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혹시 헤어지게 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렴. 네가 네 마음에 솔직하기만 한다면 반드시 다시 만날 테니. 너를 나만큼이나 귀하게 여겨 줄 사람을 말이야.>
기어코 이 아이를 지독하고 황홀한 사랑의 길로 끌어들일 사람이 보였다.
여인은 잠시 무의식의 언저리에 반짝이는 석양빛 머리와 황금색 눈을 뚱하게 노려보았다.
<너는 참 소중한 아이야, 데아론.>
데아론, 소중한 데아론. 아이의 이름은 그때 정해졌다.
만약 자신이 기어이 이 아이를 선택한다면, 적어도 이름을 정하느라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
여인은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역시나 감촉은 따스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녀가 어느 청년과 마주쳤을 때.
“실례지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여인은 그 남자의 귀족적 말투라든가, 값비싼 옷이라든가, 잘생긴 얼굴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기서 역마차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여인은 그저 남자의 밤하늘 같은 머리칼을 보고, 속으로 몰래 웃었다.
그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도, 그가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기리라는 것도, 그가 높으신 후작님이 될 거라는 사실도 그때는 몰랐으나, 단 하나는 알았다.
나는, 저 사람을 통해 너를 만나리라.
남자는 자신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숨길 수 있었다면 숨겼겠으나, 숨길 수 없음을 알았기에 아예 시도하지 않았다.
신분제가 오랜 관습으로 뿌리내린 사회에서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건 고작 종이 한 장으로 이루어진 신분증 같은 게 아니었다.
서로 다른 신분에 속한 사람들은 딱 봐도 티가 났다. 입고 다니는 옷이나 평소의 말씨, 습관적인 경제 관념 같은 게 완전히 달랐다.
그러니 그 남자, 당시 텔로아 후작가의 도련님은 상대방이 평민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저 여자도 그가 귀족임을 알 테고.
그럼에도 남자는 여자에게 정중히 말을 높였다. 수수한 복장의 시골 처녀에게, 좋은 말을 탄 귀족 도련님이.
그는 흠 없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제 지위를 믿고 애꿎은 사람에게 포악하게 구는 쓰레기는 아니었다.
역마차의 행방을 묻는 남자를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름철의 숲을 닮은 녹색 눈으로 여자의 제비꽃색 눈을 응시했다.
‘미인이군.’
남자는 무심코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건 오로지 건조한 객관적 평가였다. 그때까지는.
“마을 회관으로 가면 될 텐데. 길을 아시나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는 점점 불편해졌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헤어질 사이에 굳이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아서 이에 대해 침묵했다.
“사실 모릅니다.”
그래도 이 부분은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지방 영지에서 일을 보고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급하게 떠날 일이 생겨 마차를 타야 하는데, 괜히 낯선 마을을 헤매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부디 당신께 안내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정중하게 청했다. 여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물론이죠. 따라오세요.”
여자는 순순히 응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남자는 말고삐를 당겨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멈칫하더니, 잽싸게 말에서 내렸다.
“내리실 필요 없어요.”
여자는 차분하게 만류했다. 또다시 묘한 표정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제 시종도 아니고, 당신은 걷는데 저 혼자 말을 타고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당신 시종이었으면 거리끼지 않았을 일을 왜 지금은 거리끼나요? 저나 시종이나 똑같은 평민일 뿐인데.”
여자가 되물었다. 딱히 비꼰다거나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어투였다. 시험 같기도 했고.
“심지어 당신의 시종 정도면 귀족일 수도 있겠네요.”
남자가 고위 귀족이라면 다른 하급 귀족을 아랫사람으로 부릴 수도 있다. 여자는 두 번째 가설이 더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옷이나 말을 보면 최소 백작 이상인데.’
비록 수도의 대교회는 아니었지만, 성녀의 운명을 피해 이 작은 시골 마을로 도망치기 전 여자는 꽤 큰 도시의 교회에서 일했다.
사제란 필연적으로 귀족과 교류가 잦은 집단이었다. 어찌 보면 씁쓸하게도, 교회를 유지하는 현실적인 힘은 귀족들의 헌금이니까.
그런 세속적인 이유로 여자도 사제 시절 꽤 많은 귀족을 만났다.
그러다 보니 누구는 검소한 시골 남작이고 누구는 아득한 중앙 귀족인지 얼추 눈대중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참, 예바르단 말이야.’
최소 백작가 도련님이면서 난생처음 보는 시골 여자에게 이렇게나 공손하다?
적어도 인성 면에서는 썩 괜찮은 인간이라고 그녀는 판단했다.
‘……뭐, 어떻게 한 번 보고 사람을 다 파악하겠느냐만.’
어차피 한 번 보고 헤어질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즉시 꿈속의 어린아이를 떠올렸으나, 아직 확신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기어이 그 아이를 만나야 한다면, 그 미래를 향한 그녀의 갈망이 그렇게나 진솔하다면, 그녀는 이 남자를 꼭 다시 만날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 하나로 모든 게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덧없는 찰나의 인연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인연이라는 표현이 아까울 만큼.
‘좀 더 지켜보자.’
