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혼자가 된 여인은 아들을 낳았다.
충동적인 하룻밤이었다. 쌍방의 끌림이 동반된.
남자는 자신을 정성스레 간호한 평민 여자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꼈고, 여자는 자신이 처음부터 눈여겨봤던 남자에게 진솔한 설렘을 품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룻밤이 파국의 시작이었다.
내내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다가 얼떨결에 일을 저지르고 난 뒤, 죄책감에 꿰뚫린 귀족 도련님이 뒤늦게 입을 여는 바람에.
<용서하세요.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사실 나는…….>
유부남이라고. 정략으로 결혼한 아내와 그 아내가 낳은 아들까지 있다고.
여인의 환희는 산산이 깨졌다. 그녀는 기가 막혔다. 그런 사실을 숨기고 나를 안았어?
자신이 처음 아이 아빠 없이 아들을 혼자 키우는 환상을 봤을 때 사별을 포함한 온갖 가능성을 상상했거늘, 이건 정말이지 참신하게 끔찍했다.
여인은 남자의 몸이 낫자마자 그를 매몰차게 내쫓았다. 그가 저자세로 용서를 구걸해도 소용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그나마 염치가 있었는지 눈물을 머금고 쫓겨난 뒤로는 여인에게 한마디 연락도 없었다.
그리고 여인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락해야 하나?’
여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무책임한 귀족 놈에게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마땅한 양육비를 요구해야 하나?
번뇌 끝에 여인은 일단 임신 사실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아이를 혼자서 잘 키워보기로 했다.
자신이 귀족의 사생아를 가졌다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건 예지력이 필요 없는 일이었다.
자기는 신분 상승을 위해 귀족 도련님을 꾄 요부로 소문날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는 곱지 않은 사생아 취급을 받을 테고.
상상만으로도 억울했다. 자기와 자기 아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기혼 사실을 숨긴 남자가 잘못이지.
‘영영 연락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나 사람 앞날은 아무리 부분적 성력을 간직한 전직 사제라도 전부 알 수 없기에, 여인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자신이 천년만년 장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서 여인은 몰래 미리 작성한 유언에 아이의 아버지를 명시했다.
그리고 부디 제 아들이 부끄러운 아비에게 기대지 않고도 혼자 잘살 수 있는 나이까지 자신이 버티기를 바라며,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를 키웠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자기 엄마처럼 제비꽃색 눈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년이 됐다.
그 소년은 언젠가 엄마가 꿈속에서 봤듯 토실토실한 손으로 화관을 엮어 엄마의 머리칼에 얹었다.
그 아이를 꼭 끌어안고 엄마는 예언했다.
너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네 운명에는 사랑이 있단다, 데아론. 너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을 거야.
나중에 혹시 헤어지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렴.
네가 네 마음에 솔직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다시 만날 테니.
너를 나만큼이나 귀하게 여겨 줄 사람을 말이야.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웃어 주렴, 내 소중한 아들아.
오늘 나와 함께하는 봄날이 훗날 다른 보드라운 추억으로 뒤덮이는 날까지, 더없이 맑게.
그러면 나도 네 따뜻한 기억 속에서 늘 함께할 테니.
그것은 간절한 예언이고, 소원이고, 축복이었다.
외전 4. 기사와 찻집
서른두 살 앰벌리 라크문은 오늘도 바빴다.
비록 텔레스 황제의 즉위 이후 시대가 평화로워져 예전처럼 목숨 걸고 뛰어다닐 일은 없어졌지만, 무릇 건강한 나라일수록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바쁜 법이다.
앰벌리는 그야말로 고위직이었다. 최근에 그는 다음 근위대장 후보로 확정되기까지 했다.
그가 태생적 귀족이 아닌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귀족이 된 신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
“파격적이기는, 무슨. 다들 뭐가 그리 파격적이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장님 실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대장님이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요, 뭐.”
앰벌리의 부하 기사 하나가 코웃음 쳤다. 주변에서 웅성웅성 긍정하는 말이 번졌다. 그중 하나는 기어코 중얼댔다.
“그리고 대장님의 얼굴만 봐도 전혀 파격적이지 않은…….”
“야, 시끄러워.”
누가 황실 근위대장을 얼굴 보고 뽑니? 그러다 나라 망한다고, 얘.
부하들끼리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열심히 숙덕이는 말을 앰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다들 수고했다. 이제 복귀할 애들은 복귀하고 귀가할 애들은 귀가하도록 해.”
“대장님! 대장님은 오늘 바로 귀가하십니까?”
씩씩한 병아리 기사 하나가 용기 내어 외쳤다.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앰벌리를 바라보았다. 앰벌리는 슬쩍 웃었다.
“왜, 다들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나 보지?”
지금 앰벌리의 미소는 가식이 아니었다. 그는 부하들 앞에서 가짜 미소를 보이는 일이 드물었다.
여전히 언변이 유려하고 아첨에 능한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태도를 무기 삼아 사람들을 홀리고 녹이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다만, 그건 윗사람이나 그와 사이가 나쁜 사람, 또는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 한정이었다.
근위대 부하들을 상대로 앰벌리는 진심으로 다정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사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생경했다.
자신이 계산이나 집착이 아닌 순수한 애정으로 누군가를 편하게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앰벌리 본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우리는 늘 집에 들어가기 싫습니다, 대장님. 피 끓는 청춘인걸요.”
