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14)

“시장이요, 도련님?”

“네. 어머니께 선물을 사드리고 싶거든요. 최근에 임신하시고 나서 많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엘리야는 살짝 의기소침하면서도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고, 이로써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낯짝만큼은 인성과 다르게 몹시 훌륭했던 생부를 닮아서일까. 반짝이는 금색 눈과 금발 머리를 가진 소년은 천사처럼 예뻤다.

그런 그가 의젓하게도 엄마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얼마나 깜찍하고 대견한지, 감동한 유모는 거의 울먹였다.

“그리고 되도록 깜짝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유모랑만 몰래 다녀올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고요.”

“그럼요, 도련님. 언제 다녀오실래요?”

“음, 내일 당장?”

어른은 미끼를 덥석 물었고,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상대방을 살살 구슬렸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세 남매의 가정환경은 자유분방한 편이었고, 첼루나와 데아론은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강박적인 부모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 가정교사와의 수업 시간을 잘 지키는 이상 부모는 아들딸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각자 여덟 살, 여섯 살, 네 살인 꼬마들이 자유 시간에 뭔가를 해 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기껏해야 동산에 나가 노는 게 전부인 애들이었다.

엘리야는 부모의 방심을 이용했다. 자신이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유모는 부모님께 자신의 외출 사실을 알리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말 잘 듣고 어른스러운 엘리야 도련님이 설마 한시적 가출을 계획하고 있음을 유모는 꿈에도 모를 테니.

그 결과, 엘리야와 유모는 다음 날 단둘이 시장에 나왔다.

“유모, 저 음료수 마시고 싶어요.”

장터에 진입한 엘리야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유모는 의심 없이 근처 음료수 가게로 향했고, 지갑을 꺼내느라 엘리야의 손을 놓았다.

엘리야는 바로 뛰지 않았다. 유모가 동전을 세는 사이 소년은 슬쩍 움직였고, 거리가 적당히 벌어지자 휙 뒤돌았다.

엘리야는 산토끼처럼 민첩하게 땅을 박찼다. 워낙 북적북적한 장터라 웬 꼬맹이가 휙휙 지나가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역마차를 타야 해.’

엘리야가 가족과 함께 수도로 갈 때는 황녀의 개인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다른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중요한 건 들키지 않는 건데…….’

엘리야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짤막한 다리는 역마차 매표소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역에 가까워지자 은은한 구린내가 났다. 마차를 끄는 말들과 마차 바퀴에 달라붙은 진흙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였다.

흙과 동물 냄새가 익숙한 시골 어린이 엘리야는 주저 없이 다가갔다. 그는 매표소 앞에서 멈췄다.

‘마차를 타려면 표가 필요한데.’

미성년인 엘리야는 혼자 표를 살 수도 없었거니와, 평소에 아랫사람에게 지갑을 맡겼기에 현재 돈도 없었다.

엘리야는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을 열심히 관찰하다가, 곧 눈을 반짝였다.

‘저기다!’

대가족이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지, 두 남녀가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표를 사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금발이었다.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

엘리야는 금발 대가족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곳도 장터만큼이나 사람이 북적여서 꼬마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빠로 추정되는 사람이 매표소 옆 문지기에게 표를 보여 주었다. 그사이 엘리야는 아이들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제발 통해라.’

엘리야는 한 번도 역마차를 타본 적 없지만, 짧은 가출을 준비하면서 며칠 전에 사전 조사를 마쳤다.

제국의 역마차 표에는 열두 살 이하의 승객 숫자가 명시되지 않았다.

열두 살 이하 승객이 세 명 미만이면 추가 금액 얼마, 세 명 이상 일곱 명 미만이면 추가 금액 얼마, 이렇게 얼추 표시될 뿐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요,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되지 않는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는 작아서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굳이 다 셀 필요 없이 추가 금액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논리였다.

문지기는 표에 찍힌 금액을 확인했고, 너덧 명씩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을 힐긋 살폈다. 엘리야는 혹시 몰라 고개를 수그렸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문지기가 표를 돌려주며 선선히 문을 열자 표를 돌려받은 남자가 쾌활하게 말했다. 엘리야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엘리야는 무리에 파묻혀 열린 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들을 살피려고 돌아보기 전, 잽싸게 다른 쪽으로 도망쳤다.

‘수도, 수도로 가는 마차…….’

엘리야는 주르륵 줄지어 출발을 기다리는 마차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각 마차의 노선을 표시하는 딱지가 보였다.

엘리야는 수도로 향하는 마차 중 사람이 가장 많고 특히 이미 어린애를 태운 마차를 골라 훌쩍 올라탔다.

승객이 많고 자기 외에도 아동 승객이 있으면 원래는 제게 쏟아졌을 시선이 분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엘리야에겐 다행으로, 마차에 오른 다른 아이는 뭔가 인생에 큰 불만이라도 있는 듯 쉼 없이 칭얼대는 중이었다.

