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14)

“걱정하지 마세요. 고발자가 없으면 사건이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앰벌리가 싱긋 웃었다.

그는 바닥에서 끙끙대는 남자들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남자들은 신음을 뚝 그치고 두려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제 행동이 과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죠.”

“너 이 새끼, 그걸 알면 왜…….”

“저를 용서해 주시는 대가로 치료비를 보태겠습니다. 사실 별로 다치지도 않았으면서 그냥 엄살 부리는 것 같지만 너그럽게 눈감아드리겠습니다.”

“뭐, 엄살?”

기사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건달들은 잔뜩 억울한 듯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러나 앰벌리의 눈에 연민은 없었다.

‘너희 엄살 맞거든.’

아무리 그래도 황실 근위병인데, 설마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무작정 폭력을 행사했을까.

앰벌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섬세하게 힘을 조절했다. 남자들이 요란하게 쓰러진 것치고는 부상이 너무 심하지 않도록.

실제로 남자들은 타박상과 찰과상으로 그쳤다. 굳이 더하자면 자존심의 상처 정도?

‘내 기준이 너무 높은 것도 있겠지만.’

앰벌리는 순순히 인정했다. 항상 혹독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는 근위대만 보다가 힘 좀 쓴다고 거들먹대는 깡패를 보자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제 명함입니다. 이쪽으로 언제든지 찾아오시면 제가 치료에 필요하신 만큼 돈을 드리죠.”

앰벌리는 차분하게 명함을 꺼내 상대편에게 건넸다. 남자들은 명함을 받기도 전에 그 명함에 적힌 직책을 보고 우뚝 굳었다.

“아, 혹시 필요 없으신가요?”

앰벌리가 다시 웃었다. 그 미소가 남들이 보기에는 사뭇 섬뜩했다.

“아니, 뭐, 필요가 없다기보단…….”

“그, 우리가 높으신 분께 감히, 저, 돈을 뜯어낼 수는 없죠.”

“돈을 뜯어내다뇨? 저는 당신들께 합당한 배상을 약속하는 것뿐입니다만.”

앰벌리의 눈꼬리가 한층 가늘게 휘었다.

이런 상황에서 ‘돈을 뜯어낸다’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걸 보니 저놈들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불 보듯 뻔했다.

“아, 아닙니다, 근위병 나리. 우리가 실수했네요.”

“다시 생각해보니 별로 아프지도 않습니다, 하하하.”

“잠깐만요!”

남자들이 엉금엉금 일어나 재빨리 달아나려 하자 비올레타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들을 붙잡았다.

“지금 나랑 약속 잡아요, 언제 돈 받으러 올지. 다 준비됐다고 내가 말씀드렸죠?”

“아아, 네, 그게.”

남자들이 우물거렸다. 앰벌리는 비올레타를 흥미롭게 흘긋했다. 어느새 평정을 회복한 그녀는 남자들을 당당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나는 떳떳해요. 이번에 돈 내면 빚은 다 갚는 거야. 그러니까 와서 돈 받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요. 알겠죠?”

“암, 그럼요, 아가씨, 아니, 부인. 그렇고말고요.”

“그럼 저희는 언제쯤 찾아가면 될지…….”

이제는 제게 굽신거리는 남자들을 보고 비올레타는 코웃음 쳤다. 경멸에 앞서 씁쓸함이 짙어졌다.

‘이분이 나서지 않았으면 끝까지 나를 만만하게 봤겠지.’

비올레타는 기회를 활용하기로 했다. 아직 저놈들의 두려움이 남았을 때 일을 매듭짓고 지긋지긋한 부채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

“당장 내일 오전은 어때요? 찻집 열리기 전에.”

“그럼요, 물론이죠. 늦지 않게 가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죠, 부인.”

호칭도 껄렁껄렁한 ‘아가씨’에서 깍듯한 ‘부인’으로 바뀌었다.

아가씨는 아랫사람이 귀족 여식에게 붙일 때나 존칭이지, 이런 상황에서 괜히 비꼬듯 꺼내는 건 상대방이 어린 여자라고 얕잡아 본다는 표시였다.

비올레타는 비굴하게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쏘아보았다. 그러다 겁먹은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엄마, 엄마, 무서운 아저씨들 이제 다시 안 오는 거예요?”

아이는 똥그란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표정이 곧장 부드럽게 풀렸다.

“내일 딱 한 번만 오고 다시는 안 올 거야. 그리고 너는 원하면 그 아저씨들 안 만나도 돼.”

“힝, 만나기 싫어요. 무서워.”

“그래, 만나기 싫으면 만나지 마. 많이 무서웠어, 에이미?”

“네. 엄마한테 소리치는 사람 미워요.”

아이가 울먹이자 엄마는 픽 웃었다. 비올레타는 장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양팔로 아이를 훌쩍 안아 들었다.

“이제 안 무서워해도 돼, 에이미. 그리고 그 아저씨들 너무 미워하지 마. 미워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거든.”

“가, 가치?”

“음, 너무 어려운 단어였나? 굳이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사실 불쌍한 사람들이거든.”

“불쌍해요?”

“그럼. 그렇게 남한테 소리치고 험하게 구는 사람은 다 불쌍하고 한심한 사람이란다.”

비올레타는 아이를 어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러더니 문득 빙긋 웃었다.

“반대로 여기 이분은 참 멋있는 사람이지. 남을 도와주는 건 멋있는 일이잖아, 그렇지?”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자신을 빙글 돌아보자 앰벌리는 내심 당황했다. 비올레타는 아이에게 속닥였다.