인간에게 절대적인 미래란 없기에, 여자는 작고 따스한 아이의 제비꽃색 눈을 그리면서도 아직 망설였다.
“제 시종과 당신을 향한 태도에 차등을 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각자 역할은 엄연히 다르죠.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윗사람의 승마를 돕는 건 시종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와 상관없는 사람인데도 제 부탁을 들어주고 있으니, 제가 고용인처럼 대할 근거는 없죠.”
한편, 귀족 남자는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유려한 언변이었다. 고작 이름도 모르는 평민 여자를 설득하는 데 쓰기엔 과할 정도로.
‘매사 진지한 사람인가.’
여자는 고민했다. 그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때에 따라 다르겠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자는 담백하게 수긍했다. 딱히 덧붙일 말은 없었다. 남자도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곧 침묵이 두 사람을 덮었다.
그들은 곧 시끌벅적한 읍내에 진입했다. 여기부터는 굳이 둘이 떠들지 않아도 사방에 흘러넘치는 생생한 소음이 혼잡한 화음을 자아냈다.
여자는 남자를 흘긋했다. 진흙과 오물이 눌어붙은 길을 밟으면서도 남자는 질색하는 기색 없이 태연했다.
‘결벽증 환자는 아니라, 이거지?’
여자의 관찰이 이어졌다. 여태 살면서 운 나쁘게 마주친 무수한 까탈스러운 귀족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줄줄이 떠올랐다.
‘으으, 그런 유형은 진짜 피곤해.’
여자는 남몰래 진저리쳤다. 그러느라 마침 자기 쪽으로 뛰어오는 어떤 심부름꾼 아이를 제때 피하지 못했다.
“앗!”
하마터면 아이와 부딪칠 뻔했다. 그러나 몸이 완전히 기울기 전에 누군가 양팔로 그녀를 받았다. 엉겁결에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기며.
“괜찮으십니까?”
그 남자였다. 귀족이면서 깍듯하고 신발이 더러워져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언변이 유려하고도 진중한 남자.
그 남자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기댄 찰나가 무척 길게 느껴졌다. 여자는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음에도 일순 향기 비슷한 걸 맡았다.
향기가 너무 짙어지기 전에 여자는 남자를 밀어냈다. 너무 거칠지 않게, 그저 적절한 거리가 벌어질 정도로만.
“네, 괜찮아요.”
그녀가 다소 숨 가쁘게 말했다. 그녀는 좀 더 침착하게 덧붙였다.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더 캐물을 정도로 섬세하거나 성가신 성격은 아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고.
심지어 그는 아직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저 그렇게 스치고 말 사이였다. 처음에는 분명, 그런 줄 알았다.
“여기예요, 마을 회관. 여기서 역마차를 빌리시면 돼요.”
우연히 맞닿은 인연은 그 우연이 다하자 스르르 끊어질 예정이었다.
남자는 짧게나마 자신의 안내자였던 여자에게 친절하게 웃었다.
“고맙습니다, 레이디.”
“별말씀을요.”
레이디라는 과한 호칭에 여자는 속이 울렁거렸다. 레이디는, 무슨.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죽을 그녀였다.
하지만 그 울렁거림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저 좀 생경해서, 간지러운 느낌.
만약 자신이 저 남자의 지위에 걸맞은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저 고상한 호칭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을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미 그러고 있겠지.’
저 남자도 당연히 사교계에서 사람들을 만날 거다. 개중에는 여자도 있을 테고.
그리고 저 남자가 그중 한 명을 레이디라 부를 때, 그 숙녀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친근한 미소로 그를 맞이하리라.
‘……내가 잘못 짚었나?’
분명 저 남자의 초면이면서도 어렴풋이 친숙한 얼굴을 보고 꿈속의 사내아이를 떠올렸다. 그런데 설마, 기우였나?
‘내가 저 사람이랑 다시 엮일 일이 어디 있겠어.’
나는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으로 죽을 테고, 저 사람은 뼛속까지 귀족인데.
여자는 날렵하고 위엄찬 자세로 말에 오르는 남자를 아쉬움과 혼란 속에서 지켜보았다.
당신을 잡아야 꿈속의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손을 뻗어 당신을 붙들까. 하지만 대체 무슨 구실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정말 우리가 만나야 한다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을 정돈했다.
‘정말 어떻게든 만날 운명이라면, 언젠가 돌아오겠지.’
운명보다는 선택이 강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택했으니까.
여자는 천천히 돌아섰다. 별수 없는 미련과 찜찜함은 애써 갈무리하며.
“꺄아악!”
“조심해!”
“여기, 누가 사람 좀……!”
여자는 얼마 못 가 뒤돌아야만 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란이 일어난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 귀족의 말이 마을 회관 앞을 떠돌던 유기견에게 다리를 물려 난동을 부렸고, 그 귀족은 낙마로 크게 다칠 뻔했다.
당분간 거동이 불편하게 된 그를 전직 사제로서 간호 경력이 있는 현지 여자가 돌보게 된 건 우연, 필연, 또는 운명이었다.
셋 중에 정답이 무엇일지는 아마 누구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