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에 가야 해. 황궁에…….’
일이 생각보다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돌아설 수는 없었다.
실제로 돌아설 방법도 적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집에 어떻게 가.’
여기까지는 온갖 철면피를 동원해 어떻게든 마차를 타고 왔다고 치자. 돌아가는 길에까지 똑같은 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목표대로 황궁에 무사히 도착하면 귀갓길에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설마 명색이 폐하의 조카를 맨몸으로 돌려보내겠어? 차비든 마차든 내어주겠지.
‘그리고, 진짜 궁금하단 말이야.’
내 친부모가 대체 누군지. 그것만큼은 허기조차 밀어내지 못한 궁금증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아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친아들이 될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갈 곳이 생길 테니까.
‘동생이 또 태어나면, 떠나야 할지도 모르니까…….’
엘리야의 삶에는 오랫동안 동생이 둘뿐이었다.
조엘이 태어나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으니 사실 태초부터 세 남매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난다. 그러면 남매는 세 명에서 네 명이 되는데, 어린아이의 덜 여문 머리로는 그 변화를 차마 침착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이가 네 명이나 필요 없을 수도 있잖아.’
여덟 살배기의 계산에 따르면, 처음부터 남매는 늘 세 명이었고 그런즉 세 명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인데 거기서 한 명이 더해지면 균형이 깨진다.
그러니 다시 균형을 맞추려면 한 명이 나가야 하고, 필리아와 조엘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 동생은 ‘진짜’ 자식이니 나갈 이유가 없다.
‘나가기 싫어.’
그런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엄마 아빠가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그러니 그런 날을 대비해, 그는 친부모를 찾아야 했다.
“……흑.”
배고프고, 지치고, 수도는 너무 넓고. 무엇보다, 여덟 살 꼬마는 사무치게 외로웠다.
웬 꼬맹이가 길 한복판에서 처량하게 울기 시작하자 행인들은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곧 수군거림이 일었고, 누군가 다가왔다.
“애야, 길을 잃었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행인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치안대원이었다. 어른의 태도는 상냥했으나, 엘리야는 그저 서러운 마음에 더 크게 울었다.
“아이고, 이런.”
치안대원이 탄식했다. 어른은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엘리야는 낯선 어른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만고의 가르침을 떠올렸지만, 너무 힘들고 슬퍼서 이 상황을 막지 못했다.
흐느끼는 꼬마를 치안소로 데려온 치안대원은 혹시 최근에 아동 실종 신고가 들어온 게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동료 치안대원은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그 치안대원이 아이에게 물었다.
“애야, 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부모님 성함이 어떻게 되셔?”
사실, 치안대원은 이미 나름의 각오를 마친 뒤였다.
소년은 딱 봐도 귀한 집 자식이었다. 입고 있는 옷의 재질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카락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 소년의 입에서 어떤 엄청난 가문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자고 평민 치안대원은 미리 되뇌었다. 그런데.
“제 아버지 성함은, 흑, 데아론 텔로아고 제 어머니는, 훌쩍! 첼루나 포렌타인이에요.”
그 가녀린 답변을 듣고, 치안대원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텔로아 공작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빴다.
어느덧 거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는 아직도 정정하게 가문의 일을 책임지는 노장이었다.
그런 분주한 나날도 조만간 끝나기는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문을 잇기 위해 데려온 조카에게 작위를 물려주기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고 있었다.
그날도 그저 그런 나날의 연속이었다. 치안대에서 뜬금없이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치안대장은 미치도록 황송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저 하급 귀족 출신으로 하루하루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던 그는 자신이 여태 이토록 가까이서 마주한 최초의 고위 귀족 앞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무려 황제와 황녀를 둘 다 며느리로 둔, 그야말로 황실과 겹사돈을 맺은 집안의 수장이었다.
게다가 공작의 두 아들은 각자 황족 아내의 뒷바라지만 한 게 아니라 본인들이 각자 현 황제의 옹립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런 사람에게 자기들이 당신 손자를 데리고 있다고 연락을 넣을 때 얼마나 떨리던지.
가장 떨리는 부분은, 그나마 이게 가장 무난한 선택지였다는 점이었다.
‘아이의 조부모가 아니면 삼촌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도저히…….’
소년은 황녀의 아들이라고 했다. 입양아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아들이었다. 즉, 황제가 소년의 이모라는 뜻이었다.
‘적어도 공작 각하는 황궁 밖에라도 계시지.’
그저 매일매일 자잘한 민원을 처리하고 경범죄를 방지하며 살아온 소박한 치안대원들이었다. 개중에 대체 누가 황궁에 발이나 들여봤을까.
그들은 결국 아이의 조부를 가장 편안한 상대로 골랐고, 그 ‘편안한’ 상대가 무려 공작이라는 사실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엘리야 도련님은 어디 계시죠?”
공작은 치안대장의 겁먹은 태도를 비웃거나 연민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본론을 꺼냈다.
여덟 살짜리 아이를 두고 높임말이라니, 얼핏 보면 우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실은 이게 당연한 법도였다.
