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14)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놈들이었으니까 아무 느낌도 없을 줄 알았어요. 아, 사실 그건 아니에요. 아무 느낌도 없는 건 아니었거든요. 그때 너무 빠르게 보내 줬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는데.”

데아론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첼루나의 경직을 느낀 데아론의 눈에서 냉기가 빠져나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괴물 같나요?”

그가 속삭였다. 커다란 눈망울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첼루나는 부드럽게 한숨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에게 네가 뭔지는 상관없다. 내 앞에서 너는 살인자도 괴물도 아닌 그저 빛이자 온기, 유일한 구원이니.

첼루나는 데아론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병색으로 까슬해진 입술의 감촉이 마음에 걸려 아주 짧게만 체온을 포갰다. 그 찰나마저 몹시 달았다.

“너랑 다른 기사들 덕분에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서 있는데, 쓰레기 몇 명 좀 치워 줬다고 어떻게 너를 괴물 취급하겠어? 그럼 오히려 내가 괴물이지. 양심 없는 괴물.”

첼루나는 데아론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대견하게 웃었다.

기특한 나의 데아론, 사랑스럽고 용감한 내 사랑. 그에게 여태 빚진 게 너무 많아서 언젠가 다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그냥, 네가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혹시라도 양심의 가책이 남았다면 훌훌 털어 버려. 그리고 그놈들을 너무 오래 미워하지도 마. 네 증오가 아깝잖아. 네 분노가 아까워. 어차피 이미 죽어서 죗값 치른 놈들이야. 더는 벌할 수도 없는 놈들 때문에 네가 감정에 겨워서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데아론은 낮게 한숨지었다. 그러더니 첼루나를 가만히 안으며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웅얼거렸다.

“사실, 가끔 끔찍해요. 제가 실제로 사람을 죽였다는 게. 아직도 종종 실감이 안 나.”

자신이 휘두른 검에 살이 찢기고 뼈가 꺾이는 감촉. 마수를 벨 때와는 전혀 달랐다. 어찌 같을 수 있을까.

“그래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흘려보낼게요. 훌훌 털어 버릴게. 당신 말대로 내 분노가 아까우니까.”

데아론은 다시 연인을 살짝 밀어내며 싱긋 웃었다. 그의 눈이 훈훈한 제비꽃색으로 돌아온 걸 보고 첼루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그녀도 마주 웃었다.

“앞으로 증오나 분노 말고 좋은 감정만 품으려고 노력할게요. 계속 행복한 일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 삶에도, 당신 삶에도. 우리 둘이 앞으로 함께할 삶에도.”

“네 행복이 내 행복이야.”

첼루나는 진지하게 고백했다. 데아론이 활짝 웃었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예요.”

이후, 두 사람은 키스했다. 입술의 까슬까슬한 감촉을 신경 쓸 틈도 없이, 깊게, 달콤하게.

연인이 주는 평안함에 취한 와중에도 첼루나는 남몰래 슬프게 상기했다. 아직 괴롭고 불편한 일이 남아 있음을. 싸움은 사실상 끝났으나, 숱한 뒤처리가 쌓여 있음을.

그래도 어쨌든 끝은 끝이었다. 험난한 길의 종착점이 보였다.

그 부분을 온전히 넘기고 나면 정녕 행복한 일만 있기를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이번 생의 정쟁은 지난 생보다 훨씬 깔끔하고 평화롭게 끝났다.

시가전을 포함한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치명적인 연타에 패배를 직감한 황태자가 먼저 항복을 선언한 덕이었다.

여러모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그였으나, 끝이 이미 뻔히 보이는데 추하게 뻗댈 만큼 아둔한 놈은 아니었다.

자신이 조용히 물러나면 그의 사람들은 훨씬 많이 목숨을 건질 테니, 이번 생에 그는 발버둥 대신 자멸을 택했다.

