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14)

외전 1. 공주의 신혼

성대한 국혼이 끝났다. 마찬가지로 성대한 피로연에 이어 드디어 초야의 순간이 다가왔다.

‘뭐, 경험 자체는 처음이 아니지만.’

부부로서 가지는 첫날밤이 맞기는 하니 엄밀히 따지자면 초야라는 단어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지만 첼루나는 여전히 그 단어가 어색했다.

‘부부…….’

부부, 부부라. 이번 생에 첼루나는 법적으로, 정식으로 데아론과 부부가 되었다.

감회가 새롭다고나 해야 할까. 사실 아직도 가끔 꿈꾸는 기분이었다.

전생에는 비참하게 연애하다가 비참하게 헤어졌는데, 이번 생에는 이토록 평화롭고 달콤한 전개라니.

때로는 너무 행복한 만큼 현실감도 떨어져 언제 어떻게 행복이 끝날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런 근본적인 불안감은 아델라가 제게 바친 결혼 선물을 보자 감쪽같이 날아갔다.

‘이런 미친?!’

피로연이 끝나고 초야 전에 목욕을 시작하기 전, 첼루나는 아델라 프란체스의 이름이 정성스레 적힌 소포를 풀어 보고 거의 기함했다.

‘아니, 얘가 진짜…….’

선물의 정체는 차마 의복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형태의 잠옷이었다.

옷이란 모름지기 사람의 몸을 적당히 가려 주는 용도로 제작된 게 아닌가.

그러나 지금 첼루나가 손에 쥔 하늘하늘한 드레스 침의는 재질이 온통 반투명한 비단과 성긴 레이스라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을 듯했다.

‘황족 결혼 선물로 이런 걸 주면 어떡해?’

이 보수적인 제국 사회에서 정신 나간 사람으로 낙인찍힐 일 있나.

하긴, 아델라 프란체스의 거침없는 성격과 그녀와 첼루나의 오랜 우정을 생각하면 이런 선물을 받은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첼루나는 이 야릇한 잠옷과 함께 전달된 아델라의 카드를 펼쳐 보았다. 지면에는 소백작의 쾌활한 필체로 딱 두어 줄이 적혀 있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첼루나 전하. 부디 제 선물을 유용하게 쓰시기를 바라요. 당신의 영원한 종, 아델라 프란체스.]

그래, 확실히 유용하게 쓰이기는 하겠지.

첼루나는 자신의 해괴망측한 의복을 요리조리 살폈고, 결심을 내렸다.

데아론의 나이 올해 스물셋, 진즉 다 컸다고 자부하는 나이였다.

게다가 사랑하는 이와 몸을 섞는 게 처음도 아니니, 그는 결혼과 더불어 초야를 준비하며 자신이 긴장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새삼스레 떨리는 건지. 그는 욕조에 앉아 긴 한숨을 뽑아냈다.

‘침대에서 하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가.’

데아론은 나름 심각하게 그럴싸한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껏 첼루나와 데아론은 혼전부터 음란하다는 손가락질을 피하고자 혹 관계를 맺더라도 은밀히, 각자 옷도 다 벗지 못한 채 맞물렸었다.

그렇다고 더운 살이 맞닿는 감촉 자체가 덜 달콤해지는 건 아니었으나, 열악한 상황에 늘 아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초야라니, 부부라니. 이제 두 사람의 동침을 금하거나 비방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제발 좀 자주 만나서 아이도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라고 주변에서 격려해 주는 사람만 남았다.

이런 공개적인 축복 속에서 관계를 맺다니, 많은 게 불안하고 제한적이던 연애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한 호사였다.

특히나 데아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컸다.

하지만 물론, 이건 그가 아직 기억을 되찾기 전이었다.

‘뭘 준비하면 되지?’

