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아론은 마음이 철렁했다. 설마 나랑 첼루나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었던 건가? 그간 나도 모르는 사이 은연중에 아이를 차별했나?
마음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결단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적어도 자기 자식들은 첼루나와 자기처럼 고통받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제 어미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또는 사생아라는 이유로 각각 경멸당하며 살았던 외로운 소녀와 소년.
엘리야도 필리아도 조엘도 어떤 식으로든 그런 아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특히 엘리야는 입양아라는 사실이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랐었다.
“아뇨, 그건 아닌데, 훌쩍! 곧 다른 동생이 태어나니까…….”
엘리야는 울먹울먹 해명했다. 눈가에 그득 고인 물기가 통통한 뺨을 흥건히 적셨다.
“그러면, 흑, 앞으로는 필리아가 조엘이랑 새 동생이랑 놀아 주면 되니까 저는, 훌쩍, 필요 없어질 줄 알았어요.”
사이좋은 세 남매가 네 남매로 늘어나면 하나는 불청객이 되어 빠져 줘야 할까 봐, 그리고 그 불청객이 자신이 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데아론은 재차 탄식했다. 그가 엘리야를 와락 안았다. 엘리야는 서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빠의 품이 익숙하고 따스해서 꼬물꼬물 파고들었다.
“엘리야, 왜 네가 필요 없어져. 나랑 네 어머니랑 동생들은 늘 네가 필요해.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쓸모’는 모르겠지만 ‘필요’는 있었다. 이 작은 온기와 폭신한 살결이 필요했다. 아버지, 라고 옹알옹알 부르는 앙증맞은 입술이 필요했다.
그 어떤 이해타산의 무정한 계산에 따라 어린아이에게 특수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소중하고 기꺼워서 품에 두고 싶었다.
“새 동생이 태어나면 네 명이 같이 놀면 되는 거야. 앞으로는 필리아가 너를 도와서 큰애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네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야.”
이토록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너를 어찌 부정할까. 그저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지난 세월을 어찌 다 없앨까.
지난 8년간 네가 갓난아이일 때부터 연인과 함께 너를 아들 삼고 애지중지 길렀다. 친자식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첫아이라 가장 소중한.
“그러니까 아무 데도 안 가도 돼. 네가 가기 싫으면 가지 마, 엘리야.”
“지, 진짜요? 아무 데도 안 보내요?”
“안 보내. 네가 가고 싶을 때만 보낼 거야.”
“힝, 가기 싫어요.”
“그럼 가지 마.”
데아론은 아이의 쌔근대는 몸을 쓰다듬고 작은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럼 제 친부모님은, 그분들은 어디 계세요?”
아이가 속삭였다. 앞으로도 사랑하는 가족과 쭉 함께할 수 있다는 안도 외에도 여전히 궁금증은 있었다.
“그분들은 돌아가셨단다. 너무 일찍 하늘나라에 가셨어. 그래서 나랑 네 어머니가 너를 키우게 된 거야.”
데아론은 다정하게 거짓말을 읊조렸다. 철저한 기만이었다.
엘리야의 친모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기에 죄책감으로 명치끝이 쑤셨다. 그래도 그는 영영 함구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네 부모님도 네가 새로운 가족이랑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실 거야. 그분들도 진짜고 너랑 네 어머니도 진짜란다. 진짜랑 가짜랑 구분할 필요 없어.”
애초에 진짜 가족이란 뭐고 가짜 가족이란 뭘까. 확실히 핏줄 따위는 기준이 아닐 것이다.
버림받은 공주였던 첼루나와 경멸받던 사생아 데아론은 그렇게 믿었다. 그들은 혈연을 초월한 사랑을 주기 원했다.
“너는 내 진짜 아들이야, 엘리야 텔로아 포렌타인.”
데아론은 조곤조곤 단언했다. 그 고백이, 그 약속이 엘리야의 어린 마음에 남아 있던 의심과 불안의 잔재를 전부 녹였다.
