, 레이라의 차분한 표정에 유진은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일단은 여기에 있는 꽃들을, 전부 해롭지 않게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뭐?”

이야기를 들은 아르제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시선이 차가워서 유진은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가 조금은 사그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붉은 꽃밭을 향해 몸을 틀었다.

“정성을 다해 안전하게 돌보아 주면, 붉게 변하지 않을 거예요.”

꽃이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레이라는 천천히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고운 손에 흙이 묻는 걸, 아르제오는 얌전히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말릴 새도 없이 행동에 옮긴다.

보기보다 저돌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아르제오는 그녀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꽃을 씨앗으로 만들어 보였을 때도, 한시도 그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기대처럼 곧이어, 레이라가 땅을 짚은 곳으로부터 옅은 청록색 빛이 꽃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꽃들은 금세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 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경악이 지워지지 않았다.

입을 떡 벌린 채로,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말만 계속해서 들려왔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불안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채로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못했다.

그중 유일하게 걸음을 뗀 건, 그 노인이었다. 레이라가 손을 토닥여 준.

노인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세 사람이 선 꽃밭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꽃밭의 변화는 신기했지만, 여전히 가까이 다가서는 것에는 거부감이 남아 있었다. 그렇지만 노인은 세 사람이 저리도 가까이 있으니 용기를 내어 걸음을 옮겼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제 손을, 거절하지 않고 맞잡아 주었다. 비록 도움을 줄 수는 없다고 했지만, 그 표정에 드러난 안타까움은 진짜였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니,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에 맴돌았다.

‘이 꽃이 이렇게 향이 좋았던가?’

전쟁이 터진 왕국에서 도망친 직후부터 줄곧 이 마을에 살았었다. 가난은 늘 있는 일이었고, 이 꽃밭은 자신들을 해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아 주었다.

덕분에 이 땅에 이리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라고 여겼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노인의 눈에는 꽃이 뚜렷하게 들어왔다. 위협하는 듯한 강렬한 색이 아니라, 포근한 느낌의 연한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느린 걸음이 타박타박 가까이 다가오니, 레이라가 노인을 돌아보았다.

흙바닥도 개의치 않고 주저앉아 꽃을 매만지던 그녀는,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아니지, 늙은이가 주책맞군.’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 단어 하나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부드럽게 웃는 레이라에게 다가선 노인은 한층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 늙은이가 이제 눈까지 먼 건지, 꽃의 색깔이 변한 걸로 보이지 뭡니까.”

“변한 게 맞아요.”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내놓은 대답 같았다. 그녀는 손에 든 씨앗이 이 꽃을 씨앗으로 만든 것이라 설명했다.

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껏 계속, 해를 끼치는 꽃으로 불렸던 것도.

“마치 마법사 같군요, 아가씨.”

“마법처럼 예쁘죠?”

꽃을 든 레이라는 그렇게 되물으며 웃었다. 꽃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자랑스럽게 씨앗을 내보이며 노인에게 이게 약으로 쓰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꽃이 감추고 있던 뿌리 부근이 약으로 쓰일 수 있다고.

마침 그 노인은 마른기침을 계속 달고 있었다.

“그럼 이 늙은이가 먹어 보면 되는 건가요?”

주름진 손이 레이라의 손에서 씨앗을 집었다. 그녀는 멀뚱멀뚱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경계하는 유진의 물음에 노인은 설핏 웃었다.

“어차피 살날이 많지 않은 몸입니다. 이 늙은이의 손을 잡아 주신 유일한 분이 말씀하시니, 믿지 못할 것도 없지요.”

노인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씨앗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레이라를 향해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이것이 마지막이든 아니든, 아가씨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 역시 덥석 씨앗을 먹으려 했으면서도, 레이라는 노인이 덜컥 씨앗을 삼키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노인을 가만히 응시하던 아르제오는 곧 레이라를 일으켜 세웠다.

“다 둘러봤으면 이만 가는 게 좋겠어. 우린 갈 길이 머니까.”

“아, 네.”

아르제오가 눈짓을 하니 유진이 움직였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를 레이라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인을 향해 묵례했다.

아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수도로 가서 아르제오의 소개로 다른 상인을 만나, 국경을 넘으면 유배지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죄인 신분인 자신은 다시는 그 섬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곳의 사람들이 저 꽃으로 인해 피해를 보지 않을 테니,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꽃이 더는 미움받지 않을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유진은 노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 사이 레이라는 재빨리 꽃 몇 송이를 더 캐냈다.