심각한 고민이 이어졌다. 첫 경험은 아니지만 첫날밤인 지금, 그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뭔가 특별하게 하고 싶은데……. 이제 우린 부부고 침대도 처음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정확히 뭐가 더 특별해지는지, 비교적 애송이인 데아론 텔로아는 알지 못했다.

스물세 살이면 진즉 다 컸다고 자부할 나이지만, 여러 면에서 아직 풋풋한 나이이기도 했다.

‘침실에서 홀딱 벗고 기다려야 하나?’

이런 발상까지 끄집어냈다가 민망한 마음에 결국 실천하지 못했다.

여태 첼루나와 그가 오롯이 알몸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오늘 밤에 보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데아론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역시, 아직은 비교적 풋풋한 나이였다.

청년 데아론은 매일 조금씩 더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첼루나가 먼저 목욕을 마치고 침실에 도착했다.

그러니 데아론이 설령 결심을 마쳤더라도, 홀딱 벗고 침실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은 실천할 수 없었으리라.

결국 몸에 얌전히 목욕가운을 두른 채 침실에 진입한 그는 곧장 다시 뒤돌아 퇴장할 뻔했다. 그만큼 첼루나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데안, 어서 와.”

단지 충격적일 만큼 예뻐서는 아니었다. 원래 첼루나 포렌타인은 평소에도 충격적일 만큼 예뻤다.

데아론을 혼돈에 빠트린 건 첼루나의 차림새였다. 차마 묘사할 수도 없이 해괴했다.

옷을 입은 게 확실하긴 한데, 차라리 입지 않았더라면 덜 심란했을 듯했다.

꾹 그러쥐면 고작 한 줌에 잡힐 듯한 얇디얇은 재질 너머 매끈한 굴곡과 뽀송한 속살이 상대방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어, 데안……?”

제 남편이 잠시 저를 뻐끔대며 쳐다보기만 하자 첼루나는 다소 초조하게 중얼댔다. 속으로는 친구를 향한 비난이 폭죽처럼 터졌다.

‘아델라 프란체스, 다 네 잘못이야.’

애꿎은 프란체스 소백작은 황녀님께 야한 선물을 보낸 죄로 영원히 첼루나의 머릿속에 변태로 낙인찍힐 뻔했다.

그냥 변태도 아니고, 쓸모없는 변태.

‘유용하게 써 달라며?’

네가 원하는 대로 입었더니 데아론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하잖아.

사실, 데아론이 실제로 뒤로 물러선 건 아니었다. 언제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얼어붙어 그녀를 하염없이 쳐다볼 뿐이었다.

“음, 이거 이상해?”

첼루나는 결국 항복하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묻고 말았다. 이제는 그녀도 얼굴이 붉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만을 인정했다. 행위 자체야 별 새로운 것도 아니니 초야 따위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러나 호화롭게 꾸며진 신혼부부의 침실과 그 가운데 떡하니 자리한 거대한 침대를 보자 긴장감이 마구 솟았다.

게다가 난생처음 서로 앞에서 온전히 벗어야 한다는 생각과 저를 향한 데아론의 괴상한 눈빛 때문에, 첼루나 역시 빨갛게 익은 얼굴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뇨, 이상한 게 아니라, 저…….”

데아론은 횡설수설했다. 그러더니 첼루나가 상상도 못 한 발언을 웅얼대기 시작했다.

“그, 죄송합니다. 이렇게 노력해 주셨는데…….”

“어?”

“저런 옷도 입고 나오시고……. 저는 준비한 게 없는데요…….”

데아론은 부끄러워했다. 역시, 나도 홀딱 벗고 나타나는 성의 정도는 보였어야 했다.

저런 충격적인 차림으로 나타난 아내 앞에서 자기는 이런 건전한 꼴이라니.

“아름다우세요, 전하.”

데아론은 낯뜨거운 말을 늘어놓곤 입을 꾹 다물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첼루나는 버벅대는 남편을 바라보다가, 긴장도 잊고 푸핫 웃었다.

“데안, 이리 와.”

