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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우는 황후님 (3)화 (3/122)

<3화>

마음을 덜어 내듯이 덤덤히 걸음을 옮긴 레이라는 죽음의 섬이라고 불리는 곳, 시타델로 들어섰다.

자연 요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절벽이 감싸고 있는 그 섬은, 들어가는 길이 하나였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가느다란 절벽, 그리고 그 안을 둘러싸고 있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나무들.

이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나무들인 만큼 끈질겼다.

비도 잘 오지 않고, 땅에 무언가를 심으면 그 나무들이 영양을 전부 흡수해서 자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예상했다.

그게 어떤 이유가 되었든, 레이라가 식물을 키우는 데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더 덤덤했는지도 몰랐다. 마치 남 일처럼 받아들이고 이곳까지 온 것도.

절벽 사이로 들어서는 유일한 길을 걸으며 레이라는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맛보는 고독이랄까.

절벽을 지나 거대한 나무들도 지나니, 그 가운데에 바짝 마른 척박한 땅과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죄인들을 보내던 곳이었으니 허름한 건 당연했다.

고작 가방 하나가 짐의 전부였던 단출한 차림의 레이라는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끼익-. 오래된 나무 문이 비명을 질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먼지가 가득 쌓인 집 안이 보였다.

한차례 내부를 훑은 그녀는 짐 가방을 내려놓고는 저벅저벅 창가로 다가섰다.

환기부터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창문을 벌컥 여니, 사방에 먼지가 흩날렸다.

“콜록, 콜록!”

손을 내저으며 먼지를 흩트린 그녀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곧 제 긴 백금발을 하나로 묶고 팔을 걷어붙였다.

“할 일이 많네.”

씁쓸한 생각을 할 시간도 없었다. 얕은 한숨 한 번으로 괜한 생각을 떨쳐낸 레이라는 미소를 머금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준비는 되어 있으니 간단한 청소만 하면 되었다.

바쁘게 생활할 공간을 청소한 레이라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로이드가 미리 준 씨앗 주머니를 꺼냈다.

이게 어떤 씨앗이든, 얼마나 생물이 자라기 힘든 땅이든 레이라에게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곳이 어디든, 어떤 열악한 환경이든 식물을 키워 낼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 * *

유배지로 들어가고 며칠, 레이라는 누구보다도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황궁에서 지냈던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 편히 지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과하게 치장할 필요도 없었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원하는 만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나타나 손에 흙을 묻히면 안 된다느니, 꽃에 물을 주는 건 다른 이들에게 맡기라느니, 귀찮은 잔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다.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이 ‘유배지’라는 것도 굳이 떠올리지 않으면 잊어버릴 만큼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게다가 죄인으로서 유배되었다고는 해도, 포레스티아 가문에서 레이라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 로이드는 보름에 한 번, 포레스티아 가문에서 직접 그녀에게 물건을 조달하는 걸 허락했다.

너무 몰아세우면 되레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바쁘게 지내는 와중에 그 보름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갔다. 레이라는 넓고 척박한 땅을 훑으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 시타델 섬에 있는 건 레이라 혼자였다.

그러니 무엇을 심든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미리 부탁했던 과일나무 묘목이랑 꽃씨도 들고 오겠지?’

물건 조달을 허락한다고 했을 때부터 레이라는 미리 포레스티아 가문에 서신을 보내 놓았다.

느긋한 아침을 즐기던 레이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네.’

수수한 차림의 레이라는 거울을 보며 머리만 다시 정리하고는 길을 나섰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인데, 단정한 모습이어야 할 것 같아서.

자연 요새 같은 시타델 섬의 유일한 입구를 천천히 걸어 나온 레이라는 해안가를 살폈다.

하루 한 번 대륙과 이어진 길이 열리지만, 짐을 나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마차도 지날 수 없는 길이니.

그래서 시타델 섬으로 물건을 전하러 오는 일행은 배를 타고 왔다.

포레스티아 가문에서 보낼 물건들을 싣고 오는 거지만, 병사들이 함께 올 터였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가를 바라보던 레이라는 곧 커다란 배가 시타델 섬으로 다가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해안가에 정박해 짐들을 잔뜩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야, 이스.”

“얼굴이 상하셨습니다, 누님.”

물건을 전하러 일행을 이끌고 온 건, 레이라를 꼭 닮은 그녀의 남동생 헤레이스 포레스티아였다.

“공자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실 수 없으십니다.”

“알고 있다.”

물건들을 내리던 병사들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헤레이스는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날카롭게 대답했다.

병사는 그가 미간을 구기니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묵묵히 짐을 내렸다.

“짐이 많으니 누님의 거처가 있는 곳까지 옮기지.”

“예, 공자님.”

배에서 짐을 내린 병사들은 그것들을 전부 해안가에서 시타델로 들어서는 외길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레이라는 배 앞에 서서 헤레이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나지막한 물음에 레이라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이렇게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서 헤레이스는 더 마음이 쓰였다.

