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14)

꿈속 데아론은 간수를 매수해 첼루나를 빼냈다. 공주가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기에 그녀와 함께 도망칠 계획이었다. 공주는 경악했다.

<공주님. 지금 가셔야 합니다. 어서요.>

<데안, 네가 여기서 뭐 해?>

<공주님, 어서요, 시간이 없습니다. 말에 오르세요.>

<데안, 정신 차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날 빼돌리려고? 장난해? 나 지금 사형수인 거 몰라?>

<공주님, 잔소리할 때가 아닙니다.>

<잔소리? 잔소리?! 지금 내가 쓸데없이 떠드는 걸로 보여?>

내가, 우리가, 이런 말을 했다고?

<정신 차려, 데아론 텔로아. 우린 이제 끝이야. 난 내 빌어먹을 오빠가 멍청하게 패하는 바람에 덩달아 죽게 생겼어. 그리고 너는, 너는 이제 공신이잖아.>

아아. 더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삶에.

<앞으로 잘 먹고 잘살아. 넌 그럴 일만 남았어. 이제 와서 날 살려 봤자 뭐 어쩌려고? 나더러 평생 숨어 살라는 거야?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한동안 내가 까맣게 잊고 살았던 지난 삶에.

<루나! 그런 말은 하지 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그딴 말은 하지 마.>

너 혼자, 오랜 세월 외롭게 곱씹었을 어느 과거에.

<넌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야 해. 그러니까 어서 말에 타, 어서. 지금 도망쳐야 해.>

<너……. 안 돼, 데안, 제발……. 너까지 이렇게 망가질 필요 없어.>

<망가지는 거 아니야. 이래야만 내가 온전해질 수 있어.>

이제야 서서히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네 곁이라면, 설령 망가져도 괜찮아.>

<……알겠어, 그럼. 어서 가자.>

도주. 동굴에서의 하룻밤. 추격. 애원. 이별.

사랑하는 연인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고 기사들과 맞섰다. 이어, 끔찍한 고통.

<데아론!>

칼에 몸이 꿰뚫리는 감각보다 연인의 절규가 훨씬 아팠다.

<데아론!>

<첼루나.>

그녀가 괴로워하는 게 너무 싫어서 하필 그 순간에 죽게 된 자기 자신이 너무 미웠다.

<루나……. 여기. 이거. 네가 가져.>

어쨌든 해야 할 일은 해야 했기에, 그는 제 가장 소중한 물건을 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넘겼다.

<너라도,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그때 문득 떠오르는 오랜 농담에 그는 힘없이 웃었다. 아아, 엄마. 그분은 가끔 참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했지.

<잘 쓰면,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는데.>

실제로 그런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많은 걸 바로잡을 수 있을 때로 시간을 돌려, 내 사랑하는 공주님이 두 번째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네가 써. 갖고 있든가, 팔아도 되고. 이거 금이니까 돈이 꽤 될 텐데……. 사실,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팔아서 생계에 보태도 되고. 죽음이 덮쳐 오자 정신이 흐려졌고, 과거의 그는 점점 횡설수설했다.

<데안, 제발, 제발……. 어서, 가자. 가서 치료받자. 내가 의사 불러올게. 제발, 응, 어서…….>

<첼루나.>

울지 마. 슬퍼하지 마.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내 목숨까지 바쳤어.

<사랑해.>

그러니까, 제발, 너라도…….

아찔한 감각과 함께 의식이 끊겼고, 데아론은 암흑 속을 부유했다.

뭐지? 뭘까? 뭐였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데아론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또한 본능적으로, 이게 꿈속이라는 것도 알았다.

무엇보다 이게 단순한 꿈이 아니요 자신이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임을,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아기의 말문이 트이듯 별안간 깨달았다.

직후, 데아론은 꿈에서 깼다.

“헉……!”

살갗이 뜨거웠다. 데아론은 반사적으로 자기 목을 만졌다. 엄마의 유품은 방금 불에 담근 듯 화끈거렸다. 그가 목걸이를 손에 쥐자, 열은 갑작스레 식었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이 젖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가렸다.

첼루나의 회귀 후 17년 만에, 그녀의 연인은 기억을 되찾았다.

첼루나는 교회에서 돌아온 직후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는 데아론은 자꾸만 묘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괜찮냐고 그녀가 걱정스레 묻자 어색한 미소로 답변을 얼버무렸다.

남편의 해괴한 태도는 저녁 내내 이어졌다. 심지어 식사 도중에도 멍하니 침묵하느라 아이들이 제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곤 했다.

세 남매는 아빠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고 저들끼리 눈치를 보며 엄마를 흘긋흘긋 살폈다.

첼루나는 최대한 매끄러운 대화를 이어 가려 애썼다. 그럭저럭 차분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혼란과 염려로 울렁거렸다.

마침내 취침 시간이 왔다. 아이들은 각자 유모 손에 이끌려 침실로 돌아갔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언제나처럼 같은 방을 썼다. 그제야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데안, 괜찮아? 무슨 일 있어?”

첼루나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괴이쩍은 모습만 보이는 남편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웠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되는 그 짧은 사이에.

첼루나는 거의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렸다.

“……루나.”

데아론이 나직이 불렀다. 첼루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데아론은 첼루나의 귀가 이후 처음으로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췄다. 첼루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미안해. 너 혼자 힘들게 둬서.”

