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14)

“데아론, 이 바보야.”

그녀는 산뜻하게 타박했다. 초야를 앞두고 바보라고 욕먹은 남자는 다소 망연해졌지만, 다음 순간 그 망연함도 잊었다.

“넌 이미 충분히 준비됐거든?”

첼루나가 데아론의 가운 깃을 훅 끌어당겨 그에게 입을 맞춘 탓이었다. 이미 수백 번은 맛본 입술인데도 불구하고, 달았다.

“너, 지금 네 모습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르지.”

첼루나는 후끈하게 속삭이며 데아론의 앞머리를 매만졌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아 촉촉한 머리칼, 옷깃 위로 드러난 굵은 목선. 완벽했다.

“속옷만 입고 기다리는 네 모습이 꽤 기대되기는 하지만.”

첼루나는 씩 웃었다.

아, 내 사랑스러운 남편은 대체 어디서 그런 엉큼하고 깜찍한 아이디어를 얻는 걸까. 그녀는 그의 야릇한 창의력을 몹시 칭찬했다.

“지금도 충분히 유혹적이야.”

유혹적이라 유혹당했다. 첼루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데아론에게 홀렸다. 그가 전부 잊은 지난 생에서부터.

“가운 하나로 이런 연출이 가능한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첼루나는 다재다능한 제 남편을 기쁘게 어루만졌다.

한편, 데아론은 아까부터 첼루나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첼루나가 입 맞췄을 때부터 그를 지배한 건 열렬한 욕정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정욕이라는 불꽃에 달큼한 연정을 땔감으로 더하자, 그는 폭발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는 법적으로 그의 소유이자 소유주인 사람이 그를 보며 사랑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게다가 이렇게 야한 차림으로.

대체 누가 어떤 생각으로 첼루나에게 이런 옷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알아낸다면 데아론은 그 사람에게 매우 후하게 보답할 의향이 있었다.

“흡……!”

맹수를 눈앞에 두고 태연하게 종알대던 첼루나는 곧, 잡아먹혔다.

새신랑을 시각적으로 마구 자극하던 잠옷은 이제 쓸모를 다했다.

데아론이 더는 필요 없어진 드레스를 조급하게 벗기자 첼루나의 뽀얀 맨살이 드러났다.

“아아, 데아론……!”

곧 교성이 울려 퍼졌다. 침대에 신부를 눕힌 남자는 신부 위에 올라타 맹렬하고도 다정한 키스를 퍼부었다.

“첼루나, 사랑해요.”

짐승, 수컷, 또는 지고지순한 남자가 고백했다. 첼루나는 희열에 잠긴 와중에도 울컥했다.

“사랑해, 첼루나.”

저 고백으로 첼루나는 여태 살아왔다. 혼자 회귀하여 버겁고 외로울 때마다, 그녀는 저 진리를 되뇌며 여기까지 버텼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전생에도 그러했듯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그토록 달콤한 확신 속에서, 초야가 이어졌다.

지난 생에 첼루나는 연인과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

함께 바다를 보고 싶었고, 산에도 가고 싶었다.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축제를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첼루나는 시작부터 쓸쓸히 단념했다. 이룰 수 없는 희망은 품을수록 아팠다.

전생에 첼루나는 미움받는 공주, 데아론은 첼루나의 반대편에 선 가문의 사생아였다.

황궁 후원에서 몰래 만나거나 기껏해야 시내 공원에 들르는 게 전부였다.

여행을 꿈꾸고 유람을 그려도 그들을 맞이한 건 차디찬 현실이었기에 이번 생에도 첼루나는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이번 생에는 끔찍한 변수가 생겨 블레논이 승리할까 봐, 텔레스가 패망하고 데아론과 자기 모두 죽을까 봐, 첼루나는 오래 불안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승리가 확정되었다. 연인들은 부부로 맺어졌고, 남은 건 행복의 세월뿐이었다.

