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꽃을 매만지는 레이라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 내에서 엘라와 로이드를 둘러싸고 소문이 무성했다. 아마도 진실이 아닐까, 생각했다.
엘라는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로이드가 마음에 두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어째서인지 그게 크게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제 마음 때문에 레이라는 더 의연하게 행동했다. 뒤에서 시녀들이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 그 소문과는 동떨어져 지냈다.
가끔 엘라가 찾아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금 신기한 사람이라는 게 감상의 전부였다.
엘라가 사라진 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리가 다가섰다.
“이래서 곁에 사람들을 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말씀 올린 것입니다.”
한숨을 폭 내쉬는 메리를 보며 레이라는 작게 웃었다.
설령 비아냥거리기 위해 찾아와도, 그 비아냥거리는 것마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제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걸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그만큼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힘은 거대했으니.
로이드가 자신을 지켜 줄 거라는 믿음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존재는 든든하게 뒤를 버티고 있었다.
메리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레이라는 괜찮다고 웃기만 했다.
* * *
비록 로이드의 태도는 변했고, 레이라보다 엘라를 더 곁에 두더라도, 레이라는 괜찮았다.
혼약을 맺은 사이이니, 식물을 돌보듯이 로이드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터졌다.
메리는 아마도 이와 같은 일을 염려하지 않았을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레이라는 생각했다.
깊은 밤, 황후의 침실에 메리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들었다.
미리 묻지도 않고 대뜸 문을 벌컥 연 메리는 레이라의 침대에 애타게 매달렸다.
“황후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메리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레이라를 붙들었다.
“메리?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잠이 덜 깨어 비몽사몽 한 상태로 물었다.
어리둥절한 레이라를 붙들고 메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었다.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가셔야 해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며 메리는 악에 받쳐 말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 깨닫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병사들이라니, 왜요?”
“독살 혐의라고 해요….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그랬을 리가 없잖습니까! 모함입니다! 하지만 황궁에 독이라니, 당장 사형에 처할지도 몰라요! 일단은 몸을 숨기시고, 진위를 파악할 때까지는….”
메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나타났다.
입증되지 않은 독살 혐의가 곧장 사형에 처할 사안은 아니었다.
다만 메리가 걱정하는 건, 레이라를 몰아내기 위해 저들이 작정하고 움직였을 경우였다.
그래서 이렇게 무작정 그녀를 찾아와 몸을 피하라고 애원한 것이었다.
들이닥친 병사들을 바라보며 레이라는 잠시 숨을 멈췄다.
레이라는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정말이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설마, 죽음의 땅으로 내몰릴 거라고는.
* * *
로이드는 황제로 즉위 직후부터 그 어떤 귀족도 황권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세력을 강화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돌이켜 보면, 그의 그 노력은 그저 다른 귀족들을 경계함이 아니라 포레스티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를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레이라는 황궁에 독을 들여와 엘라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치밀하게 준비한 탓에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이미 범인을 레이라로 정해 놓고, 상황도, 심증도, 물증까지 다 그녀가 범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레이라가 황후궁의 정원에서 직접 기르고 말려서 만든, 차의 풍미를 더 해 줄 꽃잎을 로이드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건 그녀가 황후가 되기 전부터 매년 보내던 것이었다.
그 꽃잎을 넣은 차는 향긋하며,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로이드가 차분히 국민을 돌보는 황제가 되기를 바라서 그리 한 것이었다.
그런데 로이드는 그런 레이라의 마음을 이용했다. 그녀가 보내 준 꽃잎에 소량의 독이 섞이도록 했다. 자신에게 내성이 있는 독으로.
황제는 엘라와 함께 마시는 차에 스스로 독을 섞은 꽃잎을 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엘라는 로이드에게 살랑거리며 차향이 좋다고 아양을 떨었다. 그러고는 홀짝 차를 마시고는 곧장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꽃잎이 레이라가 보낸 것이라는 것과 엘라가 곧장 쓰러진 현장을 목격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보내는 물건을 검사하는 이, 차에 꽃잎을 띄운 이, 그 현장을 지켜본 이들까지 전부. 그곳에 레이라의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그들 전부가 한통속이었다는 의미였다.
황궁에 독을 들여온 것 자체가 중범죄였고, 레이라가 독을 들여온 경위까지 이미 완벽하게 위조되어 있었다.
극소량이어서 애초에 살의는 없었다는 건, 모두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닫았다. 포레스티아 공작가를 견제하는 다른 귀족들에게 이건 좋은 기회였으니.
그래서 그 귀족들은 입을 모아 사형을 외쳤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쨌든 제가 황위에 즉위하는 데에 그녀의 도움이 있었으니.
게다가 포레스티아 가문을 완전히 적대하려는 것이 아직 아니었다. 그저 이용 가치가 더 많은 엘라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을 뿐.