그런 그녀를 재촉하며 아르제오는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 * *

다시 마차로 돌아간 그들은 곧 그 마을에서 멀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출발 직전에 뽑아 온 꽃은 레이라가 곧장 씨앗으로 만들었다. 기분 좋은 듯이 그걸 손에 꼭 쥐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턱을 괬다.

마땅히 보관할 방법이 없어 보여서 아르제오가 손수건을 내어 주자, 곱게 싸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고 조금 지나자, 다시 창가에 매달려 밖을 구경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아르제오는 보고 온 마을에 대해 보고해야 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참 신기한 사람이다.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자꾸만 레이라의 저돌적인 행동력이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은 정말로 선의를 베풀 사람을 아주 잘 골랐다고.

씩 입꼬리를 올린 아르제오는 여전히 창문에 매달린 레이라에게 물었다.

“씨앗을 구할 수 있나 궁금했다고 했지?”

“그랬죠.”

마을로 가던 마차 안에서 무엇을 파는 상인이냐고 물으며 레이라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르제오가 얘기를 꺼내니 그녀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 줄 수 있다면야 그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씩 웃은 아르제오가 말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어떤 씨앗이든 구해 줄 수 있어.”

“정말요? 어떤 씨앗이든지?”

레이라의 시선은 창밖에서 완전히 떨어져 아르제오에게 고정되었다. 눈을 빛내는 표정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는 게 꽤 마음에 든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가 턱을 치켜들었다.

“값만 지불하면 말이지.”

그리고 이어진 말에 레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요.”

바다에 떠밀려 온 유배된 죄인 신세. 그걸 빤히 알면서도 값을 지불하라고 말하는 아르제오가 어쩐지 조금 얄미웠다.

투덜거리는 투로 대꾸하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돈이 아닌 걸 주면 되지 않을까?”

“저는 드릴 만한 게 없어요.”

레이라가 줄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유배된 몸이 아닌가. 하지만 아르제오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여전히 가진 것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다.

당장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도, 포레스티아 공작가가 뒤를 든든히 버티고 있었다. 거기에 레이라 스스로도 아주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거래를 하는 게 어때?”

“무슨 거래요?”

“원하는 것이 어떤 씨앗이든, 내가 전부 구해다 주는 걸로.”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뚜렷하게도 유혹하는 듯하여 절로 레이라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가로 원하는 건요?”

그녀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아르제오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좁혀 오는 거리에 레이라는 등받이에 온몸을 밀착했다.

“대신 수도로 가는 여행 중에는, 그 특별한 힘을, 나만을 위해 쓰는 건 어때?”

레이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르제오가 말하는 특별한 힘은, 아마도 마을에서 보여 준 힘을 뜻할 터였다. 그런데, 그만을 위해서 쓰라는 말의 의미는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식물을 길러 내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나게 한다. 다 자란 꽃이나 식물을 씨앗 형태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이 힘을 어떻게 그만을 위해 쓴단 말일까.

“아르제오를 위해 꽃이라도 피워 달라는 뜻인가요?”

“글쎄, 꽃에 제한하고 싶지는 않은데.”

“도움을 청할 때 도움을 드릴 순 있어요. 하지만 당신만을 위해 이 힘을 쓴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네요.”

게다가 수도로 향하는 길은 딱히 그녀에게 ‘여행’이 아니었다. 시타델 섬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다.

유혹하듯이 말했는데도 이렇게 걸고넘어지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키득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누군가의 외모, 재력, 신분, 그런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이면서도 식물 얘기를 하니 귀를 쫑긋 세운다.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재미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당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부탁하면 성심성의껏 들어주기.”

“그럴게요.”

너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이번에는 그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대가 하는 말은 믿을 테니까 무턱대고 행동하지 않기.”

“전 딱히 그런 적이 없는데요.”

“아냐, 아냐. 지금도 봐,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곧장 동의하는 거야?”

게다가 그녀는 마을에서 꽃의 효능을 어찌 아느냐는 말에, 곧장 씨앗을 삼키려고 했었다.

잠시 눈을 뗀 틈에는 덥석 꽃을 만졌고.

그런 아르제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라는 싱긋 미소를 머금고는 입술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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