“피 끓는 청춘이랑 집에 들어가기 싫은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왜 상관이 없습니까? 이 젊고 좋은 시절을 맨날 일터, 집, 일터, 집, 이렇게 반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름 타당한 하소연이긴 했다. 비록 지금은 이토록 애처럼 굴고 있지만, 이 중에 근위병 자리를 날로 먹은 인물은 없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황실의 근위병,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황제 폐하의 위풍당당한 기사들이었다.
그만큼 고되게 훈련하여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 근위대에 들어왔고, 들어온 이후에도 항상 바쁘게 일했다.
황제의 호위와 황궁의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대에는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인맥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과거 데아론 텔로아가 비교적 쉽게 황녀의 호위병으로 입궁할 수 있었던 것도 만약 근위대였다면 어림도 없었으리라.
그토록 막중한 책무를 맡은 이들이니 휴가를 귀히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모처럼 쉬는 날이면 집에 가서 잠만 자기 아깝다며 무작정 시내를 쏘다니거나 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 취하는 게 흔한 습관이었다.
“대장님, 우리 좀만 놀다 들어가요.”
“제발요, 대장님. 우리가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모시긴 뭘 모셔. 내가 너희를 모시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앰벌리는 혀를 찼다.
차분하고 절제력 강한 그와 달리 몇몇 무모한 병아리 기사들은 잔뜩 신나서 마시다가 고주망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 과음한 부하들을 챙기는 건 앰벌리 포함, 다른 더 의젓한 기사들의 몫이 되었다. 앰벌리가 질색할 만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자제하겠습니다, 대장님.”
“그래, 지난번에도 너는 그렇게 말했지.”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건 내 신뢰보다는 네 의지의 문제 같은데. 앰벌리는 솔직하게 말하려다가, 그냥 편하게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그래, 그럼 오랜만에 회식이다.”
“아싸!”
부하들이 너무 좋아해서 앰벌리는 슬쩍 웃었다. 역시, 이번에도 진짜 미소였다.
앰벌리가 선택한 시내 술집은 황궁에 가깝고 가격대가 적당하여 황실 기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평민들의 주점을 닮았지만 음식이 너무 저렴하지 않으면서도 품질이 좋아 귀족들의 방문에도 알맞았다.
평민 출신으로 작위를 받은 사람들과 태생부터 귀족인 사람들이 묘하게 공존하는 황실 기사들은 이런 무난한 식당을 회식 장소로 선호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오늘은 어떤 낯선 여자가 주문을 받고 식사를 가져왔다.
앰벌리와 함께 식탁에 둘러앉은 기사들은 호기심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원래 여기서 일하시던 분은 오늘 안 계시나요?”
이곳이 단골집인 기사들은 주인장의 얼굴을 알았다. 몇몇 친화력 좋은 사람들은 매번 주인장과 살갑게 대화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오늘은 그 넉살 좋은 아주머니 대신 웬 젊은 여성이 주문을 받자 기사들은 궁금증을 느꼈다.
“사장님은 오늘 배탈이 나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탁을 받고 하루 대신 일하기로 했어요.”
젊은 여자가 상냥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다소 수줍은 태도로 구석에서 기웃대던 기사 하나가 소심하게 말했다.
“당신은 그, 찻집에서 일하는…….”
단골 식당이 있다면 단골 찻집도 있는 법이다. 비올레타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제비꽃 찻집’ 말씀하시는 거죠? 제가 거기 주인이랍니다.”
꽃 이름을 딴 찻집은 마찬가지로 시내에 자리했다.
찻집 주인은 올해 스물여덟 살 된 여자였는데, 남편은 지방에서 돈을 벌고 있었고 그녀는 일곱 살 딸아이를 키우며 수도에서 찻집을 운영했다.
여자의 화사한 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에 홀딱 반한 수도 남자들이 하필 그녀가 이미 유부녀라는 사실에 한탄한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찻집에 자주 오시나 봐요? 저를 바로 알아보시는 걸 보면.”
“아니, 뭐, 저는……. 네.”
“오늘 마음껏 드시고 다음번에는 찻집에 놀러 오세요. 서비스로 케이크도 드릴 테니까.”
비올레타는 능숙한 사업가답게 생글생글 웃으며 손님을 공략했고, 공략당한 청년은 새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비올레타는 다시 곱게 웃어 준 뒤 뒤돌아 멀어졌다. 빨갛게 익은 기사의 양옆에서 그의 동료들이 키득거렸다.
“아주 홀렸네, 홀렸어.”
“야, 정신 차려. 너 임자 있는 사람한테 그러는 거 아니다.”
“알아, 나도 알아.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냥…….”
“그냥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거지, 그렇지? 으이구, 진짜.”
“그런데 사장님이 예쁜 게 문제가 아니고, 거기 차랑 케이크 진짜 맛있어. 커피도 맛있고. 안 가 본 애들은 한 번 꼭 가 봐.”
“사장님 딸애도 봤어? 진짜 귀엽게 생겼는데.”
“사장님 남편은? 남편분은 본 적 있어?”
“아니, 한 번도. 지방에서 돈 버시느라 바쁜가 봐.”
부하들이 왁자지껄 나불대는 사이 앰벌리는 주문한 맥주를 홀짝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