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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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빨리 커서는.’

고작 여덟 살에, 훨씬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나이인데. 섭섭한 게 있으면 섭섭하다고 마음껏 말할 수 있는 때거늘.

데아론은 마음에 걱정과 자책을 덕지덕지 묻힌 채 공작 저에 도착했다.

급한 마음에 미리 기별을 넣지도 않았기에,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한 집사는 화들짝 놀랐다.

“둘째 공자님?”

작위가 공작으로 승격되면서 데아론을 향한 호칭도 바뀌었다. 데아론은 본론부터 내던졌다.

“엘리야가 여기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안내해 주겠어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집사는 정중히 데아론을 안내했다. 그는 외투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뒤따랐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는 공작 저였다. 원래 후작 저였던 이곳은 데아론에게 황궁만큼이나 껄끄러운 곳이었다.

차라리 황궁이 훨씬 나았다. 그곳에는 첼루나의 공주 시절에 함께 나눴던 추억이나마 곳곳에 녹아 있으니.

그러나 이곳에서 데아론은 외로운 기억뿐이었다.

어머니를 그리고 나중에는 첼루나도 그리며 혹 자신이 계모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죽이곤 했다.

그런즉, 만약 지금이 다른 상황이었다면 데아론은 저택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불편한 티를 팍팍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겨를조차 없이 그의 온 정신은 아들에게 쏠려 있었다.

“이 방입니다. 가장 최근에 확인했을 때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도련님을 깨울까요?”

“아니, 깨울 필요 없어요. 나 혼자 들어갈게요.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공자님.”

집사는 꾸벅인 뒤 조용히 물러났다. 데아론은 다급한 마음으로, 실제로는 아이가 깰까 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작은 얼굴과 단정한 금발을 보고 데아론은 안도로 한숨지었다.

데아론은 조용히 문을 닫고 살금살금 침대에 다가갔다. 아이의 나직한 숨소리가 고르게 울려 퍼졌다.

“하…….”

데아론은 아이가 깰까 봐 조심하던 것도 잊고 가늘게 한숨지었다.

‘진짜, 진짜 다행이다.’

아이가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혼자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한 건 아닐까, 질 나쁜 인간들이 아이가 귀한 집 자식이라는 걸 알아보고 납치한 건 아닐까, 온갖 비관적인 상상으로 속이 뒤집혔었다.

데아론은 맏아들을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동그란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아이는 새근새근 잘만 잤다.

아이의 방에서 나온 데아론은 필연적으로 공작을 만났다.

집사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온 공작은 살짝 숨이 가쁜 채로 아들을 마주했다.

“데아론.”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죄송합니다. 아이가 깨면 바로 데리고 돌아가겠습니다. 혹시 그때까지만 머물 방을 내어주실 수 있나요?”

“아이는 바로 데리고 돌아갈 필요 없다. 엘리야가 황궁에 가고 싶어 하더군. 그래서 내가 폐하께 말씀드렸어.”

“아. 폐하께서는 시간이 언제 되신대요?”

“당장 내일은 어렵고, 내일모레 오후에 오라고 하셨어.”

“그럼 그때까지 호텔에 방을 잡으면 되니 일단 내일—”

“나갈 필요 없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기 있어라.”

공작은 다소 다급하게 청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데아론은 거북한 눈빛이었다.

“부인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공작 부인은 여전히 데아론을 싫어했고, 이에 대해 데아론도 공작도 할 말은 없었다.

데아론은 자신을 향한 공작 부인의 혐오가 어느 정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태어났으니 자기가 계모한테 죄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기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자격은 없었다.

특히 공작 본인은 입이 열 개라도 핑계조차 꺼낼 수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장본인이었으니.

자신은 그저 아내와 정략혼으로 맺어졌을 뿐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다고, 그가 평생 마음에 품은 사람은 제비꽃색 눈을 가진 어떤 여인뿐이라고, 그렇게 변명할 수 없었다.

“여긴 그 사람뿐 아니라 내 집이기도 하다. 내 손님으로 여기 묵도록 해. 아이에게 눈치 주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공작은 뚝뚝하게 받아쳤다. 데아론은 내심 놀랐다.

“엘리야를 신경 써 주시는 겁니까?”

그 아이가 태어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던 분께서. 공작은 덤덤히 부연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정말 뻔뻔하다는 건 알지만, 너랑 엘리야가 여기 며칠 묵는다고 해서 내 아내의 마음이 지금보다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다. 반면에 너랑 엘리야를 내보내면 아이는 상처받겠지.”

와, 당신이 뻔뻔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군요.

데아론은 하마터면 비꼴 뻔했지만, 꾹 참았다. 그리 말하는 공작의 표정이 너무 지쳐 보여서.

데아론은 새삼, 자신도 공작도 여기 아버지로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런 부분에서 공감대가 형성된다는 게 불쾌하기도 했고 묘하기도 했다.

또한, 그 사실은 데아론의 마음을 평소보다도 유하게 녹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 신세 지도록 하겠습니다.”

데아론은 정중히 아뢰더니, 이윽고 덧붙였다.

“그리고 방은 엘리야와 같이 쓰고 싶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데아론이 태생부터 귀족이었다면 절대 상상도 못 했을 양육 방식이었다. 아이와 솔직한 대화가 필요할 때 아이와 같은 침실을 쓰는 건.

귀족은 품위와 체면을 중시했고, 어릴 적부터 아이를 강하게 키웠다. 그게 과연 진실로 강한 건지는 확언이 어려웠지만.