데아론은, 울고 있었다. 정말로 울고 있었다. 제비꽃색 눈은 물기로 촉촉했다. 첼루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바보처럼 다 잊어서, 외롭게 만들어서 미안해.”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데아론, 왜 그래? 괜찮아?”

“내가, 그때 죽고 나서.”

데아론이 힘겹게 속삭이자 첼루나는 얼어붙었다. 남편의 뺨을 감싸기 위해 무심코 뻗었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그녀는 숨마저 멎은 기분으로 데아론을 직시했다.

“네가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상상도 못 하겠어. 미안해. 네가 혼자 아프지 않기를 바랐는데…….”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첼루나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탁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다가서지도 물러서지도 못했다. 금빛 눈이 보랏빛 눈을 정신없이 파고들었다.

“네, 네가 죽고 나서? 기억했어? 그게 기억나? 너, 너도 회귀한 거야?”

“진짜 혼자서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데아론, 말해. 다 기억났어? 이렇게 갑자기? 다 기억나긴 한 거 맞아? 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어?”

데아론은 팔을 뻗어 첼루나를 와락 안았다. 그녀는 그의 품에 속절없이 안겼다.

심장의 거친 박동과 전신의 깊은 전율이 맞닿은 살갗을 통해 그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까 낮에 꿈을 꿨어. 그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어. 전부 과거의 내 시점으로.”

이어, 데아론은 첼루나를 여전히 품에 안은 채 자신의 기이한 자각몽을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했다.

첼루나는 석상처럼 그 모든 걸 들었다. 그러다 마침내 떠듬떠듬 속삭였다.

“그, 그럼……. 그럼 너는…….”

첼루나는 돌연 데아론을 밀어냈다. 데아론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첼루나는 어느새 송장처럼 창백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네가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구나.”

맺혔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데아론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첼루나는 그제야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절망으로 흐느꼈다.

“나야말로 미안해. 뻔뻔하게 속일 생각은 아니었어. 어차피 너는 기억 못 하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나는 그냥…….”

데아론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그가 첼루나에게 다가갔다. 언제나처럼 따스한 손이 그녀의 눈물을 닦고 그녀의 뺨을 감쌌다. 견고한 팔이 그녀를 안았다.

“내가 너를 싫어할 거로 생각했어? 전생에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서?”

그가 속삭였다. 목소리에 아픔이 묻어났다. 첼루나는 슬픔이 흥건한 눈으로 데아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한결같이 다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얼렀다. 입술의 감촉도 평소처럼 달았다.

“내가 절대 그러지 않을 걸 알잖아, 바보 공주님.”

데아론은 웃으며 속삭였다. 슬퍼 보이는 그 미소조차 한없이 다정했다. 끝을 모르는 그 다정함이 또다시 첼루나를 구원했다.

잊을 만하면 거듭되는 구원이었다. 그래서 절대 놓을 수 없는.

“나랑 13년, 아니지, 19년을 사랑했잖아. 그런데 아직도 몰라?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널 싫어하지 않을 거란 걸. 싫어할 리가 없잖아. 어차피 다 내 선택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원해서 당당히 선택했다.

그랬는데 그걸로 연인을 탓할 리가 있나. 싫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싫어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는 법만 배웠다.

“……19년도 아니야. 회귀 후에 나 혼자 널 사랑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23년이야.”

첼루나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용기 내어 남편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는 기쁘게 화답했다.

다디단 체온이 애타게 뒤엉켜 여전히 건재한 사랑을 알렸다.

“고마워, 데아론. 괜찮다고 말해 줘서. 그때 날 구해 줘서. 두 번이나 나랑 사랑에 빠져 줘서 정말, 정말 고마워.”

기억을 잊었음에도 내게 다시 와 줘서.

마치 우리는 몇 번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듯, 보란 듯이 나를 다시 사랑해 줘서.

절망과 두려움이 서서히 가시고 첼루나는 저를 향한 뜨거운 제비꽃색 눈에서 다시 확신을 얻었다. 자신들의 사랑이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오히려 이제 더는 회귀로 인한 비밀에 가로막힐 필요 없이, 마지막 한 겹의 장벽마저 뛰어넘어 서로에게 닿을 수 있었다.

“나도 고마워. 바보처럼 널 잊은 나를 사랑해 줘서.”

데아론이 속삭였다. 그는 다시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그의 숨결을 갈급히 빨아 먹었다.

“네 잘못이 아니었잖아, 데안. 자책하지 마.”

“그래도…….”

“쉬이, 데아론. 나도 더는 사과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사과하지 마.”

잘못이 있다면 사죄하고 다툼이 있다면 화해하며 서운한 점이 있다면 털어놓자.

그러나 더는 각자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하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 고마운 일을 나누고 사랑을 고백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에, 앞으로는 이 길고도 짧은 삶의 모든 순간을 더욱 알차게 쓰고자 했다.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많겠네.”

“셀 수 없이 많아.”

“하나씩 다 차근차근 설명해 줄게. 조급해하지 마.”

“첼루나.”

“응?”

“사랑해.”

과거에 이건 데아론의 유언이었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첼루나는 겁먹거나 슬퍼하지 않고 그저 기뻐하며, 늘 들어도 새삼스레 달차근한 고백에 마찬가지로 달콤하게 응답했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그 사실이 너와 나를 살게 하리라.

『공주는 언니를 황제로 만든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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