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14)

공작은 엘리야의 생모를 딱 두 번 만나봤다. 마냥 가녀린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협박과 회유에 이끌려 황실 암투에 휘말린 힘없는 평민 여성이니 움츠리는 게 당연했고, 겁에 질려 반쯤 정신을 놓아 버려도 이상할 건 없다고 공작은 생각했다.

하지만 여인은 의외로 침착했다. 대범했다고나 할까.

신경이 잔뜩 곤두선 표정으로 제 아랫배를 끌어안은 여인은 병자처럼 창백했으나, 텔레스 편에서 블레논에 대해 증언하는 순간에도 비교적 평정을 유지했다.

양쪽으로 그런 피를 이어받았으니 여덟 살 꼬마가 떡잎부터 심상치 않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출을 해?’

공작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새삼, 어릴 적 참 모범적으로 자라 준 모리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데아론도.’

공작이 데아론을 아들로 받아들인 건 그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니 그전에 데아론이 어떤 아이였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이 경험한 데아론의 양육도 굉장히 쉬운 편이었다.

한창 민감할 사춘기에 엄마를 잃어 삐뚤어질 만도 했건만, 데아론은 끝까지 강인하고 선량하게 자라 주었다.

물론, 강인함이나 선량함보다도 그가 천덕꾸러기 취급에 너무 위축되어 감히 사고를 치지 못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공작의 명치끝이 아릿하게 울렸다. 뒤늦은 후회는 이토록 모두에게 덧없는 상처만 남겼다.

“곤란하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알현을 청할 테니, 도련님은 저와 함께 입궁하시어 폐하를 뵈면 될 것 같습니다.”

“저, 정말요? 할아버지가 직접 그렇게 해 주실 건가요?”

“그럼요. 다만 당장 내일 알현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매우 바쁘신 분이거든요. 그러니 당분간 도련님은 제 집에서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리죠.”

“앗, 하지만 저는 짐을 하나도 안 챙겼는데요. 갈아입을 옷도 없어요.”

“제가 황녀 전하께 연락을 넣겠습니다. 도련님이 앞으로 얼마간 제 집에 머물 거라고 말씀드리고 여벌 옷 등을 보내 달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엘리야는 진정한 감사와 약간의 의아함을 섞어 인사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 제게 상당히 유한 할아버지의 태도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소년의 그런 의문을 알아채고 속으로 쓰게 웃었다.

소년은 나름대로 자신이 속마음을 잘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노회한 공작의 눈에 어린이의 표정은 투명한 유리나 다름없었다.

‘내가 또 잘못하고 있었구나.’

공작이 처음부터 엘리야의 존재를 꺼렸던 건 사실이었다.

그는 폐황자의 핏줄을 살리겠다는 공주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법적으로는 손자인 아이가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였다는 사실이 떨떠름했다.

그래도 아이는 죄가 없다는 일말의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 그는 최대한 아이를 부드럽게 대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텔로아 공작은 애초에 다정다감한 행동이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무뚝뚝한 큰아들이 누구를 보며 그렇게 컸겠는가.

무릇 어엿한 가장이라면 근엄하게 품위를 지켜야 마땅하다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 그를 방해했다.

그의 다정한 작은아들처럼 아이들과 함께 손에 흙을 묻히며 놀아 준다는 개념은 이 꼿꼿한 노인의 머릿속에 도저히 입력될 수 없었다.

그런 엄숙한 태도와 아이를 향한 기본적인 반감이 맞물려 공작을 참 무섭고 어려운 할아버지로 만들었다.

‘내가, 또…….’

지금 겁먹은 새끼 여우처럼 기민하게 자기 눈치를 살피는 자그마한 소년을 보고 공작은 탄식을 되삼켰다.

인간은 정녕 발전이 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그가 이제 너무 늙어서 머리가 굳어 버린 걸까.

해를 거듭할수록 제게서 멀어지는 둘째 아들을 바라보며 나중에는 이러지 말자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서럽게 되뇌었거늘.

공작은 엘리야의 모습에 데아론을 겹쳐 보았다.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버지와 아들이었지만, 그 둘이 현재 공작의 눈에는 똑같아 보였다.

“그럼 어서 가시죠, 도련님.”

공작은 의식적으로 온화한 저음을 냈다. 그가 조심스레 엘리야에게 손을 뻗었다.

소년은 그 손을 끔뻑끔뻑 바라보다가, 작고 말캉한 손을 내밀어 크고 주름진 손을 맞잡았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함께 치안소를 나섰다. 공작가의 화려한 마차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운전을 시작했다.

“도련님, 도련님도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 오늘 이렇게 집을 나오셨겠죠. 하지만 앞으로는 부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어른들과 먼저 상의하십시오. 혼자 사라지시면 황녀 전하와 텔로아 경이 걱정하십니다.”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공작은 최대한 부드럽게 소년을 타일렀다. 엘리야는 살짝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쪽지를 남겼는걸요.”

차마 저 울먹울먹한 눈빛에 대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쏘아붙일 수 없었다. 공작은 입 안에서 한숨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도련님, 부모는 자식이 먼 곳에 떨어져 있으면 걱정하기 마련이랍니다.”

제가 진짜 자식이 아니어도요? 엘리야는 혀끝까지 치민 질문을 꿀꺽 삼켰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엘리야는 얌전히 대답하는 걸로 상황을 일단락했다.

