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르제오는 가만히 레이라를 응시하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제 죄목을 저리 당당히 입에 담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게다가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억울한 누명이라고 들었다.
옆에 선 유진도 그 사실을 아는지 슬쩍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제오는 그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사건의 진상은?”
이어진 질문에 레이라는 멍하니 바라보던 식탁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아르제오를 똑바로 향했다. 청록색의 눈동자가 맑아서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의외의 물음에 아르제오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 사건에 관한 것을 구구절절 떠들 생각은 없었다. 괜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외부인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내어 줄 수도 없으니.
그래서 레이라는 대답 대신 이번엔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면 저를 다시 시타델 섬으로 보내 주실 수 있나요?”
이제야 그 질문을 하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야 그걸 묻는군.’
한눈에 보아도 누군가와 거래를 한다면 손해를 볼 사람으로 보였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
‘이러니 누명의 씌우면 씌우는 대로, 그냥 유배지로 떠났겠지.’
아르제오의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실제로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였으니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 해요. 섬까지는 아니더라도, 국경까지만이라도 갈 수 있을까요?”
국경은 전부 공작령이니, 포레스티아의 성을 가진 그녀라면 그곳부터 문제없이 섬으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지금 양국 간의 상황이었다.
“국경으로 가는 건 안 돼.”
“왜죠?”
되묻는 그녀에게 아르제오는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부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이.
“아무리 소수라도 리히덴 제국의 사람이 국경에 접근했다가는, 발루아 제국의 황제가 당장 전쟁을 일으킬 테니까.”
그 말에 레이라는 참담한 얼굴이 되었다.
로이드가 정말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거라면, 제일 큰 피해를 입는 곳은 국경의 공작령이었다.
그런 결과를 초래할 수는 없으니 국경을 넘기는커녕, 국경 근처로도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신 말대로라면, 그쪽에서는 지금 유배 보낸, 폐위된 황후가 사라졌으니 더욱 경계하고 있겠지.”
“국경을 넘지 않으면 전 어떻게 돌아가죠?”
눈썹을 늘어뜨린 레이라를 보며 옆에 선 유진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표정을 따라 했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레이라의 상황에 과하게 몰입한 탓이었다.
울상을 짓고는 애처로운 눈으로 레이라를 바라보던 유진은 아르제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나서야 표정을 감췄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
“어떤 방법이 있죠?”
“수도로 가면 타국의 상인들이 많아. 리히덴 제국 사람은 국경을 넘을 수 없지만, 그들은 넘을 수 있지. 원하면 타국의 상인을 소개해, 그쪽을 통해 돌아가게 해 줄 수도 있어.”
“정말요?”
“그럼.”
아르제오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내게 그만큼의 이익이 돌아온다면.”
표정과는 상반된 조건에 레이라는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며 고민했다. 제가 내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는 그저 죄인 신분이고, 가진 것도 없었다.
“뭘 원하시죠?”
그녀의 그 대답을 기다린 듯 아르제오가 빙그레 웃었다.
“포레스티아 가문에 빚으로 달아 두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공작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큰 이익이었다.
그녀를 수도로 데려가 다른 상인을 소개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해 주는 대가로는.
아르제오의 요구에 레이라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가문에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웃는 얼굴로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는 아르제오를 보며 레이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 이름으로 달아 놓으면 안 될까요?”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빚을 달아 두는 것이 아닌, 레이라 본인에게 달아 두는 것을 뜻했다.
공작가에서는 그녀의 일이라면 당장에 발 벗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가문에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일을 요구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나쁘지 않네.’
레이라의 의도를 파악한 아르제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 이름이 공작가에서 통할 테니.”
그가 동의하니 레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수프를 떠먹으려 숟가락을 잡았다.
“하지만, 그 이름이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경우, 돌아가지 못하고 국경에서 그냥 죽게 될 거야.”
그녀의 정체가 포레스티아가 아니라면 그렇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수프를 향했던 레이라의 부드러운 시선이 다시 아르제오를 응시했다. 그가 소개해 주는 상인과 함께 가는 것이니 충분히 가능했다.
레이라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그 대답을 받아 내고 나서야 레이라는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 나갔다.
* * *
레이라가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 하니, 그녀의 사정을 봐서 아르제오와 유진은 빠르게 움직이기로 했다.
해안가 근처의 숙소를 나선 그들은 곧 콜키를 벗어났다.
“이 근방에는 상인들이 많이 없나요?”
“딱히 그런 건 아냐. 하지만 타국의 상인들은 수도에 모여 있지. 변방에는 제국의 상인들만 다니는 편이야.”
콜키를 떠나며 마차를 잡아탄 그들은 덜컹거리는 길을 나아갔다.
레이라는 밖을 구경하며 궁금한 것들을 아르제오에게 묻고는 했다.
“리히덴 제국의 변방에는 나무가 많네요.”
“제국에서만 나는 열매도 있어.”
“저도 볼 수 있나요?”
“수도에 가면 볼 수 있지.”
레이라는 유독, 나무나 열매, 꽃 등의 주제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빛냈다.
