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 피우는 황후님 (1)화 (1/122)

<1화>

프롤로그

척박하고 드넓었던 땅. 아무것도 자라지 않아서 사람이 떠나 버려졌던 땅.

그곳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 땅을 매만지는 이가 있었다.

흙을 매만지면, 옅은 청록색 빛이 스며들고는 금세 싹을 틔웠다. 그녀의 손이 닿으면 새싹은 금세 자라났다. 꽃이 피고, 묘목이 순식간에 나무로 자라나기도 했다.

그 손이 물이고, 햇살인 것처럼 식물들은 그녀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밀짚모자 아래로 느슨하게 묶은 백금발이 바람에 살랑였다. 뙤약볕에 앉아 있는데도 피부가 백옥 같았다.

옷차림은 수수한 분위기였지만, 허름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이 땅과는 어딘가 동떨어져 보였다.

“레이라.”

저벅저벅 그녀에게로 다가간 한 남자가 나지막이 말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 누군가가 이곳에 나타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폐위되어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이곳으로 쫓겨난 황후. 맞지?”

“누구세요?”

밀짚모자를 쓴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드니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만나러 왔어.”

눈부시게 웃으며.

* * *

“정말 괜찮은 거야? 포레스티아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게…. 근데 황후님은 또 정원에 계신 거야?”

“그래. 또 정원에 계셔. 폐하의 마음을 돌리셔도 모자랄 판에….”

시녀들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속닥거렸다. 열심히 치장하고 황제의 마음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또 손에 흙을 묻히고 정원에 틀어박혔다고.

정원에 꿀을 발라 놓은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리도 정원에만 계시는지 모르겠다며 가슴을 팡팡 내리쳤다.

제 뒤에서 무슨 말이 들리는지, 그 정도는 레이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딱히 달라지는 것이 없을 거라고 여기기도 했다. 어쨌든 레이라는 포레스티아의 일원이니.

주변 국가들이 입을 모아 그들을 ‘국경의 수호자’라고 칭했다. 그것이 포레스티아 공작가였다.

국경을 뒤덮은 거대한 숲. 그 전부가 포레스티아 공작령이며, 그들이 지키는 곳이었다. 그 영지 때문에라도 황실은 포레스티아 가문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포레스티아 공작가에서는 대대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이가 태어난다.

뛰어난 검술을 자랑하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검술은 범인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때는 처세술이 뛰어난 아이가, 또 어느 때는 치유의 힘을 타고나기도 했다.

포레스티아 가문은 정령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정말로 특별한 힘을 타고나는 경우가 많아서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황실에서도 내심 안심했다.

그 아이를 황후로 들여 황실의 일원으로 만든다면, 이 제국에 더욱 도움이 될 테고, 황위의 위협도 줄어들 테니.

국경의 수호자를 외가로 둔다면, 리히덴 제국으로 회유될 걱정도 덜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황후로 들이는 것도 쉬운 건 아니었다.

포레스티아는 아이들의 뜻을 무엇보다 존중했고, 황실에서 강압적으로 일을 진행 시킬 수도 없었다.

그만큼 포레스티아 가문의 세력은 컸다.

‘폐하께서도 내게 처음부터 이러시진 않았는데….’

흙을 매만지던 레이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늘어뜨린 백금발, 청록색 눈동자. 아름답다기보다는 참 곱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차분하며, 마치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는 듯했다.

그녀는 직위에 걸맞지 않게 조금 수수한 차림이었다. 게다가 손에 흙을 묻히며 직접 정원을 관리하고 있기도 했다. 늘 직접 물을 주며 정성으로 가꾼 곳이었다.

레이라에게는 이 드넓은 황궁에서 유일하게 마음 붙일 수 있는 장소였다.

“또 여기에 있었군.”

“폐하.”

넋을 놓고 후원을 바라보던 레이라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머리칼과 잿빛 눈동자.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인상이 더욱 차가워 보였다. 그는 이 발루아 제국의 황제, 로이드 르 메디치 발루아였다.

그는 날이 선 시선으로 흙이 묻은 레이라의 손을 훑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쓸모없는 일만 하는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로이드는 싫은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처음엔 이러시지 않았는데….’

레이라는 아직도 처음 로이드를 만났을 적을 생생히 기억했다.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자상하게 웃어 주던 그를.

황태자 시절, 로이드는 바쁜 와중에도 기어코 시간을 내어 레이라를 만나러 가곤 했다.

꽃을 준비했다가, 씨앗이 더 좋다는 그녀의 말에 그다음에는 화분을 들고 나타났었다.

꽃을 주는 이에게 씨앗이 더 좋다고 말하는 그녀도 독특했지만, 고민 끝에 그녀에게 화분을 선물한 그가 썩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이겠구나,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폐하,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가느다란 목소리에 로이드는 망설임 없이 레이라에게서 등을 돌렸다. 옛 기억에 젖어 있던 그녀도 로이드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윤기를 머금은 주황색 머리칼에 매혹적인 눈매. 최근 로이드가 가까이하고 있는 후작가 영애, 엘라 홀든이었다.

엘라의 존재 때문에 최근 시녀들은 물론,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황제께서 이미 마음이 뜨셨다는 둥, 포레스티아 공작가의 세력이 약해질지도 모른다는 둥, 전쟁을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소리까지.

전쟁 얘기가 나오는 건 순전히 홀든 후작가가 무기 무역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로이드에게 전혀 전쟁의 의사가 없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의문이었다.

