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찻집이라…….’
이름이 거슬렸다. 하필이면 그 꽃이라서.
앰벌리는 7년 전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의 첫사랑이 제비꽃색 눈을 가진 남자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던 그날.
그 남자의 보랏빛 눈을 닮은 들꽃으로 신부는 꽃다발을 만들었다.
화동들이 신부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에 제비꽃을 얹었고, 신부는 새빨간 머리칼에 자색 화관을 인 채 눈부시게 웃었다.
그때 그녀는 정말로 태양 그 자체 같았다. 단지 그녀의 머리카락이 불타는 한 붉은빛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찬란해서.
그토록 행복하게 웃는 그녀 앞에서 앰벌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단념한 첫사랑을 또다시 고이 꺾을 수밖에.
‘제비꽃을 좋아하나 보네.’
이름이 거슬리는 찻집 주인을 생각하며 앰벌리는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비올레타라는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냥 본인 이름에서 딴 걸 수도 있고.’
비올레타. 제비꽃이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눈도 마침 보라색이었다.
데아론 텔로아처럼 부드럽고 연한 빛깔보다는 선명한 유화 물감에 가까운 보라색.
여자의 머리칼은 갈색이었다. 앰벌리 본인처럼 금발에 가까운 밝은 담갈색이 아닌, 초콜릿을 녹여 빚은 것처럼 그윽한 진갈색.
앰벌리는 잠시 여자를 생각하다가, 옆에서 부하가 말을 걸자 생각을 그치고 대화에 임했다.
물감처럼 선명한 눈과 초콜릿처럼 짙은 머리칼은 어느새 잊혔다.
그 여자를 다시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회식 며칠 후였다. 낮에 혼자 휴가를 얻은 앰벌리는 서점에 가기 위해 시내로 나섰다.
남들은 일하는 시간에 휴가를 얻은 근위병들은 주로 그때 집에 돌아가 밀린 잠을 보충하거나 가족을 만나곤 했다.
하지만 앰벌리는 이런 날에도 집에 가는 데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가족이 없었으니까.
고아인 그에게 새 가족이 생길 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는 지난 7년간 상당히 많은 청혼 또는 추파를 받아왔다. 그중 상당수가 귀족이었다.
비록 그의 태생을 트집 잡아 이기죽대는 자들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런 사람은 해가 갈수록 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잘생기고 유능하며 황제 폐하의 신임을 받는 차기 근위대장은 고작 평민 태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멀리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맥이었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부유한 평민, 차기 근위대장의 아내 자리를 탐내는 귀족, 단순히 미모에 끌린 바람둥이 숙녀들.
수많은 여인이 여태 앰벌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썼다.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면, 그의 시선만이라도.
그때마다 앰벌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여느 때처럼 온화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상대방이 자신을 원망할 수도 없도록.
앰벌리의 한결같은 철벽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남 얘기로 떠들기 좋아하는 한가한 사람들은 음모론에 가까운 다양한 가설을 늘어놓았다.
앰벌리 라크문 경은 사실 동성애자다. 숨겨둔 애인이 있다. 아니, 애인 정도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 서너 명쯤은 숨기고 있는 걸지도.
어쩌면 그가 잊지 못한 첫사랑이 있는 게 아닐까? 어머, 낭만적이어라.
다만, 첼루나 포렌타인 황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옛날 공주와 기사의 미묘한 줄다리기에 대해선 아는 사람이 의외로 없었다.
기사가 공주에게 치열하게 구애하고 공주는 기사를 처절하게 써먹던 그 시절,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온통 블레논과 텔레스의 정쟁에 쏠려 있었다.
게다가 공주님은 당시에도 데아론 텔로아 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공공연히 말이 돌지 않았나. 그들 사이에 앰벌리 라크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앰벌리는 사람들의 숙덕임을 묵묵히 흘려들었다. 딱히 그의 평판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었기에 굳이 걸고넘어질 이유는 없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했다니.’
하지만 때로는, 가만히 무시하려 해도 우스워서 실소가 났다.
‘그럴 리가.’
앰벌리가 아직도 독신인 이유는 첼루나 포렌타인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게 원래 앰벌리의 상태였다. 첼루나 공주가 예외였을 뿐이고.
앰벌리는 혼자가 편했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가 근위대 부하들을 솔직하고 편안한 애정으로 대하게 된 것도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이조차 온전히 수평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장은 부하들을 아꼈고 부하들은 대장을 존경했지만, 그들은 기사로서 본분을 잊지 않는 진지한 자들이었다.
군대의 필연적인 위계가 허심탄회한 우정과 양립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딱히 바람직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나랑 공주님이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는 그녀의 발밑에 깔려서라도 그녀 곁에 남길 원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소망을 기꺼이 싸움에 써먹었으니까.
수평이 아닌 수직이었다. 그 관계 또한, 결국.
오만한 황족인 첼루나 공주가 유일하게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사랑한 사람은 데아론 텔로아뿐이었다.
앰벌리의 마음이 거북하게 술렁였다. 그건 헛헛한 그리움의 잔재, 더도 덜도 아니었다.
한때 그분을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했는데 시간이 흘렀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지금 앰벌리의 폐부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는 미련도 연정도 아니었다.
쓸쓸한 추억에 동반되는 묘한 향수, 이따금 아련한 새벽에 찾아오는 물렁물렁한 감성이 그의 마음을 건드릴 뿐이었다.
