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14)

“기꺼이.”

데아론은 방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첼루나는 그 손을 당연하다는 듯 맞잡았다.

첼루나는 슬쩍 웃었다. 저렇게 기대감에 찬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데 어떻게 응하지 않고 배길까.

피곤한 아내에게 관광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데아론은 애써 아닌 척했지만, 첼루나는 그의 연기를 전부 꿰뚫어 봤다.

‘나한테 마을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눈빛이잖아.’

첼루나는 즐겁게 생각했다. 배려심 많고 착한 데아론. 그러나 이번에는 참기 힘들었나 보다.

‘당연히 장단은 맞춰 줘야지.’

멀미 때문에 피곤하기는 했다. 그러나 첼루나는 모처럼 들뜬 데아론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첼루나 역시 개인적으로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데아론의 과거가 담긴 장소. 나는 여기서 어떤 새로운 추억을 발견할까.

데아론에게 소중한 장소를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일생과 엮고 싶었다.

이제 우리는 온 삶을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각자 꼬부랑 노인네가 될 때까지, 언제나.

그런즉 지난 생에도 이번 생에도 데아론이 내내 그리워했던 이 예쁜 마을을 둘러보는 건, 첼루나에게도 큰 기쁨이었다.

“이 빵집은 아직도 있네요. 어릴 때 엄마랑 자주 왔는데.”

데아론은 반색하며 첼루나의 손을 부드럽게 당겼다. 첼루나는 ‘엄마’를 언급하며 온순하게 반짝이는 데아론의 제비꽃색 눈을 마음에 새겼다.

“여기는 사실 아침에 와야 해요. 아침에 오면 갓 구운 빵을 살 수 있거든요. 그때 풍기는 냄새가 일품이에요.”

“지금도 충분히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지금의 한, 다섯 배 정도 진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방금 배불리 먹고 온 손님마저도 배고프게 만드는 냄새랄까.”

“하하, 그럼 여기 올 때마다 주의해야겠네. 자칫하면 과소비의 늪에 빠지겠어.”

“과소비보다는 과식을 걱정해야 할걸요. 뭐, 둘 다 문제기는 하지만.”

여전히 아내의 손을 꼭 쥔 채 재잘재잘 떠드는 데아론은 소년 같았다. 그래, 여기서 그는 그저 싱그러운 소년이었다.

그가 자신이 후작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때, 아빠 없이 엄마와 단둘이 살며 부족함을 모르던 때.

그런 때에 데아론은 이 마을을 누비며 추억을 쌓았다. 순진하고 풋풋한 어린아이로서.

이제는 지나간 시절의 조각조각을 회고하자, 한때 소년이었던 남자의 눈이 애틋하게 젖었다.

“우리 오늘 둘 다 해 볼까? 과소비도, 과식도.”

첼루나는 데아론을 위로하듯 온화하게 말하며 그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며 맑게 웃었다.

“맛있는 빵으로 추천해 줘. 현지인은 너잖아.”

어린 시절이 그립지 않은 첼루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더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향한 향수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는지.

지금 데아론은 단지 빵집에서의 추억을 되씹는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이 빵집을 오갔던 어느 소중한 사람이 그리움의 주된 대상이었다.

익숙한 장소에는 각기 다른 추억이 있다. 모교를 방문해 학창 시절을 떠올리고, 여행지에 들러 과거의 휴가를 회상하는 것처럼.

지금 이 마을에는, 이 빵집에는, 소년의 추억이 있었다. 열다섯 살까지의 삶이 통째로 박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추억마다 어머니를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 복병처럼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데아론은 기쁨 외에도 공허감을 느꼈다.

“오늘 우리 실컷 먹자. 아예 빵으로 파티를 해 버리지, 뭐.”

첼루나는 남편의 헛헛함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과 온전히 같은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비록 데아론의 과거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으나, 현재 그와 삶을 함께하고 미래에도 그럴 사람으로서, 첼루나는 그를 부드럽게 달랬다.

