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8)화 (8/122)

<8화>

“더 보실 건가요?”

“어? 아, 아니…. 이 정도면 됐어.”

“그럼 이제 꽃을 보러 가도 되겠죠?”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아르제오를 확인한 레이라는 다시 몸을 빙글 돌려, 제게 구걸하던 이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얼굴을 반쯤 가렸던 천을 아래로 내렸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전 지금 가진 게 없어요.”

눈썹을 늘어뜨린 레이라는 진심으로 가진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 보였다.

그녀는 잠시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시선을 땅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인의 손을 붙잡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레이라는 주름진 그 손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

그런 손길을 느껴 본 것이 언제였을까. 높으신 분들은 저들의 이익만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자신들은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나라를 위하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 그렇게 애원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아무도 이렇게 손을 잡아 준 적이 없었다.

노인은 눈시울이 시큰거려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니 어르신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답답했다.

“꽃 쪽을 살피러 가자.”

“네.”

레이라는 아쉬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노인의 손을 놓았다. 그들은 꽃을 살피러 간다는 말에 걱정스럽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잠시만요, 기다리십시오…! 그 꽃에 가까이 가서는…!”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제 주름진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노인이 다급히 레이라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부름에 고개를 돌린 레이라는 안심을 시키려는 듯 빙긋 웃고는 다시 유진을 따라 걸었다.

앞장서는 유진과 그 뒤를 따르는 레이라. 아르제오는 그들의 모습과 주변을 번갈아 살피고는 한발 늦게 걸음을 뗐다.

레이라와 손을 잡았던 노인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홀린 듯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 * *

“너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그 꽃은 여러모로 위험하니까요.”

“네.”

유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레이라는 두어 걸음쯤 떨어져서 붉은 꽃을 내려다보았다.

강렬한 붉은색 꽃잎 끝에 보라색 작은 방울이 달린 꽃. 레이라는 이 꽃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그녀는 손을 땅에 올려 두고 흙을 매만졌다.

‘해치지 않아.’

속으로는 끊임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흙을 매만지는 레이라의 뒷모습을, 아르제오는 물론, 유진과 그들을 홀린 듯이 뒤따른 마을 사람들까지 지켜보았다.

아르제오와 유진의 모습에 가려서 멀리 떨어진 노인과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레이라는 흙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제일 가까운 곳에 피어 있는 붉은 꽃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청록색 빛이 땅으로 스며들어 그 꽃가지 닿으니, 꽃이 옅게 떨었다.

그러더니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음?”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유진은 제 눈을 비비며, 제가 뭘 본 건지 의심했다. 그 옆의 아르제오는 검지로 입술을 훑으며 레이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피어 있던 꽃의 색이 옅어졌다.

멀리서도 땅이 붉게 물들어 보일 만큼 제 색을 드러내던 꽃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제는 옅은 분홍빛을 머금고 있었다.

레이라는 싱긋 웃으며 꽃에 바짝 다가섰다.

“잠깐, 너무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유진이 말릴 새도 없이 레이라는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홍빛 꽃잎에 고운 손이 닿는 걸 본 유진은 재빨리 다가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꽃잎에 닿았던 손을 감쌌다.

“이미 마차에서 설명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만지시면 안 됩니다.”

“괜찮아요.”

레이라는 손수건을 떼어 내며 싱긋 웃었다. 그런 그녀를 아르제오는 함부로 움직이는 그녀가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꽃잎에 손끝이 닿은 정도면 아직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녀를 응시하던 아르제오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일정 거리를 두고 몰려든 마을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관심도 없어 보였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는데, 움직일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유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웃은 그녀는 고집스레 다시 꽃으로 손을 뻗었다.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 증거로 꽃 색이 변하지 않았는가.

마치 당연한 섭리처럼, 그녀는 그 꽃에 관한 걸 알 수 있었다. 땅을 통해 느꼈다.

이 꽃이 어떤 꽃이고,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레이라는 곧장 팔을 걷어붙이더니 꽃의 주변 흙을 살살 파내기 시작했다.

“공녀님? 이게 무슨….”

“오랜만이네요, 그 호칭.”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유진에게 레이라는 느긋하게 대답했다.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어 버리는 바람에 듣지 못했던 호칭이었다. 포레스티아 공녀.

‘그렇지. 나 이제 다시 포레스티아 공녀구나.’

잠시 그리움에 잠기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흙을 파서 꽃을 뿌리까지 뽑아 들었다.

땅속에 자리 잡고 있던 짧은 뿌리가 드러나니,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 냈다.

꽃은, 이 뿌리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경계하고 있던 것이었다.

“보세요, 괜찮죠?”