신혼여행을 시작한 첼루나는 아이처럼 들떴다. 바다를 보고, 산에도 가고, 불꽃놀이와 축제를 즐기고. 문자 그대로 꿈만 같았다.

“우와, 진짜 예뻐.”

첫 목적지는 바다였다. 첼루나는 난생처음 실물로 접하는 광활한 푸른빛 앞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윽, 아직 좀 차갑네.”

구두와 양말을 벗고 치맛자락을 살짝 들친 채 맨발을 물에 담그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절대 싫은 감각은 아니었다.

“데아론, 너도 들어와, 흐엑?!”

젖은 모래를 밟으며 남편을 신나서 돌아보던 첼루나는 별안간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뱉었다.

사태의 원흉은 데아론이었다. 스물세 살이 아닌 세 살짜리처럼 유치한 본능이 발동한 남자는 아내에게 장난으로 물을 뿌려 놓곤 생글대며 좋아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차가우신가요?”

“너…….”

데아론이 전혀 안 죄송한 표정으로 방긋대자 첼루나는 눈을 부라렸다.

근처에서 지켜보던 황녀의 호위들과 시종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 데아론의 황족 모독 장면을 너그럽게 응시할 뿐이었다.

‘귀엽군.’

‘청춘이네.’

‘청춘이야.’

‘역시 신혼부부다워.’

죄다 이런 표정뿐이었다. 그들의 인자한 묵인 앞에서 데아론은 용기 내어 만용을 부렸고, 첼루나 혼자 억울해졌다.

“차갑냐고? 차갑냐고?”

첼루나는 으르렁대며 본인도 몸을 숙여 데아론에게 바닷물을 한 움큼 뿌렸다.

데아론은 얄밉게 웃으며 전부 피했다. 기사의 민첩성이 쓸데없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봐!”

“죄송하지만, 싫습니다.”

이번에도 데아론의 죄송하다는 말은 기만에 불과했다. 첼루나는 잔뜩 성이 나서 씩씩거렸다. 데아론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푸핫 웃었다.

첼루나는 세 살처럼 유치하게 구는 남편보다도 한없이 얄팍한 자기 자신이 훨씬 싫었다.

저 경쾌한 폭소를 듣고, 저 아름답게 웃는 모습을 보고 그새 화가 풀리다니. 푹 끓인 설탕처럼 마음이 흐물흐물 녹다니.

‘나도 참, 이럴 때 보면 줏대가 없다니까.’

첼루나는 내적으로 혀를 찼다. 좀 더 까탈스럽게 굴어도 될 상황에 고작 얼굴에 홀려 누그러지다니.

하긴, 저건 ‘고작’ 얼굴이 아니었다. 저 수려한 얼굴을 보고 어찌 그런 비하적인 수식어를 붙일 수 있으랴.

게다가 첼루나는 데아론의 낯가죽만 보고 반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데아론 텔로아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사랑했다.

평소에는 무척이나 어른스럽다가 때로는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 모습도. 밤마다 살을 섞을 때는 전혀 아이 같지 않은 면모까지.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눈매가 반달처럼 접히는 모습이나 한쪽에만 얕은 보조개가 생기는 것도, 전부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방금의 유치한 만행까지 마냥 덮어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분명 응징이 있으리라.

첼루나는 바닷물을 첨벙대며 데아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멱살을 과격하게 틀어잡았다.

이어 데아론이 당황하기도 전, 입술을 맞붙였다.

“……!”

벌건 대낮에 이루어진 애정 행각이었다. 데아론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딸기색 홍조가 들어찼다.

호위들과 시종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다가 곧장 깍듯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각자 생각했다.

‘화끈하군.’

‘청춘이네.’

‘청춘이야.’

‘역시 신혼부부다워.’

보수적인 제국에서 상당히 남사스러운 행위였으나, 상대방이 황족이라 잔소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너그러이 눈감아 주었다.

“하아, 루나, 잠깐만…….”