“힝, 나도 그거 갖고 싶어, 나도 사 줘…….”

“어허,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이제 그만 좀 울자, 응, 뚝.”

엄마로 추정되는 젊은 여인은 훌쩍이는 남자애를 달래느라 바빴다.

어린이의 징징거림이 계속되자 곳곳에서 묵언의 눈총이 쏟아졌고, 엄마는 아이를 어르면서도 다른 승객들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엘리야도 또래의 찡찡대는 목소리가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조숙한 소년는 아이의 엄마를 향한 연민 또한 느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그 찡찡거림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들 은근히 짜증을 참느라 바빠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다른 소년에게는 나눠 줄 관심이 없었다. 엘리야는 그 사실을 충분히 만끽했다.

곧, 마차가 출발했다. 처음치고는 꽤 순조로운 가출이었다.

첼루나는 차라리 제 귀를 의심하고 싶었다.

“엘리야가 사라졌다고?”

아이가 시장에서 실종됐다니?

반쯤 정신이 나간 큰아들의 유모를 뒤로하고 첼루나는 슬슬 무거워지는 몸을 재촉했다.

데아론이 먼저 엘리야의 방에 도착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아버지, 어머니, 황궁에 다녀오겠습니다. 바로 돌아올게요. 엘리야 드림.]

“황궁?”

데아론은 동글동글한 필체를 쳐다보며 아득하게 중얼댔다. 첼루나는 창백해졌다.

“애 혼자서 무슨 수로 황궁에 가?”

그리고 대체 왜?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공포만큼이나 그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이 첼루나를 괴롭혔다.

<어머니, 황태자 전하가 보고 싶어요. 언제쯤 다시 뵐 수 있나요?>

아이의 질문이 메아리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이조차 첼루나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고작 사촌 동생이 보고 싶어서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고?’

엘리야가 레니안 황태자와 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인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말로 사촌이 그리도 절박하게 보고 싶었다면 왜 쪽지에 이유를 명시하지 않았을까? 마치 숨기고 싶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것처럼.

“그건 나중에 애부터 찾고 물어보자.”

데아론이 악물린 잇새로 말했다. 그 역시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나는 당장 역마차부터 뒤질게. 루나 너는 황궁에 전언을 좀 보내 줘.”

“알겠어.”

데아론의 다급한 지시에 첼루나는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굳이 데아론이 역마차부터 수색하겠다는 건지 첼루나는 논리적으로 짐작했다.

여태 엘리야가 가족과 함께 수도에 갈 때는 전부 개인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니 마차는 소년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의 교통수단일 테고, 개인 마차가 아니라면 역마차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너는 집에서 기다려, 루나.”

데아론은 빠르게 중얼거린 뒤 아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입술을 물었다. 만약 그녀도 임신으로 동작이 굼뜨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남편과 함께 말에 올랐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소식을 기다리는 것만큼 피 말리는 일도 없었다. 첼루나는 그 기다림이 일찍 끝나기를 기도했다. 부디 좋은 쪽으로.

마을에서 수도까지는 역마차로 반나절이 걸렸다. 즉, 엘리야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배고파.’

어린아이는 혼미하게 생각했다. 오전에 집을 나와 점심을 건너뛰었으니 배고플 만도 했다.

몸에 힘이 빠지자 정신도 각박해지면서 처음에는 충만했던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어른들을 속이고 마차에 무사히 탑승했을 때는 자신의 훌륭한 전략에 뿌듯함을 느꼈는데, 이제 그는 계획의 다음 단계를 실천하기도 전에 지쳤다.

‘집에 가고 싶어…….’

마음이 약해졌다. 기실 여덟 살짜리의 끈기라는 건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행동력은 분명 뛰어났으나 아직 지구력이 부족했다.

“애야,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역에서 기다리신다고 하지 않았니?”

옆에서 다른 승객이 친절하게 물었다. 반나절 동안 엘리야와 나름 말을 튼 승객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그 다른 승객의 의지였다. 엘리야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처음에는 다른 아이에게 관심이 쏠렸다 해도, 반나절 내내 투명 인간으로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소년이 보호자도 없이 혼자 마차에 탔다는 사실은 명백해졌고, 어른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가장 상냥한 옆자리의 어른에게 엘리야는 최대한 순진무구한 얼굴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버지와 함께 수도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역에서 착오가 생겨서 자기는 아버지보다 늦게 마차를 타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다른 마차를 타고 출발하셨다, 등등.

엘리야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그러나 상냥한 어른은 여덟 살 꼬마의 답변에서 애초에 대단한 논리성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른은 아이의 횡설수설을 인자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아이의 진술이 과연 맞았는지 확인하고자 재차 대화를 시도했다.

“네, 여기 어딘가 계실 거예요.”

엘리야는 천진하게 둘러댔다. 그러더니, 상대방이 미처 한마디도 덧붙이기 전에 냅다 뛰었다.

“어머, 얘야!”

어른이 자신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야는 이를 깔끔히 무시하며 악착같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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