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14)

“루나.”

데아론이 부드럽게 불렀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첼루나는 남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어떡할래? 낳고 싶어?”

데아론의 태도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아내의 임신을 무작정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여럿 있었다.

일단, 첼루나 본인이 누누이 세 번째는 없을 거라고 옛날부터 습관처럼 말하고 다녔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강렬했다. 임신은 버거웠고 출산은 끔찍했다.

아무리 결과적으로 만나게 된 아들딸이 사랑스럽다 해도 과정 자체가 물리적으로 고통스럽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각자 체질에 따라 출산 과정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첼루나는 확실히 순풍 체질은 아니었다.

그녀는 두 번의 출산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텔레스 언니도 황태자를 난산하면서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루이사는 그나마 순탄한 편이었고 아델라는 기적적으로 순조로웠다. 아델라의 경험담을 들을 때마다 첼루나는 질투를 느낄 지경이었다.

게다가 올해 첼루나의 나이 서른, 내년 초에 산달이 되면 서른한 살이다.

당대 인간의 평균 수명을 계산했을 때, 노산에 가까웠다.

“……몰라. 좀 생각해 보고 싶어.”

첼루나는 폭 한숨지었다. 그러다 곧 음울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아마 말만 이렇게 하고 낳게 될 것 같아.”

왜냐하면, 낙태 수술도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니까.

아이를 낳든 안 낳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낳으면서 목숨 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첼루나는 그새 모종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자신과 남편을 골고루 빼닮은 소중한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나 동산을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것.

상상만으로도 귀여웠다. 첼루나는 복잡한 기분도 잊고 헤벌쭉 웃을 뻔했다.

이미 아이를 셋이나 키워 봤기에 아기가 얼마나 귀여운지, 자식이 쑥쑥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얼마나 뿌듯한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뭐, 내가 키웠다기보다는 유모들이 거의 다 했지.’

첼루나가 아이를 낳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또 다른 이유였다.

만약 그녀가 아이도 키우고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각박한 상황이었다면 그런 느긋한 상상 따위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 황녀로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아이를 키우며 도움이 필요할 때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뭐든 네 기준으로 결정해. 아이를 낳는 건 너니까.”

데아론이 엄숙하게 당부했다. 첼루나는 생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데아론. 나는 원래도 모든 걸 내 기준으로 생각했어.”

다정하고 정의로운 데아론과 달리 첼루나는 이타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참 못되고 영악한 공주였지.

이기적인 그녀의 삶에 유일한 예외였던 데아론조차 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었다.

데아론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서, 행복할 수 없어서, 첼루나는 이 세상에서 온전히 살아가기 위해 데아론을 택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첼루나의 한때 삭막했던 삶을 풍성하게 꾸몄다.

세 남매의 순수한 사랑이 그녀를 지탱했으므로, 그녀는 기꺼이 목숨 바쳐 그들을 지킬 수 있었다.

“알잖아, 나는 늘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거.”

첼루나는 달게 속삭이며 데아론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남편의 입술을 소중히 머금었다.

“그래서 지금 너랑 이러고 있는 거지.”

네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서 이렇게 고집스레 독점하고 있으니까. 본인의 행복을 위한 최상의 선택이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너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그 결과가 이런 거라면 대환영이야.”

데아론이 생긋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독점욕이 오롯이 자기를 향한다는 사실이 그를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사실, 나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은데.”

그가 농밀하게 중얼대며 첼루나의 목에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냈다.

“안에 아이가 있다니까, 당분간 참아야겠네.”

“……살살 하면 문제없잖아. 우리 필리아랑 조엘 때도 할 건 다 했는걸?”

“그때 나이랑 지금 나이랑 다르잖아. 조심해야지.”

“쳇, 이러니까 내가 갑자기 확 늙은 느낌이야.”

“에이, 늙은 건 아니지. 그냥 아이 낳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일인 걸 어쩌겠어.”

첼루나는 폭 한숨지었다. 데아론은 본인의 아쉬움을 삼키며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일단 좀 더 생각해봐. 어차피 낳게 될 것 같다고 해도 고민하다 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오래 고민도 못 할걸.”

임부가 고민하는 중에도 태아는 배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을 것이다. 일정 기간을 지나면 낙태가 불가했다.

“애들한테는 일단 비밀로 할까?”

“……비밀로 하자.”

“그런데 또 필리아 때처럼 되면 어떡해.”

“필리아 때, 뭐?”

“네가 임신한 줄 모르고 엘리야가 달려들었잖아.”

첼루나를 처음 임신했을 때였다. 당시 집에 아이라고는 두 살이 채 안 된 엘리야뿐이었다.

이제 막 걷고 뛰고 꼬물꼬물 돌아다니느라 바빴던 아기 엘리야는 여느 때처럼 엄마에게 안아 달라며 마구 매달렸다.

아직은 잘록한 첼루나의 허리를 포동포동한 팔로 꼭 안으며.

<엘리야, 떨어져!>

데아론은 날카롭게 외쳤다. 안 그래도 아직 초보 아빠였던 그는 아내의 첫 임신을 두고 신경이 꽤 곤두선 상태였다.

<지금은 엄마 안으면 안 돼. 앞으로도 당분간 안으면 안 돼, 알겠지?>

아이를 휙 낚아채듯 안은 데아론은 다급히 설명했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깜짝 놀랐는지 엘리야는 눈을 똥그랗게 뜬 채 얼어붙었다.