레이라는 양손을 모아 흙과 함께 꽃을 뿌리째 들었다.

그 상태로 돌아보니, 유진은 겁에 질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 아르제오가 달려들 듯이 다가섰다.

아주 잠시 눈을 뗀 사이에, 꽃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아르제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꽃을 털어 냈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 위험하니까.”

이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위험한 것에 손을 댄다. 그것에 아르제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꽃잎에 손끝이 살짝 닿은 정도라면 닦아 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저렇게 뿌리까지 뽑아내 손에 들다니.

“손대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손목을 붙든 채로 미간을 찌푸리는 아르제오를 레이라는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다시 꽃을 향해 뻗었다.

“괜찮아요, 해롭지 않으니까.”

“그걸 어떻게 확신해? 수많은 사람을 해친 꽃이야.”

으르렁거리듯 낮게 가라앉은 아르제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꽃을 들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색이 다르죠?”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레이라의 말을 듣고 꽃을 살폈다. 확실히, 강렬한 붉은색이 아닌, 수줍은 분홍색 꽃으로 변해 있었다.

꽃잎 끝에 달린 보라색 방울도, 연노랑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땅에 피어 있는 다른 꽃들은 원래 알고 있던 대로 붉은색이었다. 레이라의 손에 들린 꽃만 제외하고.

한숨을 푹 내쉰 아르제오는 레이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으며 그녀의 손목을 살포시 놓아주었다. 그리고 낚아채듯 그녀가 들고 있던 꽃을 붙잡았다.

“잠…! 그걸 잡으시면 어찌합니까!”

“괜찮다잖아.”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는 유진에게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레이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렇지?’ 하고 물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가느다란 눈꼬리가 매혹적이었다. 유혹하는 듯이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레이라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 뿌리, 약으로 쓰일 수 있어요. 인체에 해로운 꽃가루나 환각 같은 건, 이 뿌리를 지키려는 나름의 방어고요.”

아르제오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레이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으면서도 아르제오는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자신을 레이라 포레스티아라고 소개했으니 말이다.

포레스티아 공작가는 정령의 비호를 받는다는 소문. 그래서 공작가의 아이들은 특별한 힘을 타고난다는 이야기.

레이라가 그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면, 정말로 포레스티아일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난 선의를 베풀 곳을 아주 잘 골랐다는 뜻이고.’

아르제오는 얌전히 레이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똑바로 부딪혀 오는 시선에 레이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에 들린 꽃을 부드럽게 빼앗았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그 꽃을 올려두고는 다른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무엇이든 길러 내는 힘. 그게 어떤 식물이든, 척박한 땅이든, 물이 부족하든, 과하든. 그리고 레이라의 힘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양손을 천천히 모으자 들려 있던 꽃이 흔적도 없이 그 속에 쏙 담겼다.

유진은 말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르제오의 시선 역시 꽃을 들고 있던 상태로 손뼉을 치듯 가지런히 모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레이라는 슬며시 모았던 손을 벌리며 그 손에 담긴 작은 분홍색 씨앗을 내보였다. 분명 손에 들고 있던 꽃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무슨….”

고운 그녀의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유진이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식물을 길러 내는 정도는, 아마 소문을 들어 아실 것 같아서요.”

확실히 어떤 식물이든 길러 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키워 내는 식물은 특별했다. 그 특별함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니 아마 봐도 모를 터였다.

그래서 레이라는 이쪽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제 눈으로 보고 나면,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만져 보면 어떤 식물인지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씨앗으로 만들면, 약으로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고요.”

아르제오는 하얗고 가는 손에 올려진 아주 작은 분홍색 씨앗으로 손을 뻗었다. 거친 손끝에 씨앗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쓰임새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었다. 포레스티아의 특별한 능력에 대한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등 뒤의 유진은 줄곧 말도 안 된다는 중얼거림만 되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레이라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붉은색을 띠지 않으면 안전해요.”

안전히 돌보아 주면 계속 이 연한 빛을 띨 터였다. 이 꽃이 위협을 감지하지 않도록.

레이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꽃을 매만졌다.

“생명력이 뛰어나지만, 이런 들판에 피어나면 이런 색을 띨 수밖에 없어요.”

아르제오의 눈에 이채가 도는데, 그의 등 뒤에서 수군거림이 점점 커졌다.

“보았는가?”

“어떻게 저런….”

레이라가 손을 잡아 주었던 노인은 입을 떡 벌린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모여든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씨앗을 든 레이라는 그 소리에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붉게 물든 꽃들, 하얀 손에 든 씨앗. 그리고 그 미소가 어우러져, 그들은 넋을 놓았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정령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걸로,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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