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14)

그렇게나 다정하던 사내였다. 죽는 순간까지 사랑의 고백을 최후의 유언으로 쥐어짰던.

“첼루나, 추우세요?”

옆에서 그 다정한 사내가 물었다. 첼루나의 경직을 추위로 오해한 결과였다.

참으로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 그저 살짝 움츠렸을 뿐인데, 데아론은 그 이유까지는 짐작 못 했을지언정 작은 동작만큼은 일일이 잡아냈다.

“아니야, 따뜻해.”

첼루나가 중얼댔다. 그녀는 슬픔에 젖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데아론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여기가 더 따뜻하네.”

데아론이 헛기침했다. 그는 다시 복숭앗빛으로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동으로 첼루나의 어깨를 감쌌다.

“추우면 들어갈까요?”

“싫어, 그냥 이렇게 있을래.”

“여기 바깥입니다, 첼루나.”

“그래서? 오늘 낮에는 더한 것도 했잖아.”

“큼큼, 그때는, 뭐, 충동적으로…….”

“그럼 지금도 충동적으로 할까?”

첼루나는 어느새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퍼뜩 들었다. 데아론의 복숭아색은 이제 한층 짙어져 아예 토마토색이 되었다.

“해, 해, 해요?”

“대체 뭘 상상한 거야? 키스하자고, 키스.”

“아아, 네. 키스요, 키스.”

“……데아론. 너 야외에서 한번 해 보고 싶었구나.”

“네?!”

데아론은 거의 비명을 질렀다. 첼루나는 이제 전생의 슬픈 기억을 거의 잊고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왜 이래, 데아론. 이미 할 것 다 하고 볼 것까지 다 본 상황에.”

“아니, 그건, 우리, 침대에서…….”

“침착해, 데안. 당장 여기서 하자고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아, 네.”

“혹시 실망했어?”

“아니요!”

데아론은 절박하게 부정했고, 첼루나는 계속 변태처럼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여 데아론의 목에 입을 맞췄다. 그는 뻣뻣하게 굳었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첼루나는 웃으며 속닥였다. 실질적으로 나보다 열 살 연하인 데아론. 지난 생에나 이번 생에나, 나는 이런 네가 좋아.

때로는 짐승처럼 거칠다가도 소년처럼 수줍다가 누구보다 어른스럽게 나를 품어 주는 너.

전생에는 무력하게 보내야 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기적 같은 기회 끝에 두 번째 삶을 얻었다.

이번에는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첼루나는 동화 같은 결말을 위해 기도했다.

“데아론.”

“네?”

자꾸만 불끈불끈 열기가 치솟는 걸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던 데아론은 첼루나의 소곤거림에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스르르 힘이 풀렸다.

“사랑해.”

그 고백을 들으면 마치 마법처럼, 푹 끓인 설탕처럼 흐물흐물 녹았다.

“저도 사랑해요.”

굳이 애쓸 필요도 없을 만큼. 그저 자연스럽게, 사랑스럽게.

데아론은 첼루나의 턱을 감싸고 입술을 포갰다. 부드럽게, 다정하게, 나중에 침실에서 부부를 덮칠 격정적인 열기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밤바람은 제법 쌀쌀했고 까끌까끌한 모래는 귀찮기만 했으나, 여전히 둘은 행복했다.

“앞으로도 평생 사랑할 거야.”

데아론은 약속했다. 첼루나는 그 말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바라던 바야.”

그녀가 솔직하게 말했다. 황금 같은 눈이 들꽃 같은 눈을 올려다보며 기쁨으로 빛났다.

“나도 마찬가지야, 데아론.”

앞으로도 평생, 너만을 사랑해.

이건 지난 생에서부터 이어진 약속이야.

아직 차마 공유할 수 없는 전생의 연정까지 전부 모아, 첼루나는 남편과 평생을 약속했다.

달콤하디달콤한 신혼이었다.

외전 2. 새로운 추억

뜨거운 신혼이 끝나고 부부는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무려 석 달을 오롯이 함께한 뒤에도 그들은 아쉬움을 느끼며 수도로 복귀했다.

부부의 신혼집은 결혼식 전부터 결정되었다. 결혼한 황족은 출궁이 원칙이었고, 첼루나는 달리 애착이 있는 장소가 없었다.

반면에 데아론의 선호는 뚜렷했다. 그는 태어나서 15년간 나고 자랐던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 더는 이승에 없는 그의 어머니와 갖은 추억을 쌓았던 곳으로.

둘째 아들이 수도를 떠나겠다고 통보하자 텔로아 공작은 당황했다. 그는 황제와 결혼해 대공이 된 맏이를 대신해 차남을 후계로 삼으려 했었다.

“그건 아버지 사정입니다.”

문제의 그 차남은 참 차갑게도 대답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이기에는 퍽 불손한 태도였으나, 공작은 차마 꾸짖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조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아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자기 사촌이라고 칭하지 않고 부친의 조카라고 서늘하게 못 박는 태도가 데아론이 가문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렸다.

데아론은 피붙이를 챙기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자기 하나 사라진다고 가문이 무너질 거로 생각할 만큼 오만한 이는 아니었다.

블레논과 텔레스의 싸움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데아론은 가문을 위해서라도 텔레스 편에서 최선을 다했다.

비록 형과 아버지와 후작 부인을 향한 애정보다는 원망이 크기는 했으나, 그들의 몰살을 바랄 만큼 미워한 건 아니었다.