“에이미, 우릴 도와주신 분한테 뭐라고 인사해야 하지?”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저씨 말고 대장님. 그 호칭이 맞죠?”

“네, 맞습니다.”

비올레타가 저를 보며 묻자 앰벌리는 온화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아까보다 덜 위축된 태도로 옹알옹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앰벌리는 아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진심으로 상냥한 미소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제 찻집에서 음료 한 잔 대접해도 될까요?”

비올레타가 물었다. 은인에게 소소하게 보답하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 외에는 아무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그 눈빛 앞에서 거절을 표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방금처럼 귀여운 어린애의 또랑또랑한 인사 앞에서 진심으로 웃지 않는 게 어려웠듯.

마침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호의에 대한 습관적인 응답이 튀어나왔던 걸까.

“네, 시간 괜찮습니다.”

아니면, 단지 저 사람이 조금 궁금해서였을까.

“그럼 가장 좋은 차로 대접해드릴게요.”

고마운 사람에게 저토록 티 없이 웃을 때는 토끼처럼 온순하면서 아까 건달들을 마주할 때는 들개처럼 흉포하던 모습이 신기해서.

“가방은 제가 들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들게요. 에이미, 이제 내려와.”

“아까 계속 들고 계시느라 피곤했을 텐데 저한테 주세요. 저는 짐이 가벼워서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너무 신세 지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 그래요.”

“그러면 저한테 신세 진 만큼 더 좋은 차로 대접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가장 좋은 차로 대접해 드리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그러면 곤란해요. 차라리 케이크도 추가할게요.”

타협이 끝나자 앰벌리는 비올레타의 장바구니를 들었고, 비올레타는 에이미를 길에 내려놓은 뒤 아이의 손을 잡았다.

“찻집에 오신 적 없으시죠?”

“네, 사실 맛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 봤지만 방문은 처음입니다.”

“그럼 길은 제가 안내할게요. 에이미, 가자.”

그렇게 셋은 같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여자와 남자와 아이,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그게 시작이었다.

계절이 흐르고 시간이 쌓였다.

그동안 대접받은 차와 나눠 먹은 케이크와 선물로 준 커피도 차곡차곡 나이테를 그렸다.

“저, 사실 과부예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가을이었다.

“이 찻집은 사별한 남편과 같이 시작했어요. 정말 초창기부터 함께한 단골들은 아마 그이 얼굴을 기억할 거예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어째서 마음이 술렁였을까.

“타지에 일이 생겨서 잠깐 출타했는데 거기서 사고를 당했지 뭐예요. 그때는 참……,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술렁임의 실체는 안도였다.

“그래도 저한테는 이미 에이미가 있었고, 산 사람은 살아야 했으니까.”

안도, 어쩌면 환희.

“제가 사별했다는 소식은 어쩌다 보니 여기서 계속 감추게 됐어요. 저랑 제 남편 고향에서는 다들 알고 있는데, 수도에서는 어쩐지 밝히기가 꺼려지더라고요.”

당신이 유부녀가 아닌 과부라는 사실을 알아냈을 때 어째서 그렇게 기뻤을까.

당신이 사별로 인해 겪었을 아픔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어차피 이곳은 타향이라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저한테 집적대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제가 남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면 그런 사람들이 더 염치없게 나올 것 같았어요.”

아직은 세상에 비겁한 사람이 많아서, 권력 있는 남성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평민 여성은 멋대로 휘두르려는 자가 넘쳐났기에.

“어쩌다 보니 쭉 거짓말쟁이로 지냈네요. 당신 앞에서도, 계속.”

비올레타는 앰벌리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 미소가 퍽 서글퍼 보인다고 앰벌리는 생각했다.

“여태 재혼할 기회는 없었던 겁니까?”

앰벌리는 저도 모르게 불쑥 질문했다. 말을 뱉고 나자 술렁임이 짙어졌다.

“기회라기보다는, 의지가 없었죠.”

비올레타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러나 앰벌리의 눈에 그녀는 우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어떻게 감히……. 꿈도 안 꿔요. 애 딸린 과부가.”

비올레타가 중얼거렸다. 쿵쿵 뛰던 앰벌리의 심장이 서서히 식었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집안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에이미 키우는 데만 집중하고 싶어요. 다른 건 안 바라요.”

왜 당신만 그렇게 참아야 하냐고, 왜 당신은 다른 것들을 바라면 안 되냐고 앰벌리는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세간의 시선을 잣대 삼아 스스로 끊임없이 선을 그으며 진심을 억누르는 과부 앞에서 앰벌리는 바보처럼 침묵했다.

변명하자면, 그 역시 본인의 마음을 몰랐다. 이 환희의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지. 자기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지.

감히, 제가 이 감정을 실천에 옮겨도 되는지.

나이를 서른둘이나 먹을 때까지 변변찮은 연애 한 번 안 해 본 그가,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그가 감히, 이제야, 이런 뒤늦은 꿈을 품어도 될지.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는 평범한 행복에 대해 잘 몰랐다. 어릴 적 고아가 된 이후로 늘 혼자였고,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악착같이 사투했다.

평민 출신으로 라토르 공작의 눈에 들어 블레논 황자의 기사가 되고 귀족이 될 때까지.

이후 첼루나 공주님을 위해 원래 주군을 배신하고 황녀와 성녀에게 고개 숙일 때도.

그는 늘 계산하며 살았을 뿐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원하는 것을 거머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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