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게 구애할 때도 그의 열망은 소년의 첫사랑처럼 순수하고 풋풋한 마음이 아니었다.
공주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리기 위해 이중 첩자를 자처했다.
그토록 비굴하게, 처절하게, 정쟁과 배신과 계략으로 얼룩진 연정을 품었다. 황폐한 첫사랑이었다.
그 연정을 단념한 뒤로 앰벌리의 삶에 그런 식의 낭만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마음속은 시끄럽게 들썩일까.
재혼을 바라지도 않고 바랄 수도 없다고 슬프게 쐐기를 박는 이 여자로 인해.
“당신은요?”
비올레타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새 앰벌리를 ‘대장님’이 아닌 ‘당신’이라고 친근하게 부를 만큼 사이가 가까워졌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 벽이 있었다.
“당신은, 여태 기회가 없었던 건가요? 딱히 아직도 미혼이신 이유가 있나 해서.”
제국에서 비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남자든 여자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대부분 나이가 차면 짝을 찾아 가정을 꾸리는 게 관습이었다.
그런데 이 잘난 남자는, 잘생기고 유능하고 미래도 보장되어 결혼 시장에서 전혀 꿀릴 게 없는 이 남자는, 어째서 지금 이러고 있을까.
“글쎄요. 아직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나 보죠.”
앰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그러다 자신이 무슨 말을 뱉었는지 깨닫고 아차, 싶었다.
“아아, 네.”
비올레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찻잔을 그러쥔 채 시선을 떨구었다.
“그렇군요.”
마음이 맞는 사람이 아직도 없다고. 이로써 대답은 충분했다.
“언젠가는 꼭 좋은 사람을 만나셨으면 좋겠어요.”
비올레타는 다시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진심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앰벌리는 나직이 답했다. 그는 웃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앰벌리는 한동안 비올레타를 만나지 못했다. 황제의 생일을 맞아 각국에서 사절단이 몰려들면서 근위대 일이 한층 바빠진 탓이었다.
또 몇 주가 정신없이 지났을까. 앰벌리는 바쁜 와중에 없는 시간을 쥐어짜 제비꽃 찻집을 찾아갔다.
찻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아, 거기요? 며칠 전에 폐업했잖아요. 사장님이 딸이랑 고향으로 내려가신다던데요. 거기 커피 진짜 맛있었는데, 아쉽게 됐죠.”
찻집 옆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이 재잘재잘 설명했다. 앰벌리는 멍하니 경청했다.
“그런데 그 집 사장님, 남편이 돌아가셨대요. 진즉 사별했다는데, 왜 여태 숨겼지?”
앰벌리는 헌책방 주인의 수다스러운 의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형식적인 인사만 마치고 천천히 돌아섰다.
비올레타는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
해가 바뀌었다. 추운 겨울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으레 그렇듯 끝내 봄에 밀려나는 운명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서른세 살 앰벌리 라크문은 첼루나 황녀의 소식을 주워들었다. 넷째를 임신했다고 했다.
임신 횟수로만 따지면 세 번째였고, 입양아를 센다면 네 번째 아이였다.
첫사랑의 이름을 들었으나 더는 약간의 울렁임도 없었다. 그분이 다른 남자와 얼마나 금슬이 좋은지 거듭 확인받았음에도 심장은 고요했다.
앰벌리는 다른 여자를 생각했다. 그의 기억에 아릿한 흔적으로 남은, 그 흔적을 지울 기회도 주지 않고 떠나간 사람.
생각해 보면, 지금 그가 그리워하는 여자와 한때 그의 마음을 갈증으로 불태웠던 공주는 서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닮았어.’
외모나 지위, 살아온 삶만 비교하자면 두 사람은 물론 정반대였다.
한쪽은 시골 출신 평민 여자, 한쪽은 황제와 황비의 딸.
경제적 여건만 놓고 보면 평민 여자가 황족보다 훨씬 못했으나, 앰벌리가 알기로 비올레타는 어릴 적부터 가족과 이웃에게 사랑받으며 컸다.
반면에 황궁에서 태어나 배곯을 일 없이 길러진 공주는 어린 시절에 지독하게 외로웠다.
앰벌리는 선명하게 기억했다. 버림받은 공주에 대한 경멸 어린 숙덕임을, 혼자 숨어 울고 있던 소녀를.
‘……그때가 처음이었지.’
그때부터 앰벌리는 공주를 미친 듯이 생각했다.
너무나 초라하고 처량하여 톡 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주제에, 우는 모습을 들키기 싫어 눈빛에 표독하게 힘준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런 점이 닮았어.’
평민 과부 비올레타와 황제의 딸 첼루나는 여러모로 정반대였다. 하지만, 몇 가지는 분명 닮았다.
일단, 외모 자체는 서로 확연히 달랐지만 미인이라는 사실은 같았다.
첼루나는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선명한 화려하고 정교한 미인이었다.
성녀다운 순한 이미지를 덧그릴 때를 제외하고는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가 아름답고 쌀쌀맞은 고양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와 달리 비올레타는 전반적으로 서글서글한 인상이었고, 굳이 동물로 비교하자면 고양이보다 강아지를 닮았다.
부드러운 눈매와 싹싹한 미소가 첼루나의 영리함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토록 닮았으면서도 다른 그들의 예상치 못한 공통점은, 바로.
‘빚쟁이들과 맞설 때.’
공주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기사가 이제는 다른 여인에게 온통 사로잡힌 이유는.
‘자기 딸을 보호할 때.’
그들의 다정하지도 유순하지도 않은 사나운 눈빛이 그를 꿰뚫고 흔들어서.