데아론은 거의 애원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얼마든지 짐승처럼 변할 수 있는 그였지만, 사실 그는 남들이 보는 앞에서 물고 빠는 걸 매우 창피해하는 편이었다.

“잠깐, 뭐?”

첼루나가 새침하게 따졌다. 그러더니 참으로 요사스럽게 데아론의 입가를 핥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흣.”

미칠 것 같았다. 다른 관광객들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해변에서 이게 대체 무슨 추태람.

설상가상으로, 그는 몸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데아론은 자신의 단순한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지나치게 솔직한 반응이었다.

“데아론, 고작 키스 갖고 이러는 거야?”

첼루나는 사악하게 씩 웃었다. 그녀도 자신과 맞닿은 단단한 육체의 아찔한 변화를 느꼈다.

“대낮부터 이러면 곤란해, 데안. 체통을 지켜야지.”

“……당신한테 그런 소리 들으면 억울합니다.”

“자업자득이야. 네가 먼저 날 자극했잖아.”

“물 좀 뿌린 거랑 지금 이거랑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흐음, 글쎄.”

첼루나는 그럴싸하게 둘러대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로 힘을 낭비할 시간에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얄미운 신랑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서 장난처럼 키스했지만, 이제 그녀는 슬슬 솟구치는 솔직한 욕망을 느꼈다.

첼루나는 아예 데아론의 목을 껴안았다. 데아론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그러당겼고, 숨결은 농밀하게 섞였다.

“그런데, 꼭 상관이 있어야 해?”

한참 서로 달콤하게 맛본 후에 첼루나가 속닥였다. 데아론은 항복을 선언했다.

“그럴 리가요.”

핑계야 나중에 만들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입을 맞췄다. 원래는 건전해야 할 대낮에, 청춘답게.

두 번째 생에야 얻어 낸 신혼여행은 밤낮으로 뜨거웠다.

난생처음 바닷가를 방문한 첼루나는 해변이 실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바닷물은 차갑고 짰으며,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매서웠다.

게다가 모래는 어쩜 이렇게 성가신지, 아무리 털고 또 털어도 계속해서 떨어졌다.

하지만 첼루나의 불만은 크지 않았다. 그 불만조차 함께 나눌 사랑스러운 사람이 곁에 있었기에.

낮에 잠시 물놀이를 하다가 씻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실내로 복귀한 신혼부부는 해가 진 후 저녁에 다시 해변으로 나왔다.

“저도 이런 건 처음입니다. 얘기만 들어 봤어요.”

호위들이 그러모은 유목(流木) 무더기를 지켜보며 데아론이 말했다.

호위병은 솜씨 좋게 유목에 불을 붙인 뒤 윗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물러났다.

빛바랜 나무를 휘감은 모닥불은 모닥불이되, 첼루나는 처음 보는 모닥불이었다.

그녀가 아는 불꽃은 대부분 주황빛이 섞인 적색 계열이었으나, 오랫동안 물속에서 소금에 절인 목재는 녹색과 청색이 섞인 불을 일으켰다.

첼루나는 돗자리 위에 쪼그려 앉아 알록달록한 화염을 신기하게 구경하다가, 아픈 기억이 떠올라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실래요? 제가 불을 지피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아론은 전생의 데아론이었다.

첼루나가 끝까지 미움받는 공주였을 때, 데아론이 연인을 살리기 위해 그녀와 함께 도망쳤을 때.

죽기 전날의 마지막 밤, 데아론은 치열한 도주 끝에 녹초가 된 첼루나를 동굴로 옮기고 본인은 능숙하게 모닥불을 지폈다.

그건 사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었다. 어두운 숲속에서 모닥불의 불빛은 지나치게 눈에 띈다.

만약 추격자가 그때 따라잡았다면 어둠 속에서 환히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표적의 위치를 가늠했을 터.

데아론은 이를 알면서도 모닥불을 지폈고, 첼루나 역시 이를 알고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평소 그답지 않은 무모함이 첼루나의 체온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한 간절한 조치임을 그녀도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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