“흑…….”
아이는 다만 울었다. 데아론은 엘리야를 끌어안고 상냥하게 다독였다.
아이가 통통하게 부은 눈으로 다시 잠들 때까지 토닥임은 이어졌다.
따스한 밤이었다.
첼루나는 마지막으로 딸을 낳았다. 첼루나가 직접 낳은 아이 중에 최초로 밤하늘 같은 흑발에 황금색 눈이 아니었다.
아이의 이름은 넬리카, 해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제비꽃색 눈을 가진 존재였다.
아이는 축복 가운데 태어나 축복 속에서 자랐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예상대로 첼루나는 출산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녀는 넬리카를 낳고 나서 한참을 앓아누웠지만, 주변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로 겨우 회생했다.
특히 데아론은 거의 본인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아내의 병간호에 매달렸다. 보다 못한 황제가 대공을 협박할 정도였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네 동생 멱살을 잡아서라도 병상에서 좀 떨어트리라고.”
“제가 대체 뭘 어떻게 합니까? 다 큰 성인의 사지를 묶어 두기라도 할까요? 아니면 목구멍에 음식을 물리적으로 쑤셔 박게요?”
“왜 안 돼? 정 급하면 머리라도 한 대 쳐.”
“그러다가 진짜 죽습니다. 쇠약해진 환자의 머리를 치라니, 그게 황제가 할 소립니까?”
“하, 젠장, 미치겠네. 첼루나 걔는 왜 이렇게 몸이 약해서…….”
“……분명 괜찮아지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리안은 텔레스의 앙상해진 손을 잡고 나직이 타일렀다. 그렇게 말하는 모리안 본인도 동생 내외를 향한 걱정 때문에 안색이 파리했다.
텔레스는 푹 꺼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동생 내외가 나란히 저승길에 오를 가능성도 심히 걱정됐지만, 동생 혼자 죽고 데아론만 남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다가 데아론 걔, 내 아버지처럼 되는 거 아니야?’
사랑하는 황비가 난산 끝에 숨이 멎자 죄 없는 첼루나를 잔혹하게 괴롭혔던 선황이었다.
하물며 데아론 텔로아는 그 쓰레기 황제와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지고지순한 남자 아닌가. 만약 첼루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니야, 안 돼. 첼루나는 괜찮을 거야. 그렇고말고.’
텔레스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이런 식으로 하나뿐인 동생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첼루나와 황태후 외에는 더 남은 가족도 없었기에, 더더욱.
아버지는 씁쓸한 기억만 남긴 채 죽었고 오라비는 제 손으로 사실상 살해했고 어머니와는 늘 서먹했으니, 제발 동생만이라도.
여러 사람의 절실한 기도가 통했나 보다. 아니면 성녀는 정말로 신의 축복이라도 받은 걸까.
첼루나는 남들이라면 아마 죽었을 정도의 열병을 앓고도 끝내 건강을 회복했다.
“……리카.”
“루나? 루나! 정신이 들어?”
“넬리카. 내 딸 어디 있어…….”
며칠 만에 처음 정신을 차린 첼루나는 가장 먼저 딸의 이름을 불렀다.
데아론은 아내가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토라질 겨를도 없이 기쁘고 기뻐서 아이처럼 울었다.
“애는 건강해. 우리 애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정말 예뻐. 바로 만나게 해 줄 수 없는 점 미안해. 혹시라도 균이 감염될까 봐…….”
데아론은 울면서도 성실하게 설명했고, 첼루나는 흐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남편의 얼굴에 제대로 집중했다.
“많이 상했네.”
첼루나가 중얼댔다. 그녀는 데아론의 야윈 뺨을 툭 건드리더니, 힘겹게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꼭 안았다.
“사랑해, 데아론.”
첼루나가 속닥였다. 죽다 살아난 이때도, 아니, 죽다 살아난 이때라서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나도 사랑해, 첼루나.”