<지금 엄마 배 속에 네 동생이 있거든. 몇 달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좀만 참자, 엘리야.>

뒤늦게 평정을 회복한 데아론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아이를 조곤조곤 달랬다. 엘리야는 작은 고개를 알겠다며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필리아가 태어날 때까지 엘리야는 자발적으로 첼루나 근처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아들을 직접 부를 때에나 조심스레 다가갈 뿐이었다.

나중에 첼루나가 조엘을 임신했을 때, 엘리야는 필리아가 엄마에게 아장아장 다가가는 모습을 보이자 화들짝 놀라며 동생을 콱 끌어안았다.

<안 돼, 필리아! 지금 어머니 만지면 안 돼.>

자신이 예전에 아빠에게 붙들린 게 어지간히 인상이 강렬했나 보다.

혹시 자신이 아이에게 상처를 줬나 싶어 데아론은 아직도 미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워낙 옛날이기도 했고 엘리야 본인이 그때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기에 데아론도 서서히 잊어가는 중이었다.

“그냥 내가 알아서 조심할게. 혹시라도 내가 안 낳기로 결정하면 나중에 애들이 충격받을 수도 있잖아.”

꼬꼬마 남매는 아직 임신과 출산, 낙태에 대한 개념을 온전히 이해할 나이가 아니었다.

엄마 배 속에 새 동생이 들어 있다고 막연하게 둘러댔는데 나중에라도 그 동생이 사라진다면 애들이 그걸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첼루나는 일단 폭로를 삼가기로 했다. 만약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정해진다면 그때 털어놓아도 늦지 않으리라.

하여 몇 주 뒤, 결정을 마친 첼루나는 세 남매를 앉혀두고 자신이 그들의 새 동생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우와, 그럼 저도 동생이 생기는 거예요?”

네 살 막내 조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자신이 이 집에서 ‘서열 꼴찌’라는 사실에 늘 슬퍼하던 조엘은 드디어 자기보다 낮은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에 몹시 기뻐했다.

“신기하다! 빨리 만나고 싶어요.”

여섯 살 필리아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조엘이 태어날 때 두 살이었던 필리아는 남동생의 갓난쟁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기 동생이 생기면 무슨 느낌일까, 필리아는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축하드려요, 어머니, 아버지.”

여덟 살 엘리야가 의젓하게 말했다. 첼루나는 엘리야를 보며 생긋 웃었다.

“고마워, 엘리야.”

첼루나는 팔을 뻗었고, 엘리야는 잠시 망설이다가 엄마에게 총총히 다가갔다. 첼루나는 엘리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번 동생은 남자애면 좋겠어, 여자애면 좋겠어?”

“둘 다 좋아요. 하지만 이미 남자애는 저랑 조엘이 있으니까 이번 동생은 여자애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 그렇지? 이번에는 딸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남자애든 여자애든 분명 너희를 닮아서 예쁠 거야.”

첼루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엘리야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엘리야는 수줍은 듯 꼼지락댔다.

“애들아, 앞으로 어머니 말씀 잘 듣도록 해. 어머니 마음이 편해야 너희 동생 마음도 편해지는 거야. 알겠지?”

“네, 아버지!”

“네, 알겠어요.”

“그럴게요, 아버지.”

데아론이 엄중하게 말하자 아이들은 각자 끄덕였다.

막내 조엘은 그새를 못 참고 첼루나에게 쪼르르 달려가 엄마 품에 폭 안겼다.

‘앗.’

엘리야는 무심코 조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엘리야가 동생을 말리기 전, 데아론이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

“새 동생이 태어나면 그 애랑도 이런 식으로 놀아 줘야겠네?”

“으앗!”

아빠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허공에 붕 띄우자 엘리야는 팔을 버둥대며 얼굴을 붉혔다.

데아론은 금세 엘리야를 내려놓았다. 그가 양아들을 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새 많이 컸네, 엘리야. 나중에는 나보다도 커지겠어.”

“제가 아버지보다 더 커질 수도 있어요?”

“그럼. 네가 어른이 되면 분명 훨씬 커질 거야.”

엘리야는 그때를 상상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덟 살 어린이에게 서른 살 아빠가 말한 어른의 때는 미지의 세계였다.

“아버지, 아버지, 저도 들어 주세요!”

“기꺼이, 고귀하신 필리아 님.”

“꺄악!”

둘째가 제 소매를 잡고 조르자 데아론은 여자애도 거뜬히 들어 올렸다.

필리아는 오빠보다도 더 자지러지게 외치며 짤막한 팔다리를 격하게 휘저었다.

엘리야는 조엘을 흘깃했다. 조엘은 여전히 첼루나의 무릎에 앉아 포동포동한 발을 휘휘 흔들고 있었다.

엘리야는 시선을 거두었다.

<어머니, 어머니랑 아버지는 언제 결혼하셨어요?>

<으음, 5년 전에. 네가 한 살 때 결혼했네.>

<제가 한 살 때요? 어떻게 그때 결혼했어요? 제가 태어난 뒤였잖아요.>

여섯 살 엘리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두 남녀가 결혼해서 같은 이불 아래 잠들어야만 아기가 생기는 줄로 알고 있는 순진한 어린이답게.

<……반드시 결혼해야만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란다. 너는 특별해서 그래, 엘리야.>

첼루나는 부드럽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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