부모 개개인의 성격과 각 집안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어리광을 실컷 부리며 자라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예절과 존칭과 자립심을 먼저 길렀다.

아이와 같은 방을 쓰겠다니, 그건 지극히 평민다운 육아 방식이었다. 아니, 그냥 데아론의 어머니다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데아론의 모친은 어린 아들이 토라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으면 슬그머니 같은 침대에 누워 눈물을 닦아 주곤 했다.

그런 견고한 애정이 오늘날의 데아론을 만들었다. 춥고 외로웠던 어느 공주를 구원한 다정한 남편, 그리고 자상한 아버지.

“그래, 맘대로 하렴.”

공작은 떨떨한 표정이었으나, 결국 순순히 허락했다.

서른 살 먹은 아들의 육아 방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훈수 두는 것도 우스웠거니와, 설령 데아론이 더 어리고 미숙했더라도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하여, 데아론은 그날 밤 아들 옆에서 잠들었다.

물론, 그전에 집에 전언을 보내 엘리야를 무사히 찾았다고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출 소동은 그럭저럭 마무리되었다.

엘리야는 한밤중에 눈을 떴다. 원래는 밤에 자서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데, 어제는 이른 저녁에 잠드는 바람에 시간이 이상하게 꼬였다.

“우웅.”

엘리야는 찌뿌둥한 눈을 비비며 뒤척뒤척 돌아누웠다가 깜짝 놀라 졸음이 싹 가셨다.

“으엑?”

옆에 아빠가 있었다. 아버지가 왜 여기 계시지?

당황한 엘리야가 바스락바스락 허둥대자 데아론은 그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엘리야……?”

“아, 아버지?”

“엘리야, 너 진짜.”

데아론도 금세 졸음이 다 가셨다. 데아론은 엘리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년은 움츠렸다.

데아론은 엘리야를 와락 안았다. 아빠의 뜨뜻한 품속에서 아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때문에 나랑 네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응?”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는 없지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알겠지?”

“네…….”

“엘리야.”

데아론은 아이를 살짝 밀어냈다. 소년의 금빛 속눈썹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왜 그래?”

데아론은 부드럽게 물었다. 그건 추궁이 아니라 다정한 염려였다.

“흐윽.”

엘리야는 울컥했다. 여덟 살 꼬마의 마음은 아직 여리고 여렸다. 듬직한 아빠가 그토록 자상하게 물어보자, 아이는 울 수밖에 없었다.

“흐윽, 흑,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니까. 엘, 요즘 무슨 속상한 일 있었니? 나한테 뭐 말하고 싶은 게 있어?”

“흑, 훌쩍! 그게…….”

“말하기 싫으면 안 말해도 돼. 하지만 나랑 네 어머니는 가능하면 알아내고 돕고 싶어. 말해 줄 수 있니?”

“……제 친부모님, 훌쩍! 제 친부모님을 찾고 싶었어요.”

“뭐?”

데아론의 심장이 싸하게 식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냈지? 보랏빛 시선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걸 보고 어린이는 한층 서러워졌다.

거봐, 역시 나는 버림받을 거야. 매우 비약적인 논리였지만, 여덟 살짜리 아이에겐 꽤 타당성 있게 들렸다.

“비밀로 해서 죄송해요. 그런데 최근에 하인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 입양아라고…….”

“……그래서. 혹시 네 친부모가 누군지도 들었어?”

“아니요, 흑! 그것까진 몰라요. 그냥 제가 방계 황족이라고만 들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입양했다고…….”

데아론은 저도 모르게 안도로 탄식했다. 자기가 폐황자 소생이라는 걸 알아낸 건 아니구나.

하긴, 그 진짜 진실은 전국에서 오직 극소수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인들에게 새어 나갈 만한 비밀은 각색된 진실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데아론의 눈빛이 보기 드물게 싸늘해졌다.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고용주의 가정사에 대해 아무 곳에서나 떠드는 게 고용인의 미덕일 리 없거늘.

‘한번 싹 솎아 내야겠네.’

보랏빛 눈이 광물처럼 번뜩였다.

아마 첼루나에게 말하면 그 애가 알아서 다 정리해 줄 것이다. 첼루나는 그런 면에서 매우 무자비했다.

한편, 가여운 소년은 아빠의 탄식과 차가워진 눈빛을 완벽하게 오해했다. 통통한 아랫입술이 처량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흑, 아버지, 저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

“뭐?”

“제발 쫓아내지 마세요. 제가, 흑! 앞으로 더 잘할게요. 필리아랑 조엘이랑 더 열심히 놀아 주고 편식도 안 할게요. 다른 부모님이랑 살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

“엘리야, 그런 생각은 한 적도 없어.”

데아론은 적잖이 충격받았다. 아이가 어째서 쪽지 한 장만 남기고 그토록 갑작스레 사라졌는지 이제야 짐작이 갔다.

동시에, 끔찍한 죄책감이 들었다.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니, 응? 나랑 네 어머니가 너한테 다른 곳에 가서 살라고 할 줄 알았어?”

맹세코 데아론은 엘리야에게 그런 식으로 압박을 준 적 없었다.

그는 입양아와 친자식을 차별한 적 없었고, 엘리야를 맏아들로 여겨 똑같이 사랑했다.

또한, 첼루나도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엘리야를 덜 아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사람은 본인의 흠을 잘 보지 못하는 법이라, 아무리 자신은 상대방을 사랑으로 대했어도 그 상대방이 달리 주장하면 어느 쪽이 참인지 증명할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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