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14)

바깥에서 소란이 일자, 첼루나를 더듬던 남자들이 저마다 주춤하며 욕설을 뱉었다.

“미친, 저게 무슨 소리야?”

“야, 네가 가서 확인해 봐.”

남자 하나가 일어나 검을 뽑고 방을 가로질렀다. 첼루나는 기분 나쁜 무게에 짓눌린 채 숨을 가늘게 몰아쉬었다.

추잡한 행위가 잠시 중단됐지만, 여전히 그녀는 별 희망이 없었다.

남자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순간, 모든 게 조용했다.

그러다 남자는 곧 외마디 고함과 함께 문을 쾅 닫았다. 분위기는 즉시 어수선해졌다.

“뭐야, 뭔데?”

“젠장, 기사들이야!”

“뭐?”

나머지 남자들도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기사, 라는 단어에 첼루나의 심장이 쿵 흔들렸다.

“야, 어서 무기 꺼내, 어서!”

“씨발, 다 들킨 거면 차라리 도망가는 게—”

건달들의 혼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철문이 난폭하게 열렸고,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이들 역시 전부 남성이었으나, 세련된 제복을 입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소속이 달랐다.

무엇보다, 새로운 무리의 선두에 선 사람이 첼루나의 심중에서 모든 의심을 몰아냈다.

“읍…….”

데아론이 왔다.

데아론의 눈은 이제 들꽃도 금속도 닮지 않았다. 오히려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탈 것처럼 용암 같은 눈빛이었다.

별장 대문을 통과했을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턱대고 저택 지하까지 밀고 들어온 그는 문가에 잠시 서서 딱 한 박자, 그 짧은 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공주님. 재갈을 물린 입과 포박된 손목. 형편없이 찢어진 옷.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흐트러진 차림새.

그의 눈에 고인 용암은 이제 온몸에 역류해 세상을 태우고도 남을 분노를 자아냈다.

그는 난생처음 사람을 향한 살의를 느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었다.

“컥!”

데아론은 마수를 베듯 인간을 베었고, 동정받을 여지가 없는 남자는 단번에 숨이 끊겼다.

앰벌리와 다른 기사들도 공주를 보았다. 그들도 곧 데아론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앰벌리의 눈빛은 가장 유사했다.

누군가 그때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면 곧장 안구가 녹아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데아론은 앞을 가로막는 건달 몇 명을 더 베며 방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벌레보다 못한 그들을 처단하는 건 데아론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곧장 첼루나에게 향했다.

“공주님!”

“흐…….”

신음인지 탄식인지 누군가의 뭉개진 이름인지 모를 소리가 재갈 너머로 새어 나왔다. 첼루나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데아론은 첼루나 옆에 꿇어앉아 재갈을 뜯어내고 포박을 푼 뒤 기사의 망토를 벗어 첼루나의 몸에 둘렀다.

그렇게 연인에게 온기를 더하고 그녀의 속살을 가린 뒤, 한 팔로 감싸며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공주님, 보지 마요.”

공주를 구하러 온 기사들이 건달들을 도륙하는 소리가 들렸다.

데아론은 망토를 위로 끌어 올려 첼루나의 눈과 귀까지 막아 주었다. 그가 간절하게 속삭였다.

“안 봐도 돼요. 이제 다 끝났어. 다 괜찮을 거예요.”

내가 왔잖아. 그는 바로 뒤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오직 연인에게 집중했다.

그가 그녀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첼루나 역시 코앞에서 벌어지는 과격한 장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차피 약 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하여 당장 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녀는 연인의 온기에 파묻혀 다만 조용히 울었다. 생시라 더욱 끔찍했던 악몽의 끝에, 드디어 집에 돌아왔음을 기뻐하며.

건달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거나 투항할 동안 두 사람은 그저 서로 붙들고 있었다.

공주 실종 사건은 그렇게 하루 만에 일단락되었다.

전세는 이제 두 번 다시 뒤집히지 않을 듯했다.

아무도 황태자를 편들지 않았다. 설령 편들고 싶더라도 편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블레논 황태자는 성녀이자 황족인 동복동생의 납치를 사주했으며, 건달들에게 그녀를 겁탈하라고 종용했다.

심지어 그는 남몰래 평민 여자를 돈으로 사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황태자비 소생으로 꾸미려 했다.

황태자비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여자가 증인으로 나섰으며, 나중에 그녀가 출산하고 나면 아이의 친자 검사를 통해 증언의 진위를 판단하기로 했다.

충격적인 보고가 잇따르자 황제의 병세는 급격히 악화했다.

황궁 의사들에게 비상이 걸렸고, 어쩌면 폐하께선 올해를 넘기지 못하실지도 모른다고 궁인들은 저마다 수군거렸다.

크레온 공작과 텔로아 후작을 위시한 귀족들이 황태자의 폐위를 요구하며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황녀 본인도 오빠에게 스스로 물러날 것을 권했다. 황태자는 한동안 잠잠했다.

“적어도 그 여자가 낳은 아이가 전하의 핏줄이 맞는지 입증되고 나서 결정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뼛속까지 지친 표정의 황태자비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황녀와 황태자는 각각 타협안을 받아들여, 적어도 임부가 출산할 때까지는 최종 결정을 미루기로 했다.

이로써 모호한 현상 유지가 이어졌다.

황태자는 처소에 거의 유폐되듯 살아가면서도 원래 자기가 맡은 업무를 묵묵히 해냈고, 황녀는 그중 상당 부분을 나눠 받았다. 황제는 계속해서 오늘내일했다.

그동안 공주는 계속해서 공주궁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작금의 정치적 혼란에 거듭 언급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처소에서 두문불출했다.

