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난 괜찮아, 이스.”
정말 괜찮다는 걸 보여 주려는 듯, 레이라는 힘껏 웃어 보였다. 그래도 헤레이스는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절대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요.”
“무리하지 마, 난 정말 괜찮으니까.”
레이라는 그가 무모한 짓을 하진 않을까 걱정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 서로 할 얘기가 많았지만, 배는 기다려 주지 않고 시타델을 떠났다.
‘병사들을 공작령에….’
깊게 가라앉은 그녀의 시선은 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 자신을 보내 두고, 제국 쪽에 분명 감시병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공작령에 병사들을 보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괜찮을 거야.’
로이드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이 시타델에서 죽은 듯이 살 테니 공작가는 너그러이 봐 달라는 말에, 공작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러하겠다고.
그러니 레이라가 이 섬에 얌전히 머무는 동안은 괜찮을 터였다.
배가 발루아 제국의 선박장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레이라는 해안가에 서서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짧게 심호흡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짐 정리해야겠다.”
저 커다란 배로 짐을 아주 잔뜩 싣고 왔으니 정리할 것도 많을 터였다.
레이라는 조금 서둘러 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레이라는 집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앉아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완전히 캄캄한 밤하늘이 아닌데도 달빛이 반짝여 보였다.
이 침묵이 영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며 레이라는 몸을 일으켜 걸음을 뗐다.
낮에 배로 싣고 온 과일나무 묘목과 꽃씨들을 온종일 옮겨 심었다.
그녀는 그 묘목들을 한 번, 꽃씨를 심은 흙을 한 번, 그리고 채소밭을 또 한 번. 그 가느다랗고 고운 손으로 어루만졌다.
레이라의 손이 닿은 곳들은 곧 옅은 청록색 빛을 머금었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씨앗으로 흘러 들어가는 청록색 빛은, 여름밤의 반딧불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뒤 싹이 트고, 꽃을 피워 내고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을 침착하게 바라보던 레이라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작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갔다.
“아…. 좋다.”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 좋았다.
종일 몸을 움직이고, 흙냄새를 마음껏 맡고, 저녁때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와 뜨끈한 물에 피로를 푼다.
비록 유배지였지만, 레이라에게는 꿈만 같은 생활이었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생활은 처음이었다.
머리를 다 말리지 않은 상태로 집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별미였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이 유배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레이라는 가벼운 차림에 아직 젖은 머리칼로 집 안을 돌아다니며 늦은 저녁 준비를 했다.
레이라는 이곳에서 혼자 지내며 처음으로 요리라는 걸 해 봤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레시피 북을 뒤적이며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음….’
부엌에 선 레이라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움직인 탓인지 요리를 하는 게 번거롭게 느껴졌다.
‘간단히 먹을까.’
보름에 한 번씩 포레스티아가에서 식량이나 각종 물건을 전달하니,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게다가 오늘 그 물건들이 잔뜩 도착했으니 먹을 것은 넘쳐났다. 다만 그 짐들을 정리하고 묘목이나 씨앗을 옮겨 심는 일을 했더니 요리할 의욕이 크게 없었을 뿐.
그래서 레이라는 간단하게 수프를 끓여 먹었다.
“내일은 수밀을 심어 볼까.”
수프를 떠먹으며 레이라는 작게 중얼거렸다. 포레스티아에서 가져오는 식량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그게 끊어졌을 때 곤란할 터였다.
그러니 그녀는 그 부분을 혼자서 해결할 수 있도록, 미리 고민했었다. 그래서 받아 온 것이 수밀의 씨앗이었다.
수밀은 다른 구황작물처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 시기도 빠르다.
처음에는 누구나 쉽게 키워 낼 수 있다고 알려져,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심었다.
수밀은 그냥 먹을 수도 있고, 빵으로 만들 수도 있어서 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밀은 생각보다 키우기가 까다로워서 아무나 기를 수 있는 작물이 아니었다.
길러 낼 수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수밀을 심으려는 이들도 사라졌다.
하지만 레이라에게 키워 낼 수 없는 식물은 없었으니, 수밀 씨앗을 부탁한 것이었다.
따끈한 수프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던 레이라는 대충 정리를 끝내고 침대에 미끄러지듯 누웠다.
“피곤하고 좋다….”
모순되는 말에 레이라는 작게 웃고는 곧 눈을 감았다.
* * *
따끈한 차 한 잔을 들고 섬을 산책할 때 느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공기.
혼자 만끽하는 고요함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보내는 시간.
그런 것들은 레이라가 시타델 섬에 지내면서 제일 마음에 들어 한 부분이었다.
그녀가 시타델에 머무는 사이, 섬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갔다.
