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14)

“고마워.”

첼루나는 웃으며 손목을 내밀었다. 풀이든 금이든 첼루나는 데아론이 제게 둘러 주는 모든 게 좋았다.

사실 태생이 황족인 첼루나는 데아론보다 평소에 조금은 더 까다로운 편이었지만, 상대가 데아론이었기에 이 상황도 자동으로 예외가 되었다.

“묶어 줄까?”

“응.”

데아론은 첼루나가 내민 곧고 우아한 손목에 풀 팔찌를 두르고 단정하게 매듭을 지었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역시, 넌 뭘 하든 어울리네.”

데아론은 아내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 다정하면서도 적당한 음욕이 섞인 녹진녹진한 눈빛에 첼루나는 흐물흐물 녹았다.

“나야 당연히 그렇지.”

첼루나는 괜히 뻐겼다. 그러더니 냉큼 데아론의 뺨을 감싸며 불쑥 다가왔다.

“그리고 데안, 너는.”

그녀의 입술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치명적인 기습에 숨을 참았다. 입 안으로 매끄러운 살덩이가 후끈하게 들어왔다.

“넌 어디서 뭘 하든 요염하구나?”

“으음, 그거 좋은 거 맞지?”

“그럼. 물론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다면 문제가 있지만.”

“설마. 나한테는 너뿐이야, 루나.”

“흐음, 옛날에 너한테 고백했다던 그 소꿉친구는 뭐지?”

“세상에, 첼루나. 그건 내가 진짜 꼬꼬마 시절의 얘기라고.”

“그러니까. 그래서 더 문제지. 꼬꼬마 시절에도 심각하게 유혹적이었다는 거 아니야, 너.”

“아니, 말이 그렇게 되면…….”

“이거 참 아쉽네. 유혹적인 꼬꼬마 데아론을 나도 봤어야 하는데.”

첼루나가 입술을 삐죽였다.

데아론은 어쩐지 추궁당하는 느낌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 삐죽이는 입술이 퍽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아론은 자신의 감상을 솔직한 실천에 옮겼다. 그거야말로 추궁을 피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흡.”

이번에는 데아론이 먼저 키스하자 첼루나는 숨을 짧게 끊어 뱉으며 저절로 눈을 감았다.

“하아…….”

키스는 달게, 짙게, 깊숙하게 이어졌다.

어차피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데아론이 함께 있으니 호위를 따로 대동하지 않은 게 신의 한 수였다.

만약 다른 누군가 지켜보는 상황이었다면 꽤 민망했을 것이다. 부부 본인들이 아니라, 지켜보는 쪽에서.

부부 본인들이야 이미 자신들만의 뜨거운 세상에 빠져 남들이 감당해야 할 고역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이 안 되었다.

심지어 그토록 선량하고 배려심 많은 데아론조차 지금은 아내의 달콤한 살을 물고 빨고 핥느라 바빠 평소의 섬세함을 전부 잃었다.

“흐으, 데안.”

첼루나가 나직하게 칭얼댔다. 그 촉촉한 목소리가 데아론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그의 내면에 똬리를 튼 짐승이 꿈틀거렸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어깨를 짚고 뒤로 밀었다. 어느새 첼루나는 돗자리에 등을 댄 채 누웠고, 데아론은 쌕쌕대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여기서 하겠다는 건 아니지?”

첼루나는 가슴을 거칠게 달싹이면서도 일말의 이성을 붙들고 데아론을 새침하게 쏘아보았다. 데아론은 낮게 웃었다.

“설마, 내가 그러기까지야 하겠어.”

아무리 그의 안에 짐승이 날뛰어도 무려 23년간 인간으로 살아온 그는 최소한의 상식을 지킬 줄 알았다. 물론, 엄청난 인내심이 요구됐지만.

“우리 그냥, 키스만 하자.”

일단은, 여기서는. 그런 조건부가 붙었다. 첼루나는 그걸 전부 알아듣고 씩 웃었다.

“그래.”

이어, 그녀는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이미 비좁던 간격을 아예 없앴다. 가슴이 맞닿으며 숨결이 엉켰다. 언제나처럼 달았다.

한바탕 아찔한 열기를 나눈 뒤에야 두 사람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 부부는 함께 돌아다니며 곳곳에서 들꽃을 모았다.

“옛날에는 이런 것도 했어.”

데아론은 또다시 능숙하게 야생 화초로 예쁜 물건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꽃으로 엮은 화관이었다. 전설 속 숲의 요정들이 할 것만 같은.

“자, 써 봐.”

데아론은 첼루나의 해처럼 붉은 머리칼에 노란색과 보라색과 초록색 왕관을 씌웠다.

“이거, 제비꽃이지?”

관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꽃 한 송이를 집으며 첼루나가 물었다. 그녀가 연보랏빛 꽃잎을 매만졌다. 보들보들한 감촉이었다.

“응.”

데아론이 끄덕였다. 그의 보랏빛 눈에 살짝 우수가 번졌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신 꽃이었어.”

데아론의 어머니는 본인도 눈이 들꽃을 똑 닮은 보라색이었다.

옛날에 어린 데아론이 제비꽃으로 화관을 엮어 제게 씌워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태몽이었겠지.’

데아론은 그렇게 넘겨짚었다. 가끔 부모들은 아이를 낳기 전에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더라.

“화관 만드는 법도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거야.”

데아론이 웃으며 부연했다. 실제로 어머니의 꿈대로 되었다.

엄마는 아들에게 화관 제조법을 알려 줬고, 어린 아들은 성실하게 배워 어머니께 보답했다.

“그렇구나. 감사하신 분이네.”

