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봄에는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성녀이자 황녀, 신랑은 황제 폐하의 이름난 기사이자 시동생이기도 하니 도저히 간소할 수가 없는 규모였다.
게다가 신랑의 경우, 최근에 부친이 후작에서 공작으로 승격되면서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정작 당사자들은 그저 단둘이 촛불 하나 켜 놓고 사랑을 맹세했어도 충분했겠으나, 각자의 중대한 위치가 그런 소박한 소망을 방해했다.
“와, 황녀 전하, 진짜, 정말, 엄청나게 아름다우세요.”
들러리를 맡게 된 아델라는 온갖 수식어를 붙여 가며 열렬하게 감탄했다.
옆에서는 루이사 펠르만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사는 호들갑이 주특기인 아델라보다는 조금 더 우아하게 아뢰었다.
“황녀 전하, 정말 천사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첼루나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 보았다.
순백은 전통적인 신혼부부의 색깔로, 황족의 경우 다이아몬드와 진주 같은 희거나 투명한 보석을 덧대어 보기만 해도 아찔하게 찬란한 예복을 만들었다.
친우들의 진심 어린 찬사를 듣고도 첼루나는 침묵했다. 긴장한 탓이었다. 언니의 대관식에서 축사를 읊을 때도 이렇게 긴장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울렁거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첼루나는 자신이 본인의 결혼식에 이토록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몇 달 전은 자신이 이맘때 무사히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설령 그때 결혼에 대한 확신이 있었더라도, 첼루나는 고작 결혼식일 뿐이라며 가볍게 웃어넘겼으리라.
연인의 죽음과 회귀라는 엄청난 일을 겪고 긴 세월을 싸워 여기까지 왔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에 비하면 결혼식이 무슨 대수랴?
게다가 결혼 상대는 데아론이었다. 이미 서로 청혼까지 마친 오랜 연인과 예식 한 번 올리는 게 뭐 그리 새삼스럽다고.
그토록 오만하고 심드렁하게 생각했던 첼루나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당장에라도 까무러칠 듯 혼미했다.
“이제 시간이 다 됐습니다, 전하.”
루이사가 고했다. 얼마 전 황제에 의해 공주에서 황녀라는 호칭으로 격상된 첼루나는 조용히 끄덕였다. 옆에서는 아델라 프란체스 소백작이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래, 가자.”
첼루나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신부와 들러리들은 대기실 앞으로 나갔다.
첼루나는 루이사와 아델라를 각자 한쪽에 거느린 채 푹신한 벨벳을 밟았다.
관례상 첼루나는 먼저 제단 앞에 도착해 신랑을 기다리는 역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쓰러지지 않기를 기도하며 후들대는 걸음을 옮겼다.
예배당 양옆에는 이미 세련된 황실 근위병들이 정숙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첼루나는 무심코 돌아보았고, 누군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
앰벌리 라크문을 발견한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앰벌리는 연청색 눈으로 황녀를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예전에 몇 번이나 첼루나를 파고들던 열기는 앰벌리의 시선에 더는 없었다. 체념으로 묽어진 온기만 있을 뿐.
첼루나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한때 제게 열렬하게 구애했던 기사에게 속으로 짧은 감사와 위로를 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줘서.
그리고 저자가 나와 황제 폐하의 편에서 몇 번이고 훌륭하게 활약한 건 사실이니까.
내가 납치당했을 때 구하러 와 주기도 했고.
부디, 거절당한 짝사랑의 아픔은 신속하게 아물기를.
앰벌리 본인도, 한때 앰벌리를 좋아했으나 끝내 지혜롭게 단념한 아델라도 언젠가 좋은 인연을 찾기를 첼루나는 진정으로 바랐다.
첼루나는 앰벌리에 관한 생각을 곧 지워 냈다. 지금은 다른 남자를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첼루나는 마침내 제단 앞에 섰다. 예배당은 이미 하객들로 가득 찼다. 첼루나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그러다가.
“신랑, 입장합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뚝, 그쳤다.
데아론이 보였다.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눈부시고, 아름답게.
신부와 같은 보석으로 장식한 새하얀 예복에 빛이 반사되어 그는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처럼 보였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보고 있었다. 걸음을 떼는 내내 그는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평소처럼 맑고 따스한 보랏빛이었다.
그 보랏빛은 태양처럼 다가와 첼루나를 집어삼켰다. 그녀는 제비꽃으로 빚어진 빛과 열에 풍덩 빠져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했다.
그 덕분에 첼루나는 떨림을 잊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데아론이 속삭였다. 신랑은 이제 신부의 코앞에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 온기가 전해졌다.
첼루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웃었다.
앞으로도 계속 웃을 예정이었다.
* * *
한때 데아론이라는 소년이 엄마와 함께 살던 시골 마을에는 으리으리한 저택이 하나 있었다.
저택 뒤에는 동산이 하나 있었고, 그곳에서는 오늘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해처럼 힘차게 울려 퍼졌다.
사실, 오늘은 웃음소리가 아니라 울음소리였다.
“흐앙, 누나 미워, 나 누나랑 안 놀 거야!”
“야, 나도 너 미워! 나도 너랑 안 놀 거야!”
“쉬이, 필리아, 조엘. 그만 뚝. 내가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만 울어.”
“흐아앙, 엘리야 형, 나 형이랑 놀래! 필리아 누나랑 안 놀 거야!”
“넌 저리 가! 내가 엘리야 오빠랑 놀 거야!”
“하하, 애들아…….”
여덟 살 금발 소년은 해탈한 표정으로 두 꼬마를 얼렀다.
