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5)화 (5/122)

<5화>

그 말에 레이라는 눈을 크게 뜨며 반사적으로 남자를 밀쳤다.

“움직이네.”

뚱한 얼굴로 물러나는 그녀를 바라본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인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만 깜빡이던 레이라가 움직이니, 남자는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푹 젖어서 축축한 옷, 길게 늘어진 백금발, 희고 고운 피부에 청록색 눈동자까지.

바다에서 올라온 인어가 아닐까 싶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멀쩡한 사람 다리가 있었다.

인어보다도 더 곱지 않을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저도 모르게 했다.

“누구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그 말에 남자가 되물었다.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어쩌다가 그런 상태로 이런 인적도 드문 해안가에 있는 거지?”

‘인적도 드문?’

그 말에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타델 섬에서 보았던 해안가가 아니었다.

그렇게 넓지도 않았고, 좁은 해안가는 얕은 절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놀란 얼굴의 레이라가 남자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지역을 묻는 거라면 항구도시를 포함한 콜키 지역이야.”

그 대답이 불충분한지 레이라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어 덧붙였다.

“리히덴 제국의 변방이고.”

그 대답에 그녀는 짧게 숨을 멈췄다.

‘어째서?’

그게 제일 처음 떠오른 의문이었다.

시타델 섬에서 폭풍우가 들이닥친 데까지는 기억이 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의 파도가 섬을 덮쳤던 것도.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 어떻게 리히덴 제국까지 떠밀려 올 수 있지?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보며 남자가 제 뒤의 일행에게 말했다.

“일단은 함께 가야 할 것 같네.”

“그러게요, 당장 쓰러지셔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에요.”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레이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야 해요. 어떻게 갈 수 있죠?”

다급한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미간을 살포시 좁혔다.

“거기가 어딘데?”

“발루아 제국이 유배지로 쓰는 곳이에요.”

“유배지라면, 죄인을 보내는 곳이겠네.”

그렇게 말한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레이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람이라도 해친 건가? 이 얼굴로?’

도저히 남에게 해를 끼쳤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다. 대체 이런 얼굴로 무슨 죄를 지었을까.

레이라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유배지로 돌아가야 하고요.”

남자는 다시 눈썹을 치켜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돌아갈 거면 왜 탈출한 건데?”

“탈출한 게 아니라, 폭풍우에 휩쓸려 오게 된 거예요.”

“그럼 기왕 탈출했으니까 이대로 도망쳐도 되는 거 아니야?”

뚱한 표정의 남자를 보며 레이라는 곤란한 얼굴로 입을 꾹 닫았다.

“일단 가자. 계속 그러고 있을 건 아닐 테니까.”

레이라는 쫄딱 젖은 제 차림을 힐끔 바라보고는 남자를 따라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매끈하고 고운 팔. 그러고 보니 상처 하나도 없었다.

절벽 위로 넘칠 만큼 물이 차올라서 흘러내린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상처가 없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떠내려가기 전에 목숨을 잃겠지만.

파도가 덮친 와중에 절벽에 한 차례도 부딪치지 않고 그 좁은 길로 흘러나가 바다로 떠밀려 갔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런데, 용케도 발견하셨네요. 저쪽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시끄러워.”

앞서 걷던 두 사람이 속닥거렸다. 그러다 후드를 벗은 남자가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통성명도 아직이었네. 아르제오야.”

자신에게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레이라예요.”

“전 유진이라고 합니다.”

줄곧 후드를 쓰고 있던 일행이 슬쩍 얼굴을 내비치며 말했다.

잿빛 머리칼이 이마로 흘러내려 보였다.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던 레이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천천히 사정을 얘기해 주세요.”

상냥하게 웃는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레이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죄인이라고 했는데도 흔쾌히 도와주시네요.”

“저희는….”

“제국을 떠도는 상인이다.”

유진이 무언가 말하려는 것을 가로채, 아르제오가 대신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유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게다가 해변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싱긋 웃는 유진을 보며 레이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그녀로서는 그들이 친절을 베풀어 준 덕에 목숨을 건진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일단은 숙소로 데려가 자세한 얘기를 들을 예정이었는데, 성큼성큼 앞서 걷던 아르제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시타델 섬…?’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것 같아서 곰곰이 고민하다 돌연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전…. 으억…!”

걸음을 멈춘 아르제오에게 의아한 듯 다가서던 유진의 발을 그가 다급히 콱 밟았다.

“아무 일도 아니다, 유진.”

싱긋 웃는 아르제오를 보며 유진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진에게 상체를 기울인 아르제오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말조심해.”

“예….”

풀 죽은 얼굴의 유진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그를 ‘전하’라고 평소처럼 부를 뻔했다.

