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14)

그녀는 첫째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끝까지 숨길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여섯 살 어린아이를 상대로 자신이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었을 뿐.

엘리야가 좀 더 크고 나면 데아론과 함께 아이에게 진실을 차분히 설명할 생각이었다. 물론, 각색된 진실을.

엘리야의 친부가 자살을 강요당한 폐황자라는 사실은 죽는 날까지 함구할 생각이었다.

그 비밀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 영원히 지켜야 마땅했다.

엘리야를 위해 마련된 공식적 진실은 그가 황가의 먼 친척이며 갓난아기 시절에 부모를 여의어 첼루나의 아들로 입양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정도면 아이가 그럭저럭 받아들일 만한 내용이기를 첼루나도 데아론도 간절히 바랐다.

방계 황족이면 어쨌든 첼루나의 핏줄이니, 자신이 혈연적으로 지금 가족과 생판 남이라고 절망할 근거는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그게 절망할 만한 일인가? 첼루나도 데아론도 각자의 경험에 근거해 다소 삐딱하게 생각했다. 핏줄이 그렇게 중요해?

첼루나는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친언니가 친오빠의 죽음을 명하는 걸 봤고, 데아론은 친형과 친부에게 사랑보다 상처를 더 많이 받았다.

그깟 혈통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중요한 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었고, 부부는 큰아들을 진정 사랑으로 키웠다.

그러니 괜찮을 거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매번 그런 생각으로 부부는 폭로의 때를 미뤘다. 엘리야가 여덟 살이 되는 오늘날까지.

엄마가 세 번째 동생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날, 엘리야는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침대에서 뒤척이며 초조하게 곱씹었다.

‘어머니가 동생을 가졌을 때는 그렇게 안으면 안 되는데.’

쓸데없이 조숙한 여덟 살짜리의 번뇌였다. 그는 조엘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댔다.

‘말해 줘야 하는데, 못 말해 줬어…….’

아무리 엘리야가 영리한 소년이라도 두 살 때의 기억을 간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두 살 때 데아론이 제게 소리쳤던 걸 잊고 살았다.

하지만 어떤 순간은 의식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아도 무의식에 단단히 각인되는 법이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는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엘리야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스스로 출처를 기억하지도 못하는 학습된 강박이었다.

‘함부로 만지면 동생이 다쳐.’

그런데 왜 어머니도 아버지도 오늘 조엘을 막지 않았지?

조엘이 엄마의 무릎에 앉아 촐싹거릴 동안 데아론은 다른 아이들과 놀아 주느라 바빴고, 첼루나는 조심하는 티를 내면서도 조엘을 밀어내지 않았다.

‘……조엘은 친자식이라서 괜찮은 건가?’

그런 거야? 엘리야의 금색 눈에 물기가 글썽였다.

‘나도 친자식 하고 싶다.’

나도 어머니 아버지 친척이 아니라 친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소년은 작게 훌쩍였다.

첼루나도 데아론도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때를 미뤄왔을 뿐. 그러나 엘리야는 이미 최근에 알아냈다.

<엘리야 도련님 좀 봐, 머리카락 색 진짜 예쁘지 않아? 난 저런 금발 부러워.>

<그런데 왜 저 도련님만 금발이지? 황녀 전하는 빨간 머리고 텔로아 경은 흑발이잖아.>

<너 그거 몰라? 엘리야 도련님은 입양아잖아. 원래 방계 황족이었다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몇몇 입 가벼운 하인들의 소곤거림을 엿들은 대가로 엘리야는 너무 큰 고통을 알아 버렸다.

그날 엘리야는 혼자 잠든 척하며 숨죽여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 멀쩡하게 행동했다. 영특한 첼루나와 노련한 데아론이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이번에 새로 태어날 동생도 친자식인 거겠지. 부럽다…….’

소년은 습기가 반짝이는 눈가를 손등으로 처량하게 닦았다.

눈물을 잘 닦고 잠들어야 아침에 일어나도 괜찮은 척 연기할 수 있었다. 똘똘한 소년은 이미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내 친부모님은 어떤 분들일까.’

엘리야는 고민했다. 그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 그 이상은 몰랐다.

자기 친부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누구한테 물어보지?’

그의 의문은 단지 피붙이를 향한 반사적인 궁금증 이상이었다.

엘리야는 엄마 아빠가 친자식이 아닌 자기에게 언젠가 질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럴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마련하고 싶었다.

‘친부모님이 최소한 누군지는 알아야 나중에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갈 수 있어.’

적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잖아. 아니, 알아야만 해. 여덟 살이면 이미 다 컸는걸.

‘어떻게든 알아내자.’

조숙하고 명민한 소년은 훌쩍임을 그치고 진지하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세 번째 동생을 임신했으니, 그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친부모님의 생사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만약 친자식이 두 명에서 세 명으로 늘어나면 내가 더는 필요 없어질지도 몰라. 그게 엘리야의 주된 두려움이었다.

아이가 엄마 배 속에 머무는 건 아홉 달. 그러니 그에게는 총 아홉 달의 시간이 있었다.

사실 태아가 수정되고 나서 첼루나가 임신 사실을 털어놓기까지의 시간도 계산해야겠지만, 어린아이의 단순한 사고는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다.

