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아론이 아이들과 전쟁을 치를 동안, 첼루나는 저택 응접실에서 손님을 접대하고 있었다.
아델라 프란체스 백작은 최근에 방문한 조카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남동생에 대한 가벼운 욕은 습관적인 덤이었다.
“……그래서 제가 물었죠. 너희 아빠는 평소에 그런 걸 아무렇게나 사 주시니? 애들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너무 그러다간 애들 버릇 잘못 든다고 제가 로날드한테 몇 번을…….”
“루이사, 둘째는 좀 어때? 미숙아로 태어나서 네가 많이 걱정했잖아.”
“지금은 건강에 전혀 문제없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첼루나가 상대방의 신생아 딸을 언급하자 루이사 펠르만, 아니, 이제는 성이 바뀐 후작 부인 루이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에 아델라는 자기 아들의 얘기로 화제를 바꿨고, 세 유부녀는 잠시 자기 자식들을 경쟁적으로 자랑하느라 열을 올렸다.
“제 아이는 황태자 전하의 놀이 친구로 선정되었답니다!”
“어린애가 어쩜 그리 영특한지, 벌써 글을 짓더라고요. 처음 몇 마디 옹알대던 게 고작 엊그제 같은데…….”
“엘리야는 애가 진짜 의젓해. 동생들이 싸우면 자기가 알아서 말린다니까? 어떨 때는 과하게 듬직해서 걱정스러울 정도야. 애는 애답게 커야 하는데.”
죽은 선대 황태자의 핏줄이 언급되자 아델라는 어색하게 웃었고 루이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솔직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라크문 경이 다음 근위대장 후보로 명단에 올랐대요. 그런데 아직 너무 연소하다는 이유로 반대 여론이 많더라고요.”
“서른두 살이면 좀 젊기는 하지.”
“하지만 나이가 문제가 아닌걸요? 그 꼰대 늙은이들이 라크문 경이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트집 잡는 거지. 차마 대놓고 출신 얘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괜히 나이 핑계 삼는 거잖아요.”
화제는 또다시 매끄럽게 바뀌었다. 소재는 차고 넘쳤다.
놀랍게도 아직 독신인 앰벌리 라크문이 수도에서 승승장구하는 이야기.
올해 일곱 살인 황태자가 벌써 목검을 썩 훌륭하게 휘두를 줄 안다는 소식.
대공이 된 모리안과 시골로 떠나 버린 데아론 대신 텔로아 공작이 작위를 물려주기 위해 데려온 조카의 근황. 황태후의 짙어진 병색, 등등.
세상은 그렇게 돌아갔고 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어느덧 손님들은 돌아갈 때가 되어, 첼루나는 두 명의 각별한 친우를 대문까지 배웅했다.
“다음에 또 와, 아델라, 루이사.”
“불러 주신다면 기꺼이 오겠습니다.”
“오늘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백작과 후작 부인은 각자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마차를 따고 떠났다. 첼루나는 웃으며 그들을 보내 준 뒤 훈훈한 마음으로 저택에 돌아갔다.
저녁에 첼루나는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고, 저마다 자기가 만든 다람쥐 집이 가장 크고 예뻤다고 주장하는 세 아이의 얘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다.
밤에는 다시 부부만의 시간이었다. 남편은 타오르는 정력으로 아내를 안았다. 첼루나는 오늘도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신음과 교성을 흥건하게 흘렸다.
“하앙, 앗, 읏!”
“하아, 첼루나…….”
“흐, 읏, 지금 뭐 하는 거야, 멈추지 마…….”
“후우, 더 해?”
“응,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깊이…….”
데아론은 제게 매달려 눅진하게 칭얼대는 아내를 자비 없이 집어삼켰다. 첼루나는 제 아이들에게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야릇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절정의 끝에 여자의 몸이 늘어졌다. 남자는 그녀의 젖은 살에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발끝을 꼼질대며 그를 힘없이 밀어냈다.
“흐으, 그만, 간지러워.”
“첼루나, 사랑해.”
“나도, 데아론.”
“진짜 매일 벅차도록 행복해.”
데아론은 아내의 머리에 이마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첼루나는 없는 힘을 그러모아 데아론을 꽉 끌어안았다.
“나도, 데아론.”
이제 더는 바랄 게 없어.
두 번째 삶에서야 겨우 얻은 평온이었다. 그 평온을 첼루나는 매일매일 만끽했다.
언젠가 이 모든 게 갑자기 끝날까 봐 두려워하던 것도 이제는 옛날이었다.
“루나…….”
데아론이 문득 느직하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첼루나의 목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첼루나는 탄식했다.
“한 번 더 하자고?”
“왜, 싫어?”
“아니, 그, 당연히 싫지는 않은데…….”
피곤했다. 서른 살의 체력과 스물세 살의 체력은 확실히 차원이 달랐다. 첼루나가 신음했다.
“흐, 읏, 데아론, 잠깐만.”
“싫지 않으면 좋다는 거지? 그런 뜻 아니야?”
“잠깐, 조금, 하앙!”
“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흐, 으, 데아론…….”
이 엄청나게 얄밉고 재수 없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놈아.
첼루나는 남편의 어깨를 퍽 밀며 자세를 뒤집었다. 그녀는 위에서 아래로 데아론을 노려보았다.
“다시 하자고 한 건 너다.”
그 무모한 결정을 후회하게 해 주겠어.
이후, 부부의 침실에는 다시 오래도록 교성이 울려 퍼졌다. 역시, 아이들이 절대 들어서는 안 될 소리였다.
황녀의 자식이자 공작의 핏줄인 세 남매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모르도록 컸다.