어찌 완전히 잊을 수 있으랴. 첫사랑을, 그렇게나 아름답고 강인하신 분을.
다만 그분에 대한 회한에 얽매여 아직도 독신을 고집한다는 추론은 전부 헛소문이었다.
만약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결혼하겠지.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사회는 아직도 여인보다 사내에게 훨씬 유해서, 미혼 남성은 미혼 여성보다 사람들의 구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사회적인 강압도 별로 없겠다, 혼자 잘 벌어서 잘 지내고 있으니 절박한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절박하지 않으니 애쓰지 않았다.
‘별로 외롭지도 않고.’
외로움보다도 편안함이 컸다. 그렇게 하루하루 담백하게 흘러갈 뿐이었다.
그날도 그저 그런 담백한 하루에 불과했다. 서점에 들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가세요. 나중에 얘기해요.”
“어이, 아가씨, 우리가 가긴 어딜 가. 그리고 나중에 언제 얘기하게. 또 도망가려고?”
“도망은, 무슨. 내 집도 일터도 다 여기 있는데 내가 어딜 도망가요? 정식으로 약속 잡고 찾아오라니까. 돈은 그때 갚을게요.”
초콜릿색 머리에 보랏빛 눈을 한 여자는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한 손에 여자애의 손을 꼭 잡은 채 앞만 보며 척척 걸었다.
그녀와 전혀 친해 보이지 않는 덩치 큰 남자 둘이 그녀를 집요하게 쫓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입을 놀렸다.
“왜 그렇게 차갑게 구시나. 그래서 돈이 다 준비되기는 했어? 저번에 갔을 때는 없었잖소.”
“이제는 준비됐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약속 잡고 오시라니까요? 길거리에서 이러지 마시고.”
비올레타는 앞만 노려보며 악물린 잇새로 말했다.
손님들 앞에서야 얼마든지 살갑게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그 포악함의 주된 성분은 걱정이었다. 제 손에 매달린 자그마한 온기가 마음에 걸렸다.
비올레타의 딸, 일곱 살 에이미는 엄마와 장을 보러 나왔을 때만 해도 퍽 신나 있었다.
그런데 웬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자신과 엄마를 장터에서부터 따라오기 시작하자 아이는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움츠러들었다.
비올레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빚쟁이들이 자신에게 직접 시비를 거는 건 그나마 받아칠 만했다. 그러나 아이를 압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왜, 길거리가 어때서. 주변에 증인도 많고 좋네.”
남자는 걸걸한 반말로 이기죽거렸다. 그러더니 비올레타를 성큼 앞질러 그녀를 가로막았다.
“우리 예쁜 꼬마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남자가 씩 웃으며 에이미에게 손을 뻗었다. 비올레타는 자동으로 반응했다.
“윽?!”
“애한테 손대지 마.”
남자의 손목을 힘껏 쳐낸 비올레타가 사납게 경고했다. 보랏빛 눈이 표독하게 번뜩였다.
“하, 이년이 진짜…….”
얼얼한 손목을 문지르던 남자가 급기야 비속어를 흘렸다. 그가 또다시 손을 뻗었다.
“실례합니다.”
그리고 그 손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제가 직업병이 좀 심해서, 이런 광경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거든요.”
붙잡힌 손은 잔혹한 악력에 짓눌렸다. 남자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느낌에 비명을 토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게 기사도 정신인지라.”
물론, 실제로 뼈가 으스러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유능한 근위병이라도 사람의 뼈를 맨손으로 부술 힘은 없었다.
“물론, 부인께서 보호를 청하신 적 없으니 주제넘은 행동일지도 모르겠지만.”
앰벌리는 여전히 남자의 손을 억세게 그러잡은 채 비올레타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꾸벅였다. 비올레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끄윽, 이 새끼는 뭐야?!”
고통에 찬 건달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건달의 동료가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미친놈이, 계집애처럼 생겨서는—”
남자가 씩씩대며 손을 올리자 앰벌리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그는 손을 낚아챈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동시에 팔로 다른 남자의 공격을 막고 그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고개가 옆으로 꺾인 남자가 미처 통증과 당황에서 벗어나기도 전 앰벌리는 그의 무릎을 걷어차 꺾고선 바닥에 처박았다.
“으윽, 끅…….”
“이 새끼가…….”
“괜찮으십니까?”
앰벌리는 바닥에서 꿈틀대는 흉한 존재들을 무시하며 여자에게 공손히 질문했다. 비올레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 음,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기 혼자 아이를 지킬 때는 너무 어렵던 일이 고작 남자 하나 더해졌다고 이토록 손쉽게 정리되는 게 씁쓸하긴 했다.
그러나 씁쓸함과 별개로 비올레타는 은혜를 알았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동시에, 그녀는 은인을 향한 걱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때려눕히시면……?”
포렌타인 제국은 치안이 좋고 법이 발달한 선진국에 속했다. 길거리에서 무작정 사람을 패는 행동이 묵인되는 곳이 아니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폭행은 폭행이니 비올레타는 상대방을 걱정했다. 은인의 직업이 뭔지 기억했기에, 더더욱.
“근위대 군법은 유독 엄격하다고 들었습니다.”
며칠 전에 식당에서 남자를 봤던 기억이 났다. 쉽게 잊힐 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잘생겨서.
그날 오가며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이 남자는 황실 근위대 중에서도 꽤 고위직이었다.
근위병이 함부로 민간인을 때려도 되나? 그럴 리가. 오히려 근위병이라서 처벌이 더 심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