그래서 아르제오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주 유익한 정보를 얻은 것 같아서 아르제오는 만족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일직선으로 수도로 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아르제오는 포레스티아가에 빚을 지워 두면 어찌 써먹을지, 그 생각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아르제오는 뭘 파는 상인이에요?”
줄곧 창가에 달라붙어 밖을 구경하던 레이라가 고개만 슬쩍 돌려 물었다.
“음?”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순간 대답이 늦어졌다.
“나?”
“네.”
단둘이 있는 마차여서 너무나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그럼 그쪽 말고 또 누가 있냐’는 표정으로 말똥말똥 이쪽을 보는 레이라를 보며 아르제오는 몰래 혀를 찼다.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다니.’
괜스레 목을 가다듬으며 시선을 피한 그는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상인이라고 둘러대기는 했는데, 뜬금없이 무엇을 파느냐니.
“물건을 파는 것만 상인은 아냐.”
“그럼요?”
“…이것저것 거래를 하는 게 상인이지.”
“그러니까 이것저것 뭘 거래하는데요?”
“…….”
신분을 감춰야겠다는 생각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둘러댄 변명이었다.
‘황자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르제오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레이라의 시선을 피하다가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거래하는 사항은 기밀이야. 난 높은 분의 말대로 움직이는 상인이니까.”
검지를 곧게 펴서 위를 가리킨 아르제오는 은근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제가 생각하고도 제법 괜찮은 변명 같았다. 두루뭉술하니 높은 분이라고만 말하면 캐묻기가 어려울 테니.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레이라는 더 묻지 않았다.
딱히 높은 분이라서는 아니고, 그저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부분까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캐물어서 알아야 할 만큼 궁금한 것도 아니었고.
“말하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씨앗도 구해 줄 수 있나 궁금했을 뿐이니까.”
금세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린 레이라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에 꿀을 발라 놓은 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구경하는 걸까.
아르제오도 그녀를 따라 슬쩍 창밖을 봤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 없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풍경을 구경하는 레이라의 모습은 꽤 흥미를 끌었다.
‘정원사도 아닌데 그리도 식물이 좋을까?’
그저 귀족 영애도 아니고 무려 황후였던 사람이다. 포레스티아 공작가도 단순한 귀족은 아니었고.
취향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며 아르제오는 금세 창문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때, 덜컹거리며 잘 달리고 있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얌전히 창밖을 바라보던 레이라는 의아한 얼굴로 아르제오를 바라봤다.
“벌써 수도에 도착했나요?”
“그럴 리가.”
제국의 변방에서 수도까지 그렇게 가까울 리가 없었다.
“잠깐 기다려.”
레이라에게 마차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그는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무슨 일이야.”
마차 밖에서 마부와 함께 있던 유진은 나직한 아르제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전령이 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유진의 근처를 날던 신비로운 파랑새가 그에게 날아갔다. 아르제오가 팔을 뻗자, 익숙한 듯이 새는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형님이 보내신 전령인가 보네.”
“예.”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은 새에 묶여 온 서신을 아르제오에게 내밀었다.
그는 새를 한차례 매만져 주고는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빛이 고운 파란색 깃털을 자랑하는 새는 잠시 빙글빙글 머리 위를 돌다가 이내 멀리 날아갔다.
서신을 확인한 아르제오는 그걸 다시 유진에게 넘겼다.
“뭐라 하십니까?”
“타냐 지역에 들러야겠어.”
“타냐요?”
“그래. 확인하고 태워.”
그에게서 서신을 받아 든 유진은 내용을 확인하고는 곧장 그걸 태웠다.
리히덴 제국의 타냐 지역은 가까운 왕국에서 넘어온 피난민들이 숨어 사는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서신은 그곳의 생활 상태가 아주 심각하여, 최근 돌고 있는 병의 원인까지도 의사들이 의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가서 살펴보고 오라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마차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레이라가 물었다.
“아무것도. 다시 출발할 거야.”
아르제오는 유진에게 슬쩍 눈치를 주고는 다시 마차로 쏙 들어갔다.
머지않아 마차는 다시 출발했고, 레이라는 창가에 바짝 다가서 지나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아르제오가 턱을 매만지며 말을 꺼냈다.
“그 유배지라는 곳으로,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겠지?”
“네. 최대한 빨리요. 죄인이 사라진 걸 알면 난리가 날 테니까.”
그렇게 답한 레이라는 조금 풀죽은 얼굴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제가 사라진 것을 빌미로, 공작가에 괜한 피해가 갈까 걱정되었다.
“그건 아쉽겠네.”
“네?”
아르제오가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에 레이라가 의아한 얼굴로 반응을 보이니, 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인데 들었냐고 중얼거리며 난처하게 웃었다.
난처한 듯 보였던 건 잠깐이었고, 찰나 가늘게 뜬 눈으로 레이라를 힐끔 보았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쉽다니, 뭐가 말인가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녀가 재차 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깜박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아르제오가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여기에서 가까운 타냐 지역이라는 곳에, 그대가 관심 가질 식물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