황제는 전생보다 일찍 승하했다. 귀애하는 아들의 추잡한 몰락이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는 가을이 가기 전에 죽었다. 생전에 그토록 그리던 황비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에게는 가장 자비로운 안식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사랑하는 아들까지 곧 그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저승에서라도 자식을 돌려받은 부모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는 모두의 상상력에 맡기겠다.

“공식적으로 너는 폐위가 아닌 사임이야. 그나마 그게 덜 불명예스럽겠지. 스스로 물러난 덕분에 네 처가랑 외가에 타격은 없을 테고, 그냥 너 혼자 조용히 사라지면 돼.”

황제의 장례를 치르고 황태자의 출궁이 결정된 뒤였다.

조만간 권좌에 오를 텔레스 포렌타인은 처소에 유폐된 블레논 포렌타인을 찾아가 작은 약병을 하나 내밀었다.

“유배지로 가는 길에 이걸 마셔.”

피 섞인 오라비의 가장 평화로운 끝을 위하여, 동생이 준비한 생전 마지막 선물이었다.

“고통 없이 죽을 거래. 처형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그렇지?”

오빠는 동생을 노려보았다. 동생은 덤덤하게 그 시선을 받아 냈다.

둘 다 서로 쏘아보는 시선까지 쏙 닮았다. 어떻게 이리도 닮았을까.

“사실 나는 네게 치욕스러운 죄목을 붙여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어. 그래야 네가 확실히 역적으로 남고 네 원수를 갚겠답시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차가운 저음으로 줄줄이 읊던 텔레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후, 하고 숨을 뱉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오빠마저 제 손으로 처단하게 되자 가슴이 갑갑했다.

“첼루나, 그 애가. 되도록 조용히 끝내 달라고 하더라.”

겉으로는 까칠해도 속마음은 한없이 무른 내 동생. 어떻게 우리 핏줄에서 그리도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왔을까.

“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걔 마음이 좀 여리거든. 그러니까…….”

텔레스는 블레논의 손을 억지로 끌어다가 약병을 쥐여 주었다. 동생은 조곤조곤 명령했다.

“너 하나로 끝내.”

우리의 자식들에겐 우리의 부모님이 그러했듯 지저분한 피바람의 여지를 물려주지 않도록.

텔레스는 약병의 감촉이 저를 떠나자마자 곧장 돌아섰다. 그녀는 성큼성큼 조급한 걸음을 뗐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오빠가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 너 때문이야.”

눈물겨운 작별이었다.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동생들이 없었다면 부황의 유일한 아들로서 당연하게 제위에 올랐을 남자가 피붙이를 저주했다.

“그러게.”

텔레스는 작게 중얼댔다. 블레논은 듣지 못했다. 텔레스가 떠나자 경비병들이 문을 잠갔다.

블레논은 제게 아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궁을 떠나야 했고, 시종과 호위 몇 명만 데리고 유배지로 떠나던 중, 숨진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불명열.

새 황제는 오라비의 시신을 정성스레 수습해 혈족의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른 뒤, 그의 부모 곁에 묻어 주었다.

첼루나와 데아론이 스물두 살이던 해, 가을에 황제가 죽었다. 그 후 황자도 죽었다.

새 황제가 된 황녀는 아버지와 오빠를 예바르게 묻어 주었다.

제국의 관습에 따라 새 황제의 대관식은 선대 군주가 승하하고 나서 석 달 뒤에 거행되었다.

석 달은 오롯이 애도의 기간이므로, 그동안 황궁에는 우중충한 엄숙함이 감돌았다.

새해 초에 거행된 대관식은 그 우중충함을 순식간에 걷어 냈다. 옛것이 새것으로 교체되는 시점은 별수 없이 활기를 동반했다.

원래부터 새 황제를 지지했던 자들은 승리감에 취해 얼굴에서 거의 빛이 났다.

한때는 옛 황태자를 지지했으나 이제는 현실과 타협한 자들도 기왕 섬기게 된 주군께 극진한 예를 갖췄다.