물론 황궁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던 때와는 전혀 다르게, 표정만은 좋아 보였지만.

“내가 부탁했던 건 가져왔지?”

“물론입니다. 부족하실 일이 없도록 넉넉히 가져왔으니 걱정 마세요.”

그 대답에 레이라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들 잘 지내지? 어머니, 아버지는? 로라는 잘 있어?”

“다들 누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황궁에서는? 공작가에 아무 짓도 안 하지?”

헤레이스는 불안해하는 레이라를 안심시키려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를 하려는 건지, 병사들을 보내긴 했지만요. 국경이니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대외적인 이유라서 돌려보낼 수도 없고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그 말은 로이드가 어쨌든 공작가를 계속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괜찮아.’

하지만 괜찮을 터였다. 그녀가 이 시타델 섬에서 움직이지 않는 한은.

“그것보다, 생활하시는 데에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다른 필요한 거라든지….”

“괜찮아, 씨앗만 있으면 돼.”

정말 그녀에게는 그 어떤 씨앗이든, 그것만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만큼 레이라는 특별했지만, 로이드는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듯했다.

황제를 떠올리니 다시 울분이 치솟아 헤레이스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를 채 감추지 못한 채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누님. 이곳에 누님을 혼자, 오래 두지는 않을 겁니다.”

헤레이스의 말에 레이라는 쓰게 웃었다.

굳이 자신을 이곳에서 구하고자 애쓰지 않았으면 했다.

그로 인해 포레스티아 가문에 피해가 간다면, 그걸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스, 난 괜찮아.”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에서, 레이라가 시타델에 유배된 것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었다. 그녀 본인만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였을 뿐.

침착한 목소리로 본인의 결백을 말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레이라는 받아들였다.

로이드의 태도가 달라진 건 벌써 오래전이니, 그가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것도 쉬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시타델로 들어오던 날에 로이드를 보며 레이라는 그 모든 걸 피부로 느꼈다.

감시병들이 배에 남은 탓에 배에서 내리지도 못하는 헤레이스는 참담한 얼굴로 레이라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어쩐지 더 안타까웠다. 그래서 레이라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가 힘없이 떨어트렸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상황은 용납할 수 없을 터였다.

레이라를 너무도 아꼈고,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레이라도 그러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마음이 풀리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레이라는 입을 뗐다.

“있잖아, 이스.”

“네, 누님.”

“나는 이제, 이 시타델을 내 땅이라고 여길 거야.”

부러 웃는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헤레이스가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헤레이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레이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얌전히 설명을 기다리는 그를 보며 레이라는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보내지는 죄인은 거의 없고, 누군가 유배되고 나면 그 죄인이 이곳을 나서기 전까지 다른 죄인은 보내지지 않아.”

“누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응, 그렇지.”

당연하다는 듯 말해 주는 것이 레이라는 기뻤다. 절대적으로 자신을 믿고 있으니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이 올 리가 없으니까 이곳은 전부 내 차지라는 뜻이야.”

그렇게 말한 레이라는 조금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난 여기를 마음껏 꾸며 보려고 해.”

원하는 만큼 식물을 심고, 나무를 키우고, 꽃을 피울 것이다. 오래전부터 연구하며 키워 보고 싶었던 식물도.

그 생각을 하면 레이라는 조금도 우울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다정하고 정성을 쏟던 로이드가 변해 버린 것이 씁쓸하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넓은 섬 전체를 제 마음대로 꾸며도 된다는 생각에 들뜰 뿐.

레이라의 대답에 헤레이스는 픽 웃어 버렸다. 드디어 굳어졌던 표정이 조금 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이요?”

레이라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쩍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들어 입 옆으로 가져갔다. 옆쪽엔 아무도 없었지만, 만약 누가 온다고 해도 입 모양을 볼 수 없도록.

“누구도 피워 내지 못하는 꽃. 오직 나만 만들 수 있는 씨앗.”

짙은 미소가 번지며 이어지는 말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서는 보는 눈이 없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함부로 보였다가는 제국이 발칵 뒤집힐 수도 있는걸.”

헤레이스가 낮게 웃는 걸 보며 레이라도 웃었다.

줄곧 해 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아무도 피워 내지 못하는 꽃, 그녀만이 피울 수 있는 특별한 힘을 가진 꽃.

그걸 생각하면 레이라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로이드가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누님께서 괜찮으시다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헤레이스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한 일을 겪고, 레이라가 울지 않고 저리 웃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헤레이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절대 자신이 보는 앞에서는 울지 않을 걸 알지만.

곧 섬 안의 작은 집까지 짐을 전부 옮긴 병사들이 돌아왔다.

함께 있던 시간은 짧았고, 헤어짐은 아쉽기만 했다.

병사들은 전부 레이라에게 대충 고개만 까딱이고는 서둘러 배에 올라탔다. 그들의 태도에 헤레이스는 다시 인상을 구겼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 헤레이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누님, 반드시 이 상황을 바꿔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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