데아론은 흐느꼈다. 이어, 사랑하는 사람의 꺼칠하지만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결코 마지막 입맞춤은 아니었다.
* * *
두 흑발 꼬마는 요람에 누워 옹알대는 자그마한 핏덩이를 심각하게 내려다보았다. 필리아가 먼저 운을 뗐다.
“이상하게 생겼어.”
“쭈글쭈글해…….”
“너무 작아.”
“그래도 조엘 너보다는 귀여운데.”
“뭐라고? 아니야!”
다섯 살 조엘이 울부짖었다. 새로운 서열 꼴찌보다 못났다는 평가를 듣는 게 어지간히 충격인 모양이었다.
두 남매가 별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하는 사이, 의젓한 장남은 맞은편에 서서 경건한 자세로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갓난쟁이 넬리카는 구슬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큰오빠를 올려다보더니 불현듯 배시시 웃었다.
“아우.”
아기가 정체불명의 옹알이를 흘리며 조약돌처럼 자그마한 주먹을 휘휘 저었다. 엘리야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었다.
“아…….”
엘리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신각신하던 필리아와 조엘도 우뚝 멈추고 돌아보았다.
넬리카는 포동포동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엘리야의 손가락 하나를 꼭 쥐었다. 아홉 살 남자애도 아직 작았지만, 태어난 지 몇 주 된 아기는 훨씬 작았다.
“꺄아.”
넬리카가 방싯대며 엘리야의 손을 잡아당겼다. 엘리야는 말없이 울컥했다.
“막내가 큰오빠를 좋아하나 보네.”
옆에서 지켜보던 첼루나가 흐뭇하게 미소했다.
필리아와 조엘은 흡사 동생에게 배신당한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본인들이 먼저 아기의 외모를 트집 잡았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잊었다.
“엘리야, 네가 한번 안아 볼래?”
“네?”
“어떻게 안는 건지 보여 줄게. 한번 안아 보렴.”
첼루나는 꼼지락대는 막내딸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엘리야에게 내밀었다. 엘리야는 떨리는 동작으로 팔을 뻗었다. 옆에서 데아론이 그를 도와주었다.
“팔을 이렇게 하고, 머리를 여기 이렇게……. 그래, 그렇게 지탱하면 돼.”
첼루나는 조곤조곤 지시하며 딸의 무게를 온전히 아들에게 넘겼다. 엘리야는 뻣뻣하게 긴장한 와중에도 나름 안정적인 자세로 동생을 감쌌다.
“잘하네.”
첼루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맏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리야는 기쁘고 뿌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필리아와 조엘은 이제 엄마한테도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필리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경쟁심을 불태웠다.
“어머니, 저도 안아 볼래요!”
“너는 아직 몸집이 작아서 안 돼, 필리아. 아직도 이렇게 가뿐히 들리잖아?”
“꺄악!”
데아론이 필리아를 번쩍 들어 올리자 아이는 다시 정신이 팔렸다. 조엘은 자기도 들어 달라며 아빠를 졸랐고, 그사이 첼루나는 맏이와 막내에게 집중했다.
“어때, 동생 귀엽지?”
“네, 정말 귀여워요.”
“너도 이 나이 때는 이만큼 귀여웠어. 이만큼 작고.”
“진짜요?”
“그럼, 진짜지. 사실 지금도 귀엽지만.”
첼루나는 엘리야의 금색 머리에 입을 맞췄다. 더는 이곳에 없는 사람한테서 물려받은 금발, 죄짓고 떠난 피붙이의 흔적. 이제는 첼루나가 사랑하는 아들의 특징이었다.
“너도 넬리카도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
첼루나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엘리야는 아까 동생이 자기 손가락을 잡았을 때처럼 울컥했다. 첼루나가 생긋 웃었다.
“물론 필리아랑 조엘도, 그리고 네 아버지도.”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고 한 사람한테만 사랑받던 외톨이 공주가 지금은 삶에 사랑이 충만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공주는 언니를 황제로 만든다』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