첼루나는 생글대며 손짓했다. 자기 혼자 긴장해서 바보처럼 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자 마음이 놓였다.

민망한 잠옷에 대한 소심함도, 애꿎은 아델라를 향한 분노도 봄바람에 휩쓸린 눈처럼 사르르 녹았다.

아내의 과감한 잠옷을 보고 자기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끼는 남편이라니. 이건 정말, 뭐…….

‘귀엽잖아!’

귀여워 미치겠네. 첼루나는 늙은 변태처럼 히죽대지 않기 위해 열심히 애써야 했다.

‘귀여워, 정말. 어떻게 저렇게 귀엽지?’

나이를 스물셋이나 먹고도 저렇게 귀여울 수가 있나.

하긴, 나중에 자신들이 함께 늙어 각자 꼬부랑 노인네가 되더라도 제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한결같이 귀여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생각에 첼루나는 마음이 벅찼다. 데아론과 함께 늙어 갈 수 있다니.

꼬부랑 노인네가 될 때까지, 서로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우스워질 나이까지 함께한다니.

전생에는 꿈도 못 꿨다. 이번 생에도 오랫동안 감히 바라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언니 편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첩자 노릇을 할 생각으로 데아론을 멀리하기로 마음먹었고, 나중에는 혹시 이번 생에 블레논이 승리할까 봐 불안에 떨었다.

텔레스 언니가 무사히 황제가 되고 자신은 정식 황녀로 격상되고 데아론과 법적 부부로 맺어진 지금, 아직도 가끔은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끔은 꿈꾸는 기분임에도 불구하고.

“어서, 이리 와.”

사실 그녀의 깊은 진심은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밤새 계속 멀뚱히 서 있기만 할 거야?”

자신이 정녕 생생한 실체를 가진 행복을 제 손으로 거머쥐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뭐, 나는 서서 해도 상관없긴 해. 자세야 다양할수록 좋지.”

“네, 네……?”

데아론이 한층 혼미한 표정을 짓자 첼루나는 재차 웃었다.

상대방을 너무 놀리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절제가 어려웠다. 저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안 놀리고 배겨.

“내 옷, 마음에 들어?”

첼루나는 방긋대며 데아론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데아론은 숨을 참았다. 아, 이미 할 건 다 한 사이에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 저 잠옷이 너무, 너무…….

‘아, 젠장.’

아직 제대로 시작한 것도 없는데 벌써 허리 아래가 뻐근했다. 가운을 벗기가 두려워졌다.

“네, 마음에 듭니다.”

지금 당장 벗기고 싶을 만큼. 데아론은 뒷말을 참으며 첫 문장만 겨우 쥐어짰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첼루나는 기쁘게 말했다. 아델라의 선물 취향에 대한 내적 평가가 점점 후해졌다. 나중에 나도 걔한테 좋은 걸로 선물해 줘야지.

“그런데 데안, 아까 네가 한 말에는 어폐가 있어.”

“그래요?”

첼루나의 상큼한 지적에 데아론은 아무렇게나 되물었다.

사실 제가 아까 뭐라고 말했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몸도 얼굴도 죄 너무 뜨거워서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너는 아무것도 안 준비해서 죄송하다고 했잖아.”

“아, 네. 그…….”

아내는 이런 잠옷을 입고 나왔는데 저는 이런 밋밋한 가운 차림이라니, 너무 무성의했다. 데아론은 깊이 반성했다.

“앞으로는 저도 뭔가 준비하겠습니다.”

“흠, 그래?”

“네. 속옷만 입고 기다린다든가…….”

뭔가 대화가 심각하게 민망했다. 데아론은 그런 걸 깨달을 겨를도 없이 계속 나불댔다. 정말, 정말 더웠다.

“푸핫!”

첼루나는 다시 웃었다. 상대방의 귀여움도 귀여움이었지만, 정말 속옷만 입고 기다리고 있을 데아론을 상상하니 그녀도 살짝 이성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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