소년에겐 퍽 서글픈 밤이었다.

엘리야는 양부모님을 제외하고 제 친부모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누구한테 여쭤봐야 하지?’

사실 이상적인 정답은 처음부터 뻔했다. 똘똘한 소년은 단순하고도 정확하게 유추했다.

‘방계 황족이라고 했으니까, 황족들을 가장 잘 아시는 분께 여쭤보고 싶어.’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정답일 뿐, 그리 현실적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체 폐하께 어떻게 여쭤보지……?’

아무리 어린애라도 황제가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은 폐하의 동생인 황녀의 법적 아들이니 남들보다 훨씬 쉬울지는 모르겠으나, 여덟 살짜리 어린애에게 황제는 무척 아득한 존재였다.

게다가 엘리야는 자신이 친부모에 대해 알아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버지와 어머니께 숨기고 싶었다.

황제를 만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어머니께 여쭤보는 걸 텐데, 소년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폐하와 몰래 얘기하고 싶은데.’

만약 황제가 자신이 사는 집을 방문한다면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고 황궁에 가신다든가.

실제로 황제는 이전에 동생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첼루나와 데아론도 가끔 맏아들을 데리고 입궁한 적이 있기에 엘리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무참히 무산되었다. 엘리야가 미처 계산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바로 제국의 보수적이고 유난스러운 풍습이었다.

“어머니, 황태자 전하가 보고 싶어요. 언제쯤 다시 뵐 수 있나요?”

엘리야는 저보다 한 살 어린 레니안 포렌타인의 각별한 놀이 친구였다. 일곱 살 레니안은 사촌 형을 거의 숭배하듯 졸졸 따라다녔다.

엘리야는 사촌이 그리운 척하며 어머니께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러자 첼루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글쎄, 엘리야. 아마 네 동생이 태어난 뒤에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네?”

그렇게 늦게? 하지만 동생이 태어난 뒤에는 너무 늦는데. 엘리야가 하얗게 질리자 첼루나는 그 이유를 오해하고 달래듯 설명했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내가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거든. 그리고 이 집에 손님을 받기도 어려울 거야. 필리아랑 조엘이 태어날 때도 그랬단다.”

제국의 관습은 임부의 거동을 과하게 제한했다.

유산을 조심하는 차원 외에도 태중의 아이가 부정을 탈 수 있다는 미신이 더해진 결과였다.

하여, 첼루나가 엘리야의 첫째 동생과 둘째 동생을 임신했을 때도 저택에는 방문객이 차단되다시피 했다.

첼루나에게 임신이 버거운 기억으로 남은 데는 그런 갑갑함이 한몫했다.

만약 데아론이 없었다면 그녀는 따분함과 중압감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지금보다도 어렸던 엘리야는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소년은 낙담했다.

“그럼 그때까지 황궁에는 못 가는 거예요?”

“동생이 태어나면 폐하께서 방문하실 거야. 그때 황태자 전하도 함께 오실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엘리야.”

그럼 자기 혼자라도 황궁에 보내 줄 수 없냐고 엘리야는 묻지 않았다.

제국에서 어린이는 보호의 대상이었고, 부모와 동반하지 않고서는 먼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엘리야는 그 방법 또한 껄끄러웠다.

‘아버지는 어머니랑 같이 있고 싶어 하실 텐데.’

여덟 살 꼬마가 보기에도 엄마에게 지극정성인 아빠가 거동이 불편하고 다른 대화 상대도 거의 없는 엄마를 두고 황궁에 갈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눈치 빠른 엘리야는 아버지가 황궁 방문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궁에는 대체로 인자하지만 살짝 무서우신 황제 폐하와 귀여운 황태자 전하 외에도 대공 전하가 계셨는데, 대공 전하는 엘리야의 숙부였다.

‘두 분이 예전에 싸웠나?’

숙부면 자기 아버지와 형제라는 뜻인데, 동생들과 마냥 사이가 좋은 엘리야는 어째서 아빠와 대공 전하가 늘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서로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심지어 둘은 겉모습도 되게 닮았다. 아빠는 눈이 보라색이고 대공 전하는 눈이 초록색이지만 다른 부분은 거의 쌍둥이 수준이었다.

누가 봐도 같은 핏줄이고 서로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리 서먹할까. 알쏭달쏭한 일이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

엘리야는 진지하게 결론지었다. 총명하지만 아직 순진한 어린이의 머리로는 어른들의 복잡한 과거를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어쨌든, 엘리야는 굳이 엄마도 없이 아빠 혼자 그 불편한 황궁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황궁에 찾아갈 수도 없으니, 난제였다.

‘……왜 혼자 못 가는데?’

영특한 아이는 서서히 발상의 전환을 시작했다. 첼루나도 닮고 죽은 블레논도 닮은 눈동자가 잠시 반짝였다.

‘생각해 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여덟 살 어린이에게 어딜 가든 부모님과 함께 이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연한 생각의 틀을 한 번 깨고 나자,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엘리야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답게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 없이 오직 목표에만 집중하니 방법은 의외로 다양했다.

시작 단계는 가장 쉬웠다. 첼루나의 배가 슬슬 불러오기 시작하는 어느 날, 엘리야는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저 시장에 다녀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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