납치 당시의 충격이 너무 커서 휴식을 취하느라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이는 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설명이었다.

“공주님, 자. 입 벌려 보세요.”

“……저기, 이제는 내가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

“제가 먹여 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그냥 장단 좀 맞춰 주세요.”

납치 당시의 정신적 충격도 충격이지만 강제로 주입된 약의 후유증이 커서, 첼루나는 한동안 침실에 틀어박혀 몸조리에만 힘썼다.

데아론은 첼루나를 온종일 간호했다. 낮에는 시녀들이 끼어들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밤에도 곁에 남았겠지만, 최소한의 사회적 상식에 따라 데아론은 아침에 일찌감치 왔다가 저녁이 되면 그제야 마지못해 귀가했다.

첼루나가 어느 정도 회복한 뒤에도 데아론의 헌신적인 병시중은 이어졌다.

이쯤 되자 첼루나는 슬슬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연인을 마구 부려 먹기 시작했다.

<데아론, 나 죽 좀 먹여 줘. 숟가락 들 힘이 없어.>

<데아론, 나 양말 좀 신겨 줘. 몸 숙이는 게 너무 힘드네.>

<데아론, 내 머리 좀 빗겨 줄래?>

한마디로 하자면, 어리광이었다.

과거 아플 때 이런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적 없는 첼루나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결핍을 차고 넘치게 해소하길 원했다.

다른 사람은 어릴 때 감기라도 걸리면 부모님이 오셔서 자장가도 불러 주고 열도 재 준다는데, 첼루나의 인생에 그런 기억은 없었다.

이제 그녀의 곁에는 다정한 연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과거의 아픔을 돌아보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모든 상처가 아물어 추억으로만 남으리라. 외로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쓸쓸히 한 번 웃은 뒤 훌훌 털어 버리고 돌아설 수 있겠지.

지금도 그녀는 연인의 온기에 기대어 다소 어린애처럼 굴며 아픈 기억을 하나씩 지워 나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요즘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었다.

원래는 첼루나가 상대방을 부려 먹으며 주도권을 가졌건만, 최근에 데아론은 연인의 민망함을 무시하며 그녀를 정말 아기처럼 보살폈다.

“너, 지금 즐기는 중이지?”

첼루나는 연인을 미심쩍게 흘겨보았다.

데아론 얘, 가끔 보면 은근히 변태 느낌이 난다니까.

데아론은 짐짓 정색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다정한 장난기로 반짝였다.

“왜요, 그렇게 보여요?”

“응, 되게 많이, 무척 그렇게 보여.”

“그럼 정확히 보신 거니까 다행이네요. 자, 공주님, 어서 입 벌려 보세요. 아, 하고.”

졸지에 다섯 살 어린애 취급을 받게 된 첼루나는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어쩌랴, 다 자업자득이거늘.

게다가 어차피 싫은 건 아니었다. 조금 미친 듯이 쑥스러울 뿐이지.

첼루나는 손끝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얼굴을 붉히며 괜히 새침하게 입을 벌렸다.

“옳지, 잘하셨어요.”

데아론은 생글생글 웃으며 첼루나의 입에 숟가락을 쏙 집어넣었다. 첼루나는 따끈한 죽을 오물거리며 연인을 뚱하게 노려보았다.

“너, 두고 봐. 나중에 네가 아프게 되면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괴롭힐 거야.”

“어이쿠, 무서워라. 절대 아프면 안 되겠네요.”

“……그래, 사실 절대 아프지 마.”

첼루나의 눈빛이 그새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데아론의 태도에도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첼루나의 손을 지그시 감쌌다. 그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알겠어요, 절대 안 아플게요.”

그가 다짐했다. 어차피 빈말일 수밖에 없는 약속을 바치면서도 데아론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첼루나는 그의 손을 꼭 맞잡았다.

“데아론, 너 괜찮아?”

“예? 지금 환자는 당신입니다만.”

“거의 다 나았거든? 더는 환자라 볼 수도 없는 상태야. 네가 계속 유난 떠는 거지.”

첼루나는 잠시 발끈했다. 데아론은 다시 장난스러운 태도로 씩 웃었다.

그러나 첼루나가 곧장 말을 잇자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내 말은, 지금 네 마음은 괜찮냐고. 사람을 죽였잖아.”

고통스러운 화제였지만, 첼루나는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만약 데아론이 속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의 얘기를 들어 주고 싶었다. 그가 그녀의 얘기를 늘 들어 주었듯.

“네가 괜찮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야. 어차피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놈들이었으니까 네가 전혀 아무렇지 않다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 그런데 혹시 네가 힘들어한다면…….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

첼루나는 나직이 타일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생에는 그의 상처를 더 생각해 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전생에 데아론이 처음 마수가 아닌 사람을 죽인 건 황태자와 황녀가 막판에 시가전을 벌였을 때였다.

그때 데아론 텔로아는 황녀의 유능하고 충직한 기사로서 황태자 편에 선 병사들을 베고 무수한 공을 쌓았다.

직후, 황태자의 패배가 확정되면서 첼루나 공주도 감금되었다. 연인들은 서로 상처를 보듬을 틈도 없었다.

데아론은 손에 묻은 피의 끈적한 감각이 온전히 지워지기도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도망쳐야 했다.

이윽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시 살생을 감행했고, 본인도 남의 칼에 찔려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때 너의 마음은 어땠을까. 다정하고 온화하여 너를 경멸한 사람에게조차 쉬이 악의를 품지 않는 네가, 직접 누군가의 살을 찢고 뼈를 꺾어 목숨을 거뒀는데.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당위성만으로 마음의 모든 응어리를 풀 수는 없을 테니, 첼루나는 뒤늦게야 연인에게 대화의 기회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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