크기만 거대하고 땅의 영양분을 난폭하게 흡수하기 바빴던 섬의 거대한 나무들은 점차 푸르게 생기를 머금었다.
한쪽에는 과일나무가 여러 그루, 탐스러운 과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고, 또 한쪽에는 알록달록 꽃밭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푸르러지니, 쉬어 가는 새들도 많아서 아침에는 기분 좋은 새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제대로 만들어진 벤치도 없어서 작은 집 근처의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 일이 많았는데, 레이라는 이쪽이 더 좋았다.
그래서 그곳에 앉아 자주, 차를 마시는 여유를 즐겼다.
그 누가 와서 봐도 도저히 유배된 죄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죽음의 섬에서 지내는 레이라도, 물건을 조달하는 포레스티아의 그 누구도 그녀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고.
‘오늘은 잡초 뽑고, 물 주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바위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유롭게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킁킁, 가만히 바람을 느끼는데,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반짝 눈을 떴다.
올려다본 하늘은 드물게도 먹구름이 몰려 있었다.
시타델은 비가 오는 일이 흔치 않았다.
‘비가 오려나?’
새카맣게 변한 하늘을 보며 레이라는 재빨리 작은 집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타델 섬은 비가 거의 오지 않아서 늘 물 부족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안 그치네.”
창가로 나가선 레이라는 아직도 까맣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오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시타델이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곳이었나, 당분간은 물 걱정이 없겠다.
느긋하게 창밖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늦은 오후까지 비가 이어지면서 사라졌다.
기껏 심어 놓은 과일나무들이 뽑힐 듯이 바람이 불자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밤인 것처럼 하늘이 새카맸다.
당분간 섬에 물이 충분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애써 키운 채소밭과 꽃밭은 엉망으로 흘러내렸고, 과일나무도 꺾여 나갔다.
절벽이 둘러싼 탓에 빠져나가는 길은 하난데,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비를 들이부어서 점점 물이 차고 있었다.
“안 돼….”
몸이 차게 식고 있었고, 레이라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물살에 떠밀리는 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콰앙!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딛고 선 땅이 울리는 감각에 레이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절벽을 넘어서며 시타델 섬을 덮치는 거대한 파도를 보며 레이라는 하얗게 질렸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게 머리 위로 내리꽂히면 끝일 거라는 걸.
레이라는 질끈 눈을 감았고, 파도는 곧 시타델 섬을 덮쳤다.
한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싸는 감각과 함께,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 * *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바닷물에 쫄딱 젖은 레이라는 꽃들에 둘러싸여 바다에 둥둥 떠내려갔다.
누군가 보았다면, 대번에 시체가 떠내려온다고 여기고 질겁했을 터였다.
바람에 날리고 꽃잎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 꽃들은 제 주인을 살리려는 건지, 레이라를 시타델 밖으로 흘려보냈다.
바다에 계속 떠 있다면, 결국 저체온으로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시타델에서 떠내려간 레이라는 섬에 심고 길렀던 식물들로 인해서 바다를 지나 가까운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힘겹게 그녀를 지탱하던 꽃들은 레이라를 해안가 모래까지 밀어 넣고는, 힘을 다한 듯 바스러졌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꺼져가는 생명의 빛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살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햇볕이 모래밭으로 강하게 내리쬈다.
피부에 닿아 있는 땅에서, 레이라에게로 희미한 청록빛이 스며들었다.
그 상태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 레이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 * *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이 부시도록 쨍한 하늘이 흐릿하게 보였다.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레이라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시타델 섬을 파도가 뒤덮었다.
‘용케도 살아 있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가를 덮은 채로 허탈하게 웃었다. 그곳이 시타델 섬의 해안가라고 여겼던 탓이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파도에 덮쳐진 뒤의 기억이 전혀 없어서 잠시 그대로 누워 있는데,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손끝을 움찔거린 그녀는 천천히 눈가를 가렸던 제 손을 치웠다.
“이봐, 괜찮아?”
로브를 뒤집어쓴 웬 남자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안가에 이상한 여자가 누워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확인하러 온 것이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저를 살피는 남자를 바라봤다.
아직 환각을 볼 정도로 사람이 그립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섬에서의 생활이 외로웠나 보다고 여겼다.
하지만 남자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선 대답이 없는 레이라가 답답했던 듯,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뭐야,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건가? 바다에서 떠내려온 것도 아닐 테고.”
심해와 같은 짙푸른 머리칼, 은회색 눈동자. 길게 찢어진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이 사람은 누굴까. 바다의 정령 같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라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시타델 섬에는 그녀 외에 사람이 없으니.
분명 눈을 떴는데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없는 레이라는 보며 남자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뒤로 일행인 듯 보이는 사람도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돌연 레이라의 턱을 살포시 잡아 재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인어도 아니고. 인공호흡이라도 해 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