그런 두 사람을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바라보는 레이라는 그저 멀뚱멀뚱 눈만 깜박였다. 그녀를 힐끔거린 아르제오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앞서 걸으면서도 뒤쫓아오는 레이라를 힐끔거렸다.

‘폐위되어 죽음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곳에 유배된 황후….’

아르제오는 대략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부부의 연을 맺은 황후에게 그렇게까지 할까, 싶었다.

거기에 다시 그 유배지로 돌아가야 한다는 레이라.

아르제오는 픽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죄인이라….’

듣기로는 딱히 그녀의 잘못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스스럼없이 죄인이라 칭하며 유배지로 돌아가려 하다니.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 본인이라면 말이지.’

* * *

레이라는 그들을 따라 이 콜키 지역에서 머물고 있다는 숙소로 갔다.

숙소 주인에게 부탁하여 새 옷을 마련해 주고, 레이라는 일단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갔다.

어딘지 붕 떠 있는 듯이 몽롱했던 정신이 다시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오늘의 날짜를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파도가 덮치던 날이 정확히 며칠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신경 좀 쓸 걸 그랬나.’

어차피 세상과 단절되어 사니 날짜를 알아 봤자 무엇 하나 싶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조금 후회되었지만.

그래도 폭풍우가 치던 날에서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 날씨가 좋지 않아서 어부들이 바다에 나가지 못했다고 얘기했으니.

‘서둘러 돌아가면, 아무도 내가 시타델에서 사라졌던 걸 알지 못할 거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홀로 지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은 레이라는 숙소 직원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 아르제오와 유진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안색이 파리하다며 따끈한 수프를 준비해 주었다.

“아, 오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나요?”

“아, 네. 감사합니다.”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라에게 유진은 상냥하게 웃으며 의자를 빼 주었다.

몸에 밴 예절이 여느 귀족과 다를 것 없었다.

귀족들 상대하는 일이 많은 상인인가, 하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아르제오는 폭신한 빵과 수프를 그녀 쪽으로 밀며 말했다.

“일단 먹도록 해. 얼굴이 말이 아니니까.”

어쩐지 심술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유진이 의아한 듯 아르제오의 눈치를 살폈다.

여인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르제오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레이라는 순순히 수프를 떠먹었다. 따끈한 것이 목을 타고 안으로 흘러 들어가니 차갑게 얼어붙었던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안도의 한숨처럼 더운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아르제오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다짜고짜 시타델 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쫄딱 젖은 데다가 얼굴은 어찌나 창백했는지.

그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레이라를 빤히 응시했다.

“몸은 좀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해변에서 발견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시체가 아닌가 싶었으니까.

“그럼 바로 본론을 꺼내도 되겠네.”

“네? 네, 그러세요.”

수프를 떠먹으며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아르제오를 말끔히 응시했다.

“본인은 죄인이고, 유배지로 돌아가야 한다. 맞지?”

“네.”

“그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는 게 어때?”

레이라는 폭신한 빵으로 손을 뻗어 앙 베어 물며 고민했다.

그저 포레스티아 공녀일 때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니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공녀도, 황후도 아니었다.

그저 죄인이었고, 지금은 유배지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레이라는 빵을 오물오물 씹으며 잠시 고민하다가, 꿀꺽 삼키고는 그 조그만 입술을 열었다.

줄곧 움직이는 작은 입술을 저도 모르게 응시하던 아르제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어떤 설명을 원하시죠?”

“죄인의 풀 네임.”

나긋한 시선, 그리고 끌어 올린 입꼬리. 색기가 넘치는 얼굴에도 레이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이라 포레스티아입니다.”

포레스티아의 이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리히덴 제국의 사람이라면 말이다.

공작가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양국 모두에게 국경의 수호자라고 불렸다.

발루아 제국은 어떨지 몰라도, 리히덴 제국은 그다지 군력이 강한 나라는 아니었다.

현재도 황위 다툼으로 나라는 병들어가고 있었고.

‘진짜 포레스티아라면 폐위된 황후는 맞겠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르제오는 수프로 손을 뻗는 레이라를 응시하며 다음 질문을 꺼냈다.

“유배된 이유는?”

숟가락을 움직이던 레이라가 그 질문에 우뚝 멈췄다.

허공에 멈춘 숟가락에서 수프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르제오와 마주 본 그녀의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더한 동요가 느껴졌다.

레이라는 수프를 입으로 가져가는 대신, 숟가락을 다시 내려놓았다.

무표정의 레이라는 차분하고 고요했는데, 아르제오는 그 모습이 어쩐지 더 처연하게 느껴졌다.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라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유배된 이유는 간단했다.

‘로이드의 마음이 변했으니까.’

하지만 굳이 입에 담고 싶지는 않은 이유였다. 그래서 레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를 대신 꺼냈다.

“황족 독살 시도 혐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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