이제는 여기 없는 여자와 한때의 소년을 생각하던 데아론은 조금씩 현재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사랑스러운 아내가 보였다.

“파티를 빵으로만 하게요?”

데아론은 씩 웃었다. 과거의 상실을 딛고, 온전히 현재의 기쁨을 만끽하며.

“다른 것도 많이 사 가요. 여기 정육점도 있고 청과전도 있고, 별거 다 있어요.”

“와, 정말 과소비의 끝을 달리려고 하는구나. 나는 그저 빵이나 좀 먹자고 했을 뿐인데.”

“빵으로 아예 파티를 열자면서요. 그 정도면 이미 과소비죠, 뭐.”

비록 옛날로 돌아가 그때 살아 있던 그리운 어머니를 만날 수는 없지만.

앞으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추억을 쌓는 건 가능했기에, 데아론은 지난날의 회한보다는 앞날의 가능성에 집중했다.

산 사람은 오늘도 그렇게 살아갔다.

고귀한 황족과 귀족은 본인들의 이사에 보탤 게 별로 없었다.

그들이 신혼여행에 간 사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필요한 물건을 전부 착실하게 옮겨 놓았다.

첼루나와 데아론이 신혼집에서 할 일이라곤 새 사용인들의 얼굴을 익히고, 밤마다 ‘신혼’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침대를 후끈하게 달구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첫 몇 주간만이었고, 슬슬 새집에서의 생활이 더는 새로운 게 아닌 일상이 되자 부부의 생활도 조금씩 폭이 넓어졌다.

우선, 그들은 조금씩 이웃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특히 데아론은 과거 자신이 이 마을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이들을 수소문했다.

데아론의 소꿉친구 대부분이 아직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한때 자신과 손에 흙을 묻히며 놀던 남자애가 몇 년 만에 공작의 아들이자 황녀의 남편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거의 기함했다.

그의 달라진 위치에 도통 적응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버벅거리는 옛 친구들을 데아론은 씁쓸하게 마주했다.

데아론은 끝까지 친절했다. 더는 동등한 친구로 지낼 수 없다면 자애로운 윗사람으로라도 남고 싶었다.

설움과 기쁨이 뒤섞인 재회였다. 때로는 설움이 더 컸고, 또 때로는 기쁨이 압도했다.

서럽거나 기쁘기보다는 그냥 대놓고 거북한 관계도 몇몇 있었다.

“그 사람은 왜 저녁 내내 벌레 씹은 표정이었대? 그, 있잖아. 파란 눈에 턱수염 기른 남자.”

“아아, 걔?”

마을에 이사 온 황족으로서 주민들을 상대로 연회를 베푼 날, 첼루나가 데아론에게 물었다.

데아론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걔가 옛날에 나 되게 괴롭혔거든.”

“괴롭혔다고? 어떻게?”

“이제는 별로 기억도 안 나. 주로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리고…….”

“……데안.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걔 죽여 줄까?”

“하하,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닌데.”

고작 농담 따위가 이렇게 살벌할 리가.

첼루나는 언니를 찾아갈 것 없이 지금 당장 맨손으로 살인을 저지를 듯한 표정이었다. 데아론이 씩 웃었다.

“루나, 침착해. 폐하를 폭군으로 만들 셈이야?”

“남들이 모르면 그건 폭군이 아니지. 폐하라면 그딴 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어.”

“에이, 남들이 모를수록 오히려 그러면 안 되지. 모든 생명은 소중해.”

첼루나는 이복언니의 능력을 신뢰했으나, 데아론은 처형 및 형수의 인성을 지켜 주기로 했다. 이미 여러모로 파탄 난 인성이긴 했지만.

즉위 후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텔레스 황제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흥건한 피를 손에 묻혔다. 다정한 데아론은 진심으로 그분을 보호하고 싶었다.