그리하며 이번에는 홀든 후작가를 흡수하려 했다.
그래서 로이드는 큰 아량을 베푸는 양, 포레스티아 가문 덕에 사형을 면했다고 강조하며 레이라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황후인 레이라를 황궁에서 내쫓기 위해 로이드가 직접 움직인 일이었다.
레이라 대신 곁에 두는 엘라의 집안, 홀든은 대대로 무기 무역을 독점한 후작가였다. 군사 강화와 훈련에 특별히 힘을 썼다.
로이드는 더 이상 전쟁이 두렵지 않았다. 국경의 수호자가 없어도, 발루아 제국은 굳건할 터라고 자부했다.
오히려 국경의 수호자는 전쟁을 반대하기에 더욱 거슬렸다.
발루아 제국과 리히덴 제국, 그 국경에 자리한 포레스티아 공작령.
그리고 그 국경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하루에 한 번 바닷물이 빠지면 대륙까지 이어지는, 사람 하나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축축하고 좁은 길이 생기는 작은 섬이었다.
발루아 제국에서는 ‘죽음의 땅’이라고 부르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짐승도 살지 않는 그런 곳이 레이라의 유배지였다.
오래전부터 사형수나 다름없는 죄인에게 조금의 씨앗을 쥐여 그곳으로 보냈다.
그 씨앗이 싹을 틔워 자랄 때까지의 식량과 함께.
나머지는 온전히 그 씨앗으로 홀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 죽으라고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포레스티아 공작가가 있는 이상, 레이라에게 이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발루아 제국 소유이던 국경의 포레스티아 공작령을 리히덴 제국에 내어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니.
하지만 로이드는 자만했다.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큰 피해를 보는 것이 포레스티아 공작령이다.
황제로 즉위한 뒤로 꾸준히 세력을 키웠다.
포레스티아 공작가에 쩔쩔매지 않아도 되도록. 그 결과, 레이라를 유배 보내도 될 거라는 판단이 설 만큼 힘을 얻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레이라는 처음부터 덤덤한 태도로 일관했다. 메리가 호들갑을 떨었지만, 저만 무결하면 문제 될 건 없다고 여겼다.
죄가 없으면 처벌받을 리가 없다고, 그런 당연한 생각을 레이라는 믿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결국 포레스티아 가문이 들고일어나는 걸 감수하고 레이라는 유배지에 보내지게 되었다.
죽음의 땅으로 보내지는 사람이, 전 황후였던 탓에 로이드는 레이라를 유배지까지 가는 길을 배웅했다.
“늘 후원에 틀어박혀 있던 당신이라면, 이 정도 씨앗으로도 충분히 살아남겠지.”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포레스티아에서 물건을 조달할 수 있도록 허락했으니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바닷물이 빠지며 생긴 긴 길을 힐끔거리며 로이드가 레이라에게 씨앗이 담긴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폐하, 전 독살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덤덤히 씨앗을 받아 들면서도 레이라는 꿋꿋이 말했다. 로이드는 무심코 ‘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물론 그 말은 입 밖에 나오기 전에 꿀꺽 삼켰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으니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닌가?”
로이드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레이라는 특유의 동그란 눈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로이드는 저도 모르게 먼저 시선을 피했다.
“제가 정말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군요.”
“…….”
로이드의 부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이라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손에 쥔 씨앗이 어쩐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대로 걸음을 떼려던 레이라는 잊은 것을 떠올린 듯 다시 로이드를 마주했다.
“바라시는 대로, 저 죽음의 땅에서 죽은 듯이 살 터이니 포레스티아 공작가는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자식을 끔찍이 여긴다고 소문이 자자한 가문이었다. 레이라의 유배가 결정된 순간부터 반발이 엄청났다.
“그러니 제가 서신을 보내 놓았습니다. 저희 가문이 움직일 일은 없으니, 폐하께서도 너그러이 살펴 주세요.”
“그러지.”
포레스티아 공작가가 가만히만 있는다면, 로이드에겐 나쁠 것이 없었다.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확인한 레이라는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부디 건강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로이드는 늦게까지 집무실에 틀어박히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레이라는 그 말이 제일 좋은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다시 등을 돌린 그녀는 천천히, 죽음의 섬까지 길게 뻗은 길을 걸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었다. 멀리 보이는 섬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차라리 잘됐네.’
섬과 가까워질수록, 로이드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레이라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길의 반쯤 건너왔을까, 그게 궁금하여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발자국이 남은 가느다란 길이 등 뒤로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섬까지 도달하는 것을 굳이 지켜볼 필요성도 못 느낀 로이드가 벌써 돌아가 버린 것이었다. 감시병들만을 남겨 두고.
그와 처음 만나고 지내 온 그 긴 시간, 그 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들의 관계 같아서 레이라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곧 미련 없이 돌아섰다. 아무도 남지 않은 해변을 등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