여섯 살 흑발 여자애와 네 살 흑발 남자애는 소년의 양옆에 찰싹 달라붙어 앙칼진 고성을 이어 갔다.
“흑, 누나 나빠, 내가 열심히 만든 다람쥐 집인데, 누나가 다 망가트리고…….”
“망가트리긴 뭘 망가트려, 네가 하도 이상하게 만들어서 내가 도와준 거지!”
“필리아, 그만해. 네가 열심히 도와주려고 했는데 조엘이 그 사실을 이해 못 해서 속상한 거지? 그럼 소리 지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 보자.”
“……힝, 알았어, 오빠.”
“조엘, 네가 처음에 생각했던 다람쥐 집이랑 지금 다람쥐 집이랑 모양이 달라져서 속상한 거야? 그럼 처음부터 다시 만들면 돼. 내가 도와줄게.”
“……흑, 알겠어, 형.”
여덟 살 애늙은이의 침착한 타이름에 두 꼬마는 마법처럼 얌전해졌다.
엘리야는 안도로 한숨지었다. 그러다 몸이 훅 들리는 바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악?!”
“무슨 일이야, 엘리야. 애들은 또 왜 울었어? 얘네가 또 너 귀찮게 했니?”
“아버지!”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들린 소년은 양아버지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서른 살 데아론은 즐겁게 웃으며 아이를 허공에서 빙글 돌렸다. 아이는 꺅, 하고 좋아했다.
“아버지, 나도, 나도!”
“나도 들어 주세요!”
필리아와 조엘이 각자 깡충깡충 뛰며 외쳤다.
데아론은 자신의 처조카 겸 양아들을 내려놓고 친딸과 친아들을 각각 한 번씩 허공에서 돌려 주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폭소했다.
“그래서, 이번엔 뭐가 문제야? 저 멀리서부터 너희 우는 소리가 들리던데. 또 싸웠니?”
“싸운 거 아니에요!”
“아버지, 방금 해결했어요.”
필리아와 조엘이 동시에 빽 소리치자 옆에서 엘리야가 재빨리 말했다. 데아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수고가 많아, 엘리야.”
데아론은 엘리야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엘리야는 얼굴을 붉히며 싱글벙글 좋아했다.
아이의 눈은 선연한 황금색이었다. 자신의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키우기로 한 폐황자의 사생아를 처음 넘겨받았을 때, 강보에 싸인 아기의 눈 색을 보고 첼루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기의 머리칼은 죽은 아빠를 똑 닮은 연한 금발이었지만, 눈 색깔은 숙모와 똑같았다. 오래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색깔이었다.
아기의 도렷한 금빛 눈을 바라보며 첼루나는 조금 멍해졌다.
기억도 안 나는 엄마, 죄짓고 죽어 버린 오빠, 그저 가엽다는 마음으로 키우게 된 이 아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정녕 같은 핏줄로 이어져 있음을 새삼스레 실감해서.
그때부터 첼루나는 아이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연민으로 빚어진 충동적인 결정이었을지 모르나, 지금 엘리야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진정한 책임감과 애정이었다.
첼루나가 언니에게 약속한 대로 엘리야는 제 친부모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앞으로도 모를 예정이었다.
엘리야의 친모는 처음에 아들에게 젖만 물린 뒤 아이가 젖을 떼자 첼루나의 제안을 거부하고 사라졌다.
첼루나는 그녀에게 계속 엘리야의 유모로 있어도 좋다고 권했으나,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를 평생 모르길 원했다. 앞으로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커 주기만 한다면.
<부디, 평생 황녀 전하의 아이로 길러 주세요.>
제 아이로 자라는 것보다는 전하와 데아론 님의 자식으로 크는 게 훨씬 유복할 테니까요. 그렇게 속삭이던 여자의 얼굴을 첼루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렇게 엘리야는 첼루나의 첫아들이 되었다. 결혼 이듬해 딸 필리아가 태어났고, 2년 뒤에는 아들 조엘이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자식 셋을 데리고 살았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여전히 밤마다 바빴다. 이러다 덜컥 넷째가 생겨 버리는 거 아니냐고 사용인들이 농담처럼 수군댈 정도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첼루나의 태도는 완강했다.
<세 번은 안 돼.>
출산은 두 번만으로도 끔찍했다. 두 번 다 아이를 낳으면서 죽는 줄 알았다.
대체 내가 왜 이걸 한 번 더 하기로 했지? 조엘을 낳으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도 내 엄마처럼 아이를 낳다가 죽는 건 아닐까, 그럼 설마 내 아이도 나처럼 자라려나, 나를 잃고 이성을 잃은 데아론이 선대 황제처럼 되는 거 아니야? 온갖 과격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첼루나는 두 번 다 끝내 살아남았고, 데아론은 선대 황제와 감히 비교하는 게 모욕일 정도로 아이들 모두에게 훌륭한 아빠였다.
자신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첫째에게조차 데아론은 한없이 다정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친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모질게 굴 성정이 아니었다.
“아버지, 이것 봐요. 우리가 만든 다람쥐 집이에요. 이렇게 흙으로 집을 만들어 놓으면 숲에서 다람쥐가 와서 쉬다 가기 좋을 것 같아서요. 어때요?”
“이건 제가 만들었어요. 그런데 필리아 누나가 다 망쳤어. 히잉…….”
“야, 아니라니까?!”
조엘이 울먹이자 필리아는 발끈했고, 곧 엘리야의 인내심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아빠의 몫이었다.
데아론은 일상적으로 치고받는 꼬마 남매를 달래느라 오늘도 본연의 상냥함과 지난 7년간 쌓인 연륜을 최대한 활용했다.
육아는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