“알겠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다만 걔는 앞으로 이 집에 발끝 하나 들이면 안 돼. 코빼기라도 비치면 내가 직접 쫓아낼 거야.”

“어차피 오늘 표정 보니까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안 할 것 같은데, 뭐. 오히려 매 순간 뛰쳐나가고 싶었을걸.”

자신이 옛날에 유치하고도 잔인하게 희롱하던 또래가 갑자기 황족의 남편이 되어 돌아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 그놈은 남은 평생 보복을 두려워하며 불안감 속에 살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데아론은 통쾌감에 씩 웃었다.

“넌 너무 물러, 데아론.”

첼루나가 스산하게 툴툴댔다. 그녀는 전혀 통쾌하지 않았다.

그놈을 불안감에 처박는 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다. 불안을 현실로 바꿔야 진짜 벌이지.

“쓸데없이 힘 빼고 싶지 않을 뿐이야. 더는 잘 기억도 안 나, 그런 놈 따위.”

데아론은 싱긋 웃으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같잖은 인간을 신경 써서 어쩌려고.

그는 요즘 매일매일 벅차도록 행복해서, 어릴 적의 앙심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걔 때문에 화낼 시간에 너랑 이러고 노는 게 더 좋아.”

“흐응, 데아론.”

어느새 첼루나는 야릇한 콧소리를 냈다. 데아론이 뜨겁게 키스하며 다가오는 바람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겐 그 외에도 조금 다른 이유로 불편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첼루나는 데아론과 읍내에서 웬 여자를 마주쳤고, 그 여자의 애틋한 시선이 데아론을 향하자 즉각 신경을 곤두세웠다.

“와, 내 남편은 어릴 적부터 인기가 많았네.”

첼루나는 살벌하게 비꼬았다. 데아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괜스레 저자세로 해명했다.

“사귄 것도 아니고 고백이었어. 그리고 내가 바로 찼어.”

“아하, 그래, 그렇구나. 어쨌든 인기 많았던 건 사실이네. 참 좋겠어.”

코흘리개 시절부터 동네 여자애들의 고백을 쓸어 담았다는 나의 잘난 남편을 어쩌면 좋을까.

자신의 심술이 무척 유치하다는 걸 알면서도 첼루나는 도통 표정을 필 줄 몰랐다.

그러나 역시, 꼬인 심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난 너한테만 인기 있으면 돼, 루나.”

저 남자가 저런 얼굴로, 저런 목소리로, 강아지 같은 눈망울과 여우 같은 매혹적인 속삭임의 조합으로 제게 다가오면, 첼루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점 앞으로도 명심하도록 해.”

첼루나는 괜히 새침하게 대꾸했다. 이어, 하나도 새침하지 않게 그에게 키스했다.

그토록 사랑스러운 나날이었다. 한때는 아예 꿈꾸지도 못했던.

천덕꾸러기 공주와 경멸받는 사생아. 태어난 사실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던 그들이 지금은 서로 덕분에 삶을 몹시도 사랑했다.

이제야 시작일 뿐이었다.

외전 3. 성녀의 회고

새신랑은 새신부에게 자기가 원래 살던 마을의 읍내만 구경시켜 준 게 아니었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동산으로 데려갔다.

지리적으로는 부부가 사는 저택의 뒷산쯤 되는, 예전에 어린 데아론이 동네 친구들과 흙장난을 하며 놀던 곳.

“이런 식으로 풀이나 꽃을 엮어서 장신구를 만들곤 했어. 자.”

부부는 돗자리를 깔고 나란히 마주 앉았다. 데아론은 길쭉한 들풀을 뽑아 팔찌처럼 엮어 첼루나에게 내밀었다.

높으신 황족과 귀족 내외에게 썩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으나, 평민으로 산 세월이 더 긴 데아론은 개의치 않았고 첼루나 역시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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