최고급 가정 교사들에게서 최고급 학문과 기술을 배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여섯 살 필리아와 네 살 조엘은 아직 한참 어리다고 판단하여 첼루나와 데아론은 엘리야에게만 가정 교사를 붙여 주었다.
이에 두 꼬마는 엘리야를 무조건 부러워했다.
“나도 오빠랑 같이 수업 듣고 싶어!”
“나도 형이랑 같이 공부할래.”
“얘들아, 너희도 엘리야 나이가 되면 다 배우게 될 거야. 그때까지 참아.”
동생들이 또다시 맏이에게 매달리자 옆에서 첼루나가 엄하게 타일렀다.
그녀는 엘리야한테서 필리아와 조엘을 떼어 낸 뒤 두 아이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엘리야, 공부 열심히 하고 와. 힘든 점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알겠지?”
“네, 어머니.”
첼루나는 첫째의 이마에도 입을 맞췄다.
스스로 나름 다 컸다고 자부하는 여덟 살 소년은 엄마의 뽀뽀를 불편해하며 꼬물꼬물 물러났다. 그러자 첼루나는 아예 아이를 꽉 껴안았다.
“윽, 어머니, 저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그래, 열심히 하고 와.”
아이가 자그맣게 버둥거리자 첼루나는 그제야 놓아주었다. 엘리야는 의젓하게 돌아섰다.
첼루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퍽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아이들은 정말 참 빨리 큰다.
첼루나는 방으로 돌아가 외출을 준비했다. 마을 교회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황족 연금 덕분에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는 그녀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대신 각종 봉사 활동에 몰두했다. 그 봉사 활동은 주로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직도 건재한 성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매일 빈둥대기만 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 자신이 도움을 줄 만한 대상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기꺼이 손 내밀고 싶었다.
자신이 누린 다정함을 공유하고 싶었다.
한때 무척이나 불행했던 내가 지금은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이 행복하다.
다른 누군가도 그런 기적을 경험했으면 했다. 평생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삶이 누군가의 상냥한 손길을 통해 나아지는 그런 기적.
“루나, 이제 나가려고?”
“응. 그런데 데안, 어디 아파?”
첼루나는 걱정스레 변색했다. 데아론의 안색은 눈에 띄게 파리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머리가 좀 아프네. 감기 기운인가.”
“무리하지 말고 쉬어. 교회에는 나 혼자 다녀올게.”
“그래도 돼? 정말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무슨. 아프면 쉬어야지. 의사 부를까?”
“그럴 필요 없어. 많이 아픈 건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낮잠이라도 자면 나아지려나.”
“그래, 푹 쉬어. 금방 다녀올게. 증세 심해지면 바로 의사 부르고, 알겠지?”
첼루나는 근심 어린 당부에 이어 데아론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은 살갗이 퍽 뜨뜻하긴 했다. 데아론은 억지로 웃음 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그래, 이따 봐.”
첼루나는 염려 어린 발걸음을 마지못해 떼었고, 데아론은 끝까지 웃어 주었다. 그러다 아내가 나가자마자 미간을 확 찡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감기인가.’
정확한 원인은 몰라도 두통은 확실했다. 본인 말대로 단순한 낮잠이 해결책이기를 바라며 그는 침실로 향했다.
‘그래,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데아론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나른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 그는 금세 포근한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그가 요즘도 매일 끼고 다니는 모친의 목걸이가 은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데아론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꿈이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고, 실제라기엔 전개가 해괴했다.
꿈속에서 데아론은 첼루나의 연인이었다. 그런데 단지 꿈을 통한 회상이라고 보기엔 몇 가지 심각하게 부정확한 점이 있었다.
우선, 꿈속에서 첼루나는 성녀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움받던 나이는 훨씬 지났음에도 곳곳에서 대놓고 멸시를 당했다.
꿈속 첼루나는 고슴도치처럼 까칠한 태도로 사람들의 악의를 절박하게 튕겨 냈다. 그러면서도 데아론 앞에서는 연약하게 울며 위로를 구하곤 했다.
그는 그녀가 상냥하게 대하고 역으로 그녀를 상냥하게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해서, 또한 본인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녀 곁에 머물렀다.
‘뭐지……?’
데아론은 혼란에 빠졌다. 그는 꿈속의 자신과 일치되어 마치 머릿속에 대사가 주입된 배우처럼 자신이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말하고 뜻하지 않은 행동을 취했다.
‘실제랑 달라. 다르면서도 같아.’
데아론은 속으로만 눈살을 찌푸렸다. 겉으로 그는 계속해서 조종당하는 인형처럼 모종의 각본을 따랐다.
‘시기가 이상해…….’
그는 성녀가 아닌 첼루나가 황궁에서 계속 핍박받는 모습과 황녀와 황자가 과거에 그랬듯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수 토벌을 떠났다. 꿈속의 그가 열아홉 살일 때.
‘마수 토벌은 열여덟 삶에 떠났는데?’
수도로 돌아온 시기도 조금 달랐다. 똑같이 그가 스물한 살인 해이긴 했지만, 선대 황제가 와병하고 나서 훨씬 나중이었다.
‘황녀 전하, 아니, 황제 폐하도 실제보다 훨씬 늦게 돌아오시고…….’
꿈속에서 황자와 황녀의 대립은 이어졌다. 그러다 황태자비에게 아이가 생겼고, 선대 황제가 승하했다. 그 아이는 가짜 황손으로 밝혀졌다.
‘순서가 이상하잖아.’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이어진 흐름은 더욱 가관이었다. 황태자와 황녀의 사병이 수도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데아론 본인도 싸움에 나섰다. 그는 수많은 적군을 죽였다.
황녀가 승리했다. 황태자는 폐위되었다. 폐황자의 동복 첼루나 공주도 감옥에 갇혔다.
공주가 처형당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꿈속 데아론은 다급해졌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