“지금 가지.”

엘라의 부름에 로이드는 미련 없이 레이라에게서 멀어졌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녀는 가만히 응시했다.

어쩌면 사람이란, 원래 이렇게 다 변해 가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레이라는 더욱 꽃과 나무, 식물에 마음을 내주게 되었다.

로이드가 가 버리고 홀로 남은 정원에, 레이라는 다시 꽃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가 재미없는 것이겠지?”

꽃을 향해 중얼거린 레이라는 설핏 웃었다.

“황후 폐하, 또 이곳에 계셨던 것입니까.”

그렇게 가만히 꽃을 매만지며 마음의 위로를 얻고 있는데, 시녀장이 레이라에게 다가왔다.

“절 찾고 있었나요, 메리?”

레이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시녀장을 바라봤다. 메리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시녀들이 뒤에서 함부로 떠드는 말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라의 분위기가 어쩐지 서글퍼서, 메리는 시녀들이 떠드는 얘기가 귀에 들어간 것이라고 짐작했다.

멋대로 떠드는 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호되게 꾸짖고 있었지만, 그 많은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리로 오는 길에 황제 폐하와 후작 영애를 발견한 참이었다.

걱정으로 미간을 찌푸린 메리를 안심시키려 레이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메리.”

싱긋 웃는 레이라를 보니 메리는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리도 곧은 성품의 황후를 주변이 제대로 알아봐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메리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 * *

발루아 제국의 황궁. 레이라에게는 그곳이 점점 감옥처럼 느껴졌다.

말 그대로, 옥살이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유일하게 마음 붙일 곳이 정원이니,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황후궁의 후원에서 보냈다.

원하는 꽃을 심고, 약초 등을 심기도 했다. 레이라의 손을 거치면 그 어떤 식물이든 무럭무럭 자라났다.

다른 식물들보다 더 튼튼하고, 쉽게 시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힘을 땅의 정령, 트로웰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포레스티아는 정령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말하니까.

“질리지도 않고 이곳에 계셨네요?”

레이라가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건, 황궁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엘라?”

슬쩍 머금은 미소가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어찌 이리도 태연하단 말인가. 황궁에 떠도는 소문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레이라는 변함없이 차분하고 고고했다.

그게 거슬리는 엘라는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엘라는 매일 장미 꽃잎을 띄운 물에 목욕하고, 마사지를 받고, 꼼꼼히 화장수를 발라 관리했다.

반면 레이라는 하루가 멀다고 뙤약볕에 나가 있었는데도, 백옥 같은 피부를 자랑했다.

레이라는 예전부터 그랬다. 자신이 기를 쓰고 손에 넣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미 손에 쥐고 있었다.

심사가 뒤틀려 엘라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또 정원에 계시다기에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햇볕이 뜨거운데, 피부가 상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눈은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입꼬리는 주체하지 못하고 슬슬 올라갔다.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약을 올리려는 것이 눈에 빤히 보여, 레이라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다지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딱히 되받아치려거나, 꼬투리를 잡으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 그리 물었을 뿐.

“무,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황후 폐하. 염려스러운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엘라는 부러 울먹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만들어 낸 기색이 역력하여, 레이라는 조금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대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말하니, 엘라의 억지로 덧씌운 미소에 금이 갔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시선만 도르륵 굴리는데, 근처로 시녀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엘라는 금세 울상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시군요….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눈에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근처를 지나던 시녀들이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로이드의 총애를 빼앗겼으니, 화를 낼 수도 있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이라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엘라를 응시했다.

표정에는 의아함 외에 다른 감정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영문을 알 수 없고,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레이라가 말했다.

“이렇게 빨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요. 대단해요. 평소에 슬픔을 많이 품고 사나 보군요. 아,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좋은 꽃이 있어요. 조금 나눠 드릴 테니 차로 우려 드시면 좋겠습니다.”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친 레이라가 화단을 살피자, 지켜보던 시녀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화단에서 꽃을 꺾는 레이라를 보며 엘라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총애를 잃은 껍데기뿐인 황후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제가 갈망하는 것을 손에 쥐고, 그것을 빼앗긴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제 뜻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엘라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부러 기분이 상하도록 말해도 딱히 동요하는 내색도 없고, 그녀의 주변도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앞에서는 가면을 덧쓰는 것이 어려웠다.

그 사이 레이라는 화단에서 꽃 몇 송이를 꺾어 엘라에게 내밀었다.

“슬리피 플라워라고 불릴 만큼 숙면에 좋은 꽃인데, 차로 우려 마시면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좋습니다.”

레이라가 웃는 얼굴로 내미는 꽃을 엘라는 조금 싫은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고운 손에 흙이 묻어 있는 것이 거슬렸다.

“다음번에 받으러 오겠습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엘라는 꽃을 내민 손을 무시한 채로 산뜻하게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이라는 다시 화단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미안해. 필요 없는데 괜히 너희만 귀찮게 했네.”

싱긋 웃은 레이라는 꺾었던 꽃들을 다시 화단 쪽으로 가져갔다.

꺾여 나간 자리에 꽃을 다시 올리고는 끊어진 부근을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녀의 눈과 같은 청록빛이 아주 옅게 빛나며 꽃이 다시 제 자리에 붙었다.

이 힘을 처음 보는 이들은 저마다 황홀해하며 감탄했다. 로이드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지만.

싱긋 웃은 레이라는 탁탁 손을 털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꽃밭에 내려온 여신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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