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낮에 사라졌고, 지금은 벌써 밤이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지체될수록 첼루나의 안전에 대한 확신도 점점 요원해졌다.
‘대체 어디 있어.’
데아론은 얼얼한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평소에는 들꽃을 닮은 따스한 보랏빛 눈이 지금은 금속처럼 싸늘하게 빛났다.
‘첼루나, 제발,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납치 소식을 들은 뒤로 지난 반나절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허기도 갈증도 피로도 느끼지 못했다.
그를 속에서부터 집어삼킨 건 오직 광기에 가까운 공포였다.
“데아론 경, 저기 보십시오!”
누군가 문득 외쳤다. 데아론은 휙 돌아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한 쌍의 인마가 보였다. 그들이 오는 방향이 황궁 쪽임을 알고 그는 심장이 세게 날뛰었다.
“데아론 텔로아 경을 뵙습니다.”
“누가 보냈소?”
데아론은 인사치레를 집어치우고 본론부터 꺼냈다. 하급 기사의 제복을 입은 전령은 즉시 답했다.
“황녀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건 나쁜 소식일까, 좋은 소식일까.
“공주님의 현재 위치 후보를 추리셨다고 합니다.”
일단은, 좋은 소식에 가까웠다.
“관문 수색에 보고할 만한 성과가 있다면 저를 통해 전달해 주십시오. 이후에는 후보 장소 중 가장 가까운 곳으로 속히 이동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보고할 만한 성과는 없소. 공주님은 관문을 통해 수도를 떠나지 않은 듯하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장소가 어디죠?”
“여기 목록과 지도가 있습니다.”
데아론은 전령이 건넨 서류를 기꺼이 받았다. 그는 지면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또한 갈급하게 훑었다.
“목록과 지도는 사본이 있으니 갖고 계셔도 됩니다.”
“고맙소.”
어차피 이미 필요한 건 외웠다. 데아론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은 뒤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예고 없이 시작된 질주에 다른 기사들은 허겁지겁 뒤따라야 했지만, 다들 마음이 급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불평하는 자는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만약 첼루나가 관문을 통과한 흔적이 있다면 텔레스는 수색대 인원을 나누어 일부는 수도 내부를 찾게 하고 일부는 외부로 내보낼 생각이었다.
관문에 그런 흔적이 없다면 적어도 더 효율적인 수색이 가능해진다.
첼루나가 수도 어딘가에 붙잡혀 있단 뜻이고, 그러면 제한된 인원을 분산할 필요 없이 한 도시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이 별다른 위로가 되기엔 수도라는 도시가 지나치게 컸다.
방대하고 복잡한 대도시에서 어찌 사람 하나를 쉽게 찾을 수 있을까.
그때 텔레스에게 실마리를 제공한 건 동생이 정성스레 남겨 둔 꿈에 대한 기록이었다.
기록을 통해 텔레스는 현재 시점에 누가 제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실은 황태자를 따르고 있을지 유추할 수 있었다.
만약 그런 귀족이라면, 이번에도 황태자의 계획에 은밀하게 협조하지 않았을까?
‘자기 별장을 감금 장소로 제공했을 수도 있어.’
귀족의 별장은 사유 재산이라 아무리 황실이라도 대놓고 침범하지 못한다.
평소에는 황실에 굽신대다가도 황제가 자기 권리를 조금이라도 침해하는 것 같으면 폭군이라 비난하며 길길이 날뛰는 게 귀족이니까.
‘사병을 보내서 별장을 뒤졌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그 책임은 모두 내가 지겠지만…….’
텔레스의 낯빛이 일순 흐려졌다. 설마 블레논은 거기까지 노린 걸까? 걱정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텔레스는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 정도 위험은 늘 있었잖아.’
신중함이 중요한 미덕이긴 하지만, 늘 무작정 몸만 사렸다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터.
여태 텔레스는 필요할 때는 도박을 감행할 줄 알았기에 여기까지 왔다. 이번에도 그녀는 자기 직감을 믿고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 밤, 황녀의 명에 따라 여러 수도 귀족의 별장에 황실 사병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닥쳤다.
첼루나는 계속해서 어둠 속에 있었다. 시계도 창문도 없었기에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죽일 거면 언제 죽일지라도 알려 주지.’
두서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다 보니 이제는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다.
포박된 손목의 통증과 딱딱한 방바닥의 냉기보다도 앞으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공포가 더 괴로웠다.
‘당신은 몇 날 몇 시에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죽을 겁니다, 친절하게 예고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
속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첼루나는 발로 애꿎은 벽을 팡팡 걷어찼다.