성녀 첼루나는 교회의 수장인 대사제와 함께 신의 뜻을 대표하여 황제를 축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언니와 동생은 제단 앞에서 마주했다. 동생이 언니에게 당부했다.

“부디 훌륭한 제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로는 신의 뜻을 살피고 아래로는 백성의 뜻을 살피며, 늘 굳건한 양심과 법도에 따라 행동하소서.”

의례적인 미사여구에 올곧은 진심이 담겼다. 젊은 황제는 눈부시게 생긋 웃었다.

“그대의 축복대로 될 것이오.”

이 또한 진심이었다. 이 자리에 닿기 위해 양심과 법도를 어긴 적이 수백 번이니, 원하던 승리를 거머쥔 지금이라도 하나씩 갚아 가리라.

예식이 끝났다. 다른 많은 것들은 이제 시작이었다.

장엄한 음악이 새 시대를 알렸고, 고귀한 황제는 위풍당당하게 미래를 향한 걸음을 디뎠다.

첼루나는 벅찬 마음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때로는 꿈같은 느낌에 어질어질했다.

‘이번 생에는 내가 이 장면을 보긴 보는구나.’

지난 생에는 죄인들의 처형 이후로 대관식이 미뤄졌기에, 그전에 회귀한 첼루나는 당연히 기회를 놓쳤다.

‘물론, 회귀하지 않았더라도 기회는 없었겠지.’

폐위된 황자와 함께 사형을 당했을 테니까. 그녀의 마음이 일순 울적해졌다.

명예와 환희의 순간에도 첼루나는 문득문득 그늘을 느꼈다. 이날이 오기까지 죽어야 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올라서.

회귀 전에 한 번 목숨을 잃은 데아론. 기어코 이승을 등진 블레논. 전생보다 일찍 죽은 황제. 예나 지금에나 도통 만날 기회가 없었던 나의 어머니.

이번 생에는 시가전을 피하고도 결론이 났기에 훨씬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고 첼루나는 애써 스스로 위로했다.

자신의 회귀가 그들을 살렸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흐뭇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결말이라 가끔 별수 없는 회한이 가슴을 조였다.

그럴 때면 또다시 첼루나의 눈에는 어둠이 깃들었다.

“공주님, 오늘 수고하셨어요.”

하지만, 그 어둠도 결국은 영원하지 못하리라.

“……고마워, 데아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말해 줬듯, 비구름도 영원하지는 않거든.

“오늘따라 유독 잘생겼네?”

“당신 옆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해질까 봐 오늘 힘 좀 썼어요.”

“초라하기는, 무슨. 이렇게나 잘생긴 내 약혼자께서 무슨 자신감 없는 소리람.”

첼루나는 빙긋 웃으며 데아론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대관식 뒤에는 무도회가 열렸고, 두 연인은 마치 약속한 듯 함께 테라스로 빠져나가 손을 맞잡은 채 서로 다정히 응시했다.

“나도 내가 잘생긴 건 아는데, 당신이 너무 눈부시잖아.”

데아론은 눈매를 명랑하게 휘며 한껏 달콤하게 속삭였다.

첼루나는 맑게 미소했다. 먹구름이 어느새 녹아 사라진, 오직 햇빛만을 담은 눈빛으로.

“나는 네 눈에만 눈부시면 돼.”

첼루나는 데아론의 목에 팔을 감았다. 체온이 맞닿는 이 순간이 기적 같았다. 한쪽의 죽음을 이기고 시간까지 거슬러 되찾은 온기였다.

“사랑해, 데안.”

앞으로도 수백 번을 회귀한다 한들, 나는 또다시 너를 사랑하겠지.

“나도 사랑해, 루나.”

그리고 너 또한 거듭해서 나를 찾아오겠지. 네 다정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내 서글펐던 삶에 빛을 덧칠하며.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지난 생부터 이어진 순결한 마음을 담아.

과거에 못다 한 행복한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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