첼루나는 빙긋 웃었다. 무수한 다른 감사 인사를 속으로만 머금은 채.

첼루나의 시선이 데아론의 목덜미에 닿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가 여전히 매일 걸고 다니는 모친의 유품.

첼루나도 같은 색상의 장신구를 가죽끈에 꿰어 목에 걸고 있었다. 처음 그녀의 성력을 발동시킨 금반지였다.

첼루나는 무심코 제 목에 걸린 성물을 매만지며 가만히 생각했다. 데아론, 나는 네 어머니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다고.

무엇보다 원하는 건, 그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는 거였다.

당신의 아들을 살려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었다.

자신의 시간을 되돌려 두 번째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고개 숙여 감사하고 싶었다.

아직 확답은 없고 전부 추측일 뿐이지만, 그래도 첼루나는 여태 혼자 많은 가설을 세웠다.

만약 그 가설이 절반이라도 맞는다면, 데아론의 어머니는 첼루나에게 여러모로 은인이었다.

“데아론.”

“응?”

첼루나가 문득 부르자 데아론은 다정한 음색으로 대답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진지하게 고백했다.

“사랑해.”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데아론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 맥락이 없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들의 하루하루가 사랑이었으므로.

“나도 사랑해, 첼루나.”

데아론은 상냥하게 화답했다. 눈매를 휘고 입꼬리를 당기며.

첼루나는 미처 몰랐으나,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를 쏙 빼닮은 미소였다.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공간에는 그렇게 또 다른 나날이 쌓여 갔다.

* * *

먼 옛날, 이제는 잊힌 어느 삶에, 한 사제가 있었다.

그 사제는 이 땅에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성녀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예지몽을 통해 자신이 성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배웠지만, 그 성력을 받아들이기가 두려웠다.

그 여인은 그저 너무 가난하지도 유복하지도 않은 평민으로서 스스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사제라는 직종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성녀라니. 신화에나 속하는 바로 그 성녀라니. 여인은 그런 거창한 운명을 거부했다.

사람의 운명보다 더 강력한 힘은 사람의 선택이다.

그래서 여인이 제가 받은 힘을 알고도 마음을 닫았을 때, 원래 그녀의 몫이었던 성력은 다른 이에게로 흘러갔다.

동시대에 성력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두 번째 사람이 훗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기 아들의 연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당시 여인은 알지 못했다.

그 여인은 꿈을 꾸었다. 성력을 거부하고 성녀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그녀는 그렇게 가끔 예지몽에 시달렸다.

간혹 그녀의 무의식에 스미는 꿈들이 절대적인 미래를 보여 주는 건 아니었다. 세상에 절대적인 미래란 건 없었다.

방정식에 무슨 값을 넣냐에 따라 정답이 바뀌듯, 사람의 미래도 각자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졌다.

그래서 여인은 그날 꿈에서 만난 흑발 소년이 반드시 미래의 자기 아들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엄마!>

하지만 그날,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 꿈속에서, 작고 따스하고 말랑말랑한 소년이 제게 달려와 품에 쏙 안겼을 때.

<엄마, 이것 봐요. 제가 꽃으로 왕관도 만들었어요. 잘했죠?>

그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 종알대며 한 쌍의 통통한 손으로 제비꽃 화관을 내밀었을 때.

여인은 직감했다. 한 번 만난 이상 잊을 수는 없었다. 이미 마음에 담은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귀엽고 천진한 아이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로 알고 똥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아, 만약 내가 이 미래를 거부한다면 너는 세상에 존재할 계기가 없어지겠지.

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로 태어나 다른 여자를 위해 화관을 만들고 다른 남자의 품에 토끼처럼 안길 거야.

‘다른 남자…….’

다른 남자, 누구? 꿈속에 남자는 없었다. 아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아이의 아빠는 누구지?

‘죽었나?’

무심코 아이의 밤하늘 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아이를 만나려면 언젠가 사별을 각오해야 하나? 아이 아빠는 젊은 나이에 병이나 사고로 죽는 건가?

‘아니면 애만 만들고 튀었거나.’

그건 여러 면에서 사별보다도 끔찍했다. 내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와 맺어져야 한다니. 여인은 부르르 떨었다.

‘……역시 거부해야 하나.’

남자가 요절할 팔자든 쓰레기 같은 인성이든, 여인이 혼자 아이를 키우도록 두고 떠나 버린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심지어 부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딴 가능성 따위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성녀의 운명에서 도망치기 위해 사제 자리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왔듯, 이번에도 돌아서면 그만인데.

<엄마, 예뻐요.>

아이가 수줍게 말했다. 눈이 보랏빛 들꽃을 빼닮은 꼬마는 엄마의 탐스러운 머리칼에 화관을 얹고는 볼을 붉히며 좋아했다.

여인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꿈속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예언 하나를 했다.

아이야, 네 운명에는 사랑이 있단다. 너는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을 거야.

가장 괴로울 때 사랑이 너를 살게 할 것이요, 사랑이 아닌 다른 게 너를 감히 죽일 수 없어.

마수의 위협? 인간의 악의? 그딴 게 감히 내 아들을 해칠 리가.

네가 목숨을 잃을 유일한 이유는 네가 사랑을 위해 스스로 그 목숨을 포기하기 때문이야.

사랑, 사랑, 그 빌어먹을 사랑 때문에.

그러니 너는 절대로 사랑하지 말렴, 내 아들아.

그런데 이걸 어쩌지. 너뿐 아니라 그 누구도 사랑 없이는 불행할 뿐인데.

<너를 만난 걸 후회하지 않아.>

여인은 아이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 꿈은 자신이 남편도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힘겨운 미래를 보여 주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걸 감수할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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