엘리야는 원래 혈통이 어떻든 간에 황녀의 아들, 즉 피붙이로 인정받았다.
황실과 혼인으로 이어졌을 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공작은 그 귀하신 어린애한테 감히 하대할 수 없었다. 법적 부모인 데아론과 첼루나만 예외였다.
‘게다가 실제로 원래 혈통이 황실 핏줄이지.’
공작은 엘리야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극소수에 속했다.
처음 폐황자의 아이가 수태되었다고 들었을 때, 공작은 자기 큰아들과 마찬가지로 낙태를 강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모가 출산을 원하는 이상 데아론은 그 당연함에 극구 반대했다.
임부 본인이 낙태를 원했다면 모를까, 데아론은 강제로 태아를 긁어내겠다는 자기 형과 아비를 꽤 괴물 취급했다.
공주도 데아론의 편이었고, 결국 언니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텔레스는 이복오빠의 아이를 죽이지 않고 동생에게 넘겼다.
‘……물렀다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공주, 아니, 황녀였다.
때로는 소름 끼치게 악독하고 냉정하면서 막상 보면 한없이 물렁하다.
하여튼, 절대 황제감은 아니었다. 첼루나 포렌타인은 제 오라비와 언니에게는 있는 결정적인 비정함이 늘 부족했다.
‘본인이 그걸 알고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성녀 이미지로 힘을 얻은 공주가 뒤늦게 자신도 제위를 차지했다고 설쳤더라면 언니 측은 그녀를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는 물렁한 만큼 현명했다. 어쩌면 가장 약삭빨랐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제위를 노려 봤자 개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음을 알고 언니와 오빠와 겨루는 대신 그중 하나를 주군으로 삼았다.
덕분에 그녀는 텔레스 측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텔레스 본인도 동생을 꽤 예뻐하게 되었고.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텔로아 공작은 여전히 첼루나를 생각하면 뚱해졌다.
만약 데아론이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이렇게까지 꺼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퍽 우습게도, 꽤 뻔뻔하게도, 무의식중에 까다로운 시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 아들이 훨씬…….’
아까운데.
그러나 그는 속으로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절대 입 밖으로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사생아 둘째에게 사랑보다는 상처를 더 많이 준 아비였다. 이제 와서 그 아이가 선택한 여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불평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거슬렸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치안대장은 정중히 고했다. 그는 서둘러 이 거물을 자기 시야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공작은 치안대장의 안내를 받아 넓고 쾌적한 방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소년이 있었다.
“하, 할아버지?”
그새 울음을 겨우 그치고 치안대원이 준 초콜릿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던 엘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리야 도련님을 뵙습니다.”
공작은 깍듯이 인사했다. 엘리야는 우물쭈물 그 인사를 받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아버지. 그간 안녕하셨나요?”
조부와 손자가 서로 뻣뻣하게 존대하는 이 숨 막히는 현장을 치안대장은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작은 그 불쌍한 기색을 알아차렸다.
“나는 도련님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네, 공작 각하.”
드디어 탈출의 기회를 잡은 치안대장은 재빨리 사라졌다. 공작은 복잡한 표정으로 법적 손자를 돌아보았다.
“제 사저로 모시겠습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나요?”
“네, 거기서 하룻밤 묵으시고 내일 다시 출발하시죠. 사람을 시켜 도련님 집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갈 곳이 있어요.”
“갈 곳이요?”
“황궁에 들러서 황제 폐하를 뵙고 싶어요. 안 될까요?”
엘리야는 또랑또랑하게 요청했고, 공작은 진심으로 당황하여 아이를 쳐다보았다.
“황궁이요?”
그렇다면 이 아이가 뜬금없이 수도에 혼자 나타난 건 황제를 만나기 위함이란 말인가? 왜?
“황녀 전하와 텔로아 경은 도련님의 황궁 방문 의사를 아십니까?”
공작이 집요하게 되물었다. 엘리야는 즉각 소심한 표정이 되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쪽지를 남기기는 했어요.”
달랑 쪽지 하나 남기고 가출한 황녀의 아들이라니. 만약 길에서 소년이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그건 국가적 차원의 재앙이었을 거다.
공작은 머리가 몹시 아팠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도련님이 굳이 내일 당장 황제 폐하를 뵙고 싶으신 이유요.”
공작은 최대한 침착하게 질의를 이어갔다.
사실, 지금쯤 난리가 났을 자신의 아들과 둘째 며느리를 생각하면 이렇게 차분하기 어려웠다.
“아직은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죄송합니다.”
소년은 퍽 당돌하게 말했다. 공작은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쭈뼛쭈뼛 제 눈치를 보는 듯싶다가도 제법 앙큼하게 받아치는 태도가 어찌 보면 천연의 황족이었다.
‘핏줄은 숨길 수 없다는 건가?’
죽은 블레논 폐황자도 어릴 적부터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비록 여러모로 흠 많은 놈이긴 했지만, 확실히 그 정도 비범했기에 황위 쟁탈전의 최종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생모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