공작도 딱히 더는 할 말이 없었고, 본래 수다스럽지 않은 할아버지와 별로 말할 기분이 아닌 손자의 조합은 하염없는 침묵을 불렀다.

노인과 소년은 마침내 공작 저에 도착했다. 이때쯤 엘리야는 다시 혼절 직전이었다. 아까 치안대에서 얻어먹은 초콜릿 음료의 효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졸려.’

졸리고, 배고프고, 심지어 살짝 추웠다.

엘리야는 품위를 잊고 길게 하품했다. 귀족과 황족 아이들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 추태였지만, 공작은 융통성 있게 눈감아주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자네, 아이를 손님방에 데려가게. 그리고 주방에는 따뜻한 음료를 준비하라고 전달해.”

“음료 말고 음식……. 배고파요.”

공작이 집사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말을 듣고 옆에서 엘리야가 혼미하게 웅얼댔다.

평소였다면 절대 그렇게 토를 달지 않았겠지만, 여덟 살짜리의 심신은 한계에 이르렀다.

“……따뜻한 음료가 아닌 따뜻한 수프를 요청하도록 해.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도.”

“네, 공작 각하.”

집사가 꾸벅였다. 그는 반쯤 꾸벅꾸벅 조는 소년을 데리고 가장 좋은 손님방으로 향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도련님. 수프와 잠옷을 가져오겠습니다.”

“네.”

예바른 소년은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깨끗한 아동용 잠옷이 금세 준비되었고, 소년은 고분고분 옷을 갈아입었다.

“도련님, 수프입니다.”

시녀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 수프를 들고 나타났다.

일순 허기가 졸음을 이겼다. 엘리야는 눈을 반짝 뜨고 숟가락을 집었다.

‘아, 살 것 같아.’

배가 따뜻하게 부르자 나른한 만족감이 아이를 감쌌다. 이제 더는 정말 버틸 힘이 없었다.

그나마 딱 양치를 마칠 정도로만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엘리야는 푹신한 침대에 스르르 엎어졌고, 순식간에 잠들었다.

소년이 잠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아론이 도착했다.

마을에서 수도까지는 역마차로 반나절이 걸렸다.

즉, 데아론처럼 능숙한 기수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말을 몬다면 그보다 훨씬 빨리 수도에 도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들보다도 먼저 수도에 도착한 데아론은 아이의 인상착의와 들어맞는 목격담을 찾아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그는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금발 꼬마가 거리에서 울다가 치안대원에게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가 울고 있었다는 사실에 데아론은 마음이 찢어졌다. 그러나 당장은 비애와 혼란보다 아이의 행방에 대한 의문이 더 컸다.

“텔로아 공작 각하께서 아이를 데리고 떠나셨습니다. 한 40분 전에요.”

“아버지께서?”

수소문 끝에 접촉한 치안대장의 조심스러운 보고를 듣고 데아론은 안도와 새로운 불안감으로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아버지가…….’

데아론은 제 아버지가 엘리야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치 빠른 아이가 그 사실을 이미 낌새챘다는 것도.

‘피가 안 섞였으니 어쩔 수 없나.’

데아론의 명치끝이 씁쓸하게 쑤셨다. 단지 입양아라는 사실만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엘리야의 친부는 죽은 폐황자, 공작이 모시는 주군이자 첫째 며느리의 숙적이었으니.

그런 이유로 엘리야의 존재 자체가 꺼림칙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 티를 적어도 아이 앞에서는 잘 감춰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평소에는 연기력도 참 뛰어나신 분이.’

뼛속까지 정치가인 텔로아 공작은 능구렁이 같은 가식이 주특기였다. 그 능력으로 아이를 거짓으로나마 잘 달래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물론, 설령 공작이 정치판에서는 잘만 통하는 가면으로 손자를 대했더라도 엘리야가 과연 넘어갔을지 데아론은 의문이었다.

‘아이들은 원체 기민하니까.’

순진하고 단순하여 어른들이 복잡하게 꼬아 놓은 참과 거짓을 오히려 쉽게 꿰뚫어 보는 게 아이들이다.

상대방이 거짓으로 노력한다면 소년은 오히려 더 상처받을지도. 데아론은 푹 한숨지었다.

‘육아는 어려워…….’

그는 최근에야 조금, 아주 조금은 과거 아버지의 차갑고 서툰 태도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기른다는 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양아들 포함, 무려 세 명의 자식을 둔 아빠가 되고 나서 데아론이 뼈저리게 깨달은 진리였다.

아무리 완벽한 부모가 되고 싶어도 원래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자꾸만 놓치는 게 생겼다.

예컨대 데아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왜 엘리야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가출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근에도 늘 평소처럼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나랑 루나가 뭘 섭섭하게 했나?’

그런데 그거랑 황궁에 가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엘리야가 남기고 간 쪽지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황궁에 그 애가 투정 부릴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는 황제와 대공을 어려워했다. 만약 부모님이 자신을 서운하게 했다 한들 이모와 이모부에게 하소연하러 갈 가능성은 적었다.

엘리야와 친한 레니안 황태자가 있었지만, 또래보다 조숙한 엘리야는 일곱 살 레니안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나름 맏형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동생들을 섬세하게 돌보는 소년이었다. 저보다 한 살 아래인 황태자에게 푸념할 성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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