만약 텔레스가 패배했다면 텔로아 가문은 파멸했을 테니, 데아론은 자신뿐 아니라 자기 혈육을 위해서도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

이제 그의 역할은 끝났다. 텔레스는 황제가 되었고, 모리안은 무사히 대공 자리를 얻었다. 데아론은 이만 물러나고 싶었다.

“공작위는 제게 과분합니다. 제가 감히 물려받을 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데아론은 권력욕도 없었고 자신이 잘할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황녀의 기사였던 그는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지, 본인이 누군가를 이끄는 역할은 아니었다.

하물며 이 거대한 공작 가문을, 심지어 제게는 별로 좋은 기억으로 남지도 않은 집안을 훗날 책임져 달라니.

“스스로 과소평가하는구나.”

공작은 나직이 반박했다. 그가 보기에 데아론의 자질 자체는 충분했다. 이 아이가 누구 아들인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데아론은 끝까지 고집했다. 그리고 어느 속담에서 말하듯,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데아론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내의 조카, 즉 엘리야라는 이름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자신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자주 편지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비에게 약속했다. 원래 천성대로 참 착하게.

비록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피붙이라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세상에 부모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 공작밖에 남지 않아서.

가족이 대체 뭐라고, 혈연이 대체 뭐라고, 사랑한 기억 따위는 없어도 막상 끊어 내려니 모질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데아론은 진심으로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자주 연락하겠노라고. 꼬박꼬박 안부를 묻겠노라고.

“그래.”

공작은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데아론에겐 퍽 충격적인 말을 했다.

“미안하다.”

한 번도 진심으로 기대한 적 없는 사과를 이 남자가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괴롭게 말했다.

“너를 계속 힘들게 해서, 미안해.”

데아론은 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년간의 냉대와 외면을 묵인한 뒤에야 뒤늦게 건네는 사죄의 말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일단 하신 사과는 받아 두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말아 주세요.”

데아론은 마침내 나직이 당부했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제가 태어난 것에 대해서까지, 사과하지 마세요.”

데아론이 생각하기에 공작의 근본적인 죄는 따로 있었다. 불륜으로 여인을 만나 데아론을 낳은 것.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사과받기를 거부했다.

“차라리 그런 사과는 마님께 하세요. 저는, 저는 그런 사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그런 사과를 들으면 나는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악이고 수치라서 사과해야 하는 존재밖에 되지 않잖아.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런 식으로 죄를 통해 태어나 평생 손가락질받으며 사느니, 그냥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게 낫다고.

그러나 첼루나를 만나 삶의 기쁨을 회복하면서 그는 서서히 그런 생각을 버렸다.

어머니를 향한 원망도 조금씩 해소했다.

유부남의 아이를 가진 그분은 누군가에겐 천하의 죄인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겐 하나뿐인 소중한 엄마였다.

남편의 외도를 겪어야 했던 후작 부인이나 아비의 치부를 참아야 했던 모리안은 데아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사과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데아론 본인은, 더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저는 태어나서 행복합니다.”

데아론은 아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올곧은 보랏빛 눈에 흔들림은 없었다.

“그래.”

공작은 힘없이 끄덕였다. 그러더니 웃었다. 역시나 힘없는 미소였지만, 분명히 따뜻했다.

“나도 네가 태어나서 행복하다.”

뒷말은 너무 작게 읊조려서 상대방이 원한다면 충분히 못 들은 척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데아론은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 아들로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아론은 공손히 인사했다.

그가 어머니를 잃은 후 기댈 곳 없는 고아로 전락하지 않고 유복한 환경에서 삶을 이어 갈 수 있었던 건 어쨌든 아비의 공로니까.

흔한 포옹이나 토닥임, 심지어 악수도 없었다. 그저 몇 번의 어색한 인사말이 오간 뒤 두 남자는 헤어졌다.

완전히 망가질 수는 없는 관계였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마차에서 내렸다.

오랜 이동 끝에 첼루나는 멀미로 해쓱했지만, 눈앞의 그림책 같은 풍경을 보자 곧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기가 제가 살던 곳이에요.”

달콤했던 석 달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부부는 수도에 잠깐 들른 후 바로 새집으로 향했다.

수도에서 마차를 반나절만 타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 물리적으로 그리 멀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에 비해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 역할을 맡은 번화한 대도시와 소박한 시골 마을이 같을 수는 없었다.

마을 대부분은 광활한 농지로 이루어졌고 읍내라 불리는 중심지는 상인들과 장인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부부가 신혼집으로 구매한 저택은 읍내에서 30분쯤 걸으면 나오는 거리에 자리했다.

“조금 구경하다 가실래요?”

데아론이 물었다. 만약 아내가 피곤한 기색을 보이면 곧장 다시 마차에 오를 심산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응, 좀 둘러보다 가자.”

첼루나가 이렇게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네가 안내해 줘, 데안.”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와 있다. 데아론은 그 사실이 뿌듯하고 기뻤다.

자신에게 소중한 마을이 첼루나에게도 소중해지기를 바랐다. 그의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랑스러운 추억을 함께 쌓고 싶었다.

내 유년 시절의 행복이 곳곳에 묻어 있는 이곳에, 부디 앞으로 아내와 공유할 행복이 고스란히 녹아들기를. 데아론은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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