‘분명 무서웠을 텐데.’
애초에 그는 공주의 청순한 가식이 아닌 꿋꿋한 포악함에 처음 끌렸으니까.
‘그래도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화냈어.’
마찬가지로 두려울 때 오히려 이 악물고 반격하는 비올레타의 태도가 그를 빨아들였다.
혼자 가련하게 울던 버림받은 공주와 남들 눈에 만만하게 보이는 평민 과부.
그토록 약한 그들이 보이는 강한 모습에 앰벌리는 속절없이 매혹당했다.
본인도 약한 사람이었기에 공감하고 동경할 수 있는 강함이었다. 지금은 잘나가는 고위 근위병이지만, 한때 그는 이름 없는 평민 고아였다.
그가 자신의 약함을 벗어나기 위해 남들에게 아부하고 검술 단련에 매진할 때 첼루나 공주는 당당하게 신경질을 부렸다.
당시 공주가 학대받는 어린애였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상처받을수록 오히려 가시를 뾰족하게 세우는 행위는 사실 미성숙함의 결과였으나, 앰벌리는 그런 공주의 미성숙함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찌 비난하랴? 그때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훨씬 어렸는데.
이제 첼루나는 더는 어리지 않았다. 멍든 마음을 까칠함으로 포장하는 가련하고 미숙한 습관도 진즉 버렸다.
많이 행복해지고 성숙해진 제 첫사랑을 떠올리며 앰벌리는 하마터면 따스하게 웃을 뻔했다. 그러나 미소는 오기도 전에 사라졌다.
‘비올레타.’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을 곱씹으며 시달렸다.
앰벌리는 비올레타의 고향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고향 마을이 어디인지는 알았지만 정확한 주소는 몰랐고, 무엇보다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어서.
연락처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나간 사람이었다. 자신은 감히 더한 것을 바랄 수 없다며 선을 그은 사람이었다.
그때 바보처럼 침묵하지 말았어야 했다.
당당하고도 자상하게 그녀의 손을 맞잡고 그녀는 충분히 많은 것을 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줄 걸.
하지만 앰벌리는 예로부터 그런 순수한 다정함이 어려웠다.
그의 첫사랑은 워낙 지독하게 시작해서 비참하게 끝났기에 과거 경험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그가 묵묵히 후회하는 사이, 또다시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쌓여 어느새 봄이었다.
앰벌리는 마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봄날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가로수를 뒤덮은 봄꽃과 사람들의 머리에 휘감기는 봄바람.
그의 마음을 제외한 모든 곳에 얼음이 녹고 꽃망울이 영그는 듯했다.
그는 한결같이 무심하게 창밖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돌아서기 직전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고, 무의식이 그를 끌어당겼다.
“잠깐.”
그는 대뜸 뱉었다. 눈앞에 초콜릿처럼 짙고 그윽한 갈색이 아른거렸다.
“잠깐만, 마차 세워!”
마부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앰벌리는 마차에서 허겁지겁 내렸다.
만약 이게 그저 우연이라도, 이 생각보다 좁은 세상에서 우리가 다시 마주치는 게 확률의 장난일 뿐이라도, 그는 기꺼이 붙잡으리라.
우연이든 확률이든 장난이든, 기어이 집요하게 붙들어 기회로 바꾸고 마는 게 인간이니까.
“비올레타!”
항상 차분하고 점잖다는 평을 듣고 매사에 냉정함을 넘어 냉담하기까지 한 앰벌리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헉헉대며 한 사람을 불렀다.
앰벌리의 체통 없는 외침에 주변 사람들이 힐끔대며 수군댔다. 이름이 불린 당사자도 돌아보았다.
“대, 대장님?”
물감처럼 선명한 보랏빛 눈도, 갸름한 얼굴도, 놀라서 눈을 치뜰 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도, 전부 앰벌리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비올레타.”
“대장님이 여긴 어떻게……. 아, 맞다. 원래 수도 주민이셨죠.”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들었어요.”
“네…….”
“지금은? 지금은 왜 돌아왔어요?”
“수도에서 살면서 사귄 친구들이 있어요. 마침 시간이 다 맞아서 잠깐 놀러 왔어요.”
비올레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손끝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파르르 진동하는 손을 감추기 위해 앙다문 주먹을 치마폭에 숨겼다.
“비올레타.”
앰벌리는 다급히 불렀다. 상대방의 가냘픈 떨림을 앞으로는 그냥 두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우리, 차 한잔할래요?”
다음번에는 내가 그 손을 잡아 주리라. 당신이 혼자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끌어안고 움츠리지 않도록.
“이번에는 내가 대접할게요.”
이번에는, 바보처럼 침묵하지 않을게.
“……좋아요.”
비올레타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슬프게, 조심스럽게.
아직은 상대방의 진심을 몰랐기에 그토록 소심하고 서글픈 미소가 최선이었으나, 오해는 영원할 수 없었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날에 훈훈한 차향을 곁들이면, 고백이 조금은 쉬워질 테니까.
또 하나의 나이테가 새겨졌다.
외전 5. 가족 이야기
부부는 초조한 표정으로 진단을 기다렸다. 의사가 마침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황녀 전하, 텔로아 경. 전하께서는 회임하신 게 맞습니다.”
첼루나는 복잡한 표정이 되었고 데아론은 낮게 탄식했다. 침묵에 잠긴 아내를 대신해 데아론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수고해 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혹시 임신 사실은 아직 함구해 줄 수 있나? 나와 전하가 준비되면 직접 공표하고 싶어서.”
“여부가 있겠습니까.”
의사는 공손히 꾸벅였다. 데아론은 의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방에서 내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