몸에 주입된 약 기운이 가셨는지 이제는 사지를 힘차게 꾸물대는 게 가능했다.
계속해서 헛된 희망이 스멀스멀 차올라 그녀의 숨통을 옥죄었다.
약 기운은 점점 떨어지고 발목은 아직 묶이지 않았으니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보처럼 낙관적인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오히려 첼루나를 괴롭게 했다.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발은 움직일 수 있었으나 손목은 묶여 있었고, 첼루나는 자신의 정확한 위치조차 몰랐다.
설령 자신이 기적적으로 이 방을 빠져나간다 해도, 복도에 무장한 인력이 쫙 깔려 있으면 어떡할 건데?
회귀 이전의 삶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빼면 그녀는 그저 평범한 스물두 살 여성이었다.
잘 훈련된 장정을 쓰러트릴 만한 초인적인 전술이나 괴력은 없었다.
지독한 체념이 첼루나를 감쌌다. 죽음의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에 데아론이 없다는 게 너무 쓸쓸했다.
‘없으니 다행이지, 뭐.’
이런 위험한 상황에 데아론과 함께할 수는 없지. 그가 지금 자기 옆에 있었다면 훨씬 끔찍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자신의 비참한 고독을 차라리 기뻐하며, 첼루나는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연인의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외로움과 두려움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때, 문이 열렸다. 철이 바닥을 긁는 스산한 소리에 첼루나는 최대한 몸을 틀어 돌아보았다.
여러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첼루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약효가 다했나 보네. 꽤 힘차게 꿈틀거리는 걸 보면.”
“흡……!”
남자 하나가 이죽대며 다가와 첼루나의 입을 천으로 꾹 눌렀다.
처음 기절했을 때 맡았던 시큼한 냄새가 그녀를 압도했다. 정신이 빠르게 혼몽해졌다.
“이제 얌전히 있어, 공주님. 괜히 저항하면 피차 피곤해지니까.”
‘그게 무슨……?’
첼루나는 희미하게 신음했다.
정신을 아예 잃을 정도로 약 기운이 짙지는 않아서 안개 너머로 관찰하듯 남자의 얼굴이 뿌옇게 보였다. 몸에는 힘이 전혀 없었다.
“우릴 고용하신 분들이 그러더라. 이왕 창녀로 만들 거 제대로 해야 한다고. 질에 여러 명의 정액이 남아 있으면 소문을 만들기도 더 쉬울 거라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돼. 첼루나의 무기력한 몸에 비명이 차올랐다.
남자들은 짐승처럼 몰려들어 첼루나의 팔을 잡고 치마를 걷었다. 불결한 감촉이 느껴졌다.
“뒤지는 순간까지 남자랑 자다가 시체로 발견된 성녀라니, 얼마나 자극적이야.”
첼루나가 처녀가 아닌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정신 나간 황태자는 동생을 더욱 철저히 망가트리길 원했다.
죽은 성녀가 모두의 조롱거리가 되도록. 그 누구도 공주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하도록.
만민이 엽기적인 스캔들에 정신이 팔려 가짜 황손의 소식 따위 신경 쓰지 않도록.
“덕분에 우리야 재미 좀 보는 거지, 어?”
첼루나의 허벅지에 올라탄 사내가 승냥이처럼 웃었다. 첼루나는 이제 절망할 힘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최후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벌레들의 음욕에 짓밟혀 수모를 당하다가 근처에 사랑하는 사람 하나 없이 쓸쓸하게 죽어 가는 것.
회귀의 이유는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첼루나는 회귀를 제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로 여겼지만, 알고 보니 그딴 게 아니라 그저 형벌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삶의 끝에 자신을 위해 희생한 연인을 두고 혼자 도망쳤으니, 그 비겁함과 잔인함의 죗값을 이런 식으로 받나 보다.
전생에 고결하게 희생했던 너는 명예롭게 살고, 비겁하게 도망쳤던 나는 부끄럽게 죽겠구나. 어찌 보면 처절하게 공평한 결말이었다.
‘데아론…….’
첼루나는 아득하게 연인을 불렀다. 그러나 짐승들의 게걸스러운 손짓과 옷 찢기는 소리에 모든 게 묻혔다.
그때, 바깥에서 소란이 일었다.
데아론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어느 귀족의 별장 앞에 도착했다. 도시의 변두리에 자리한 한적하고 예쁜 곳이었다.
데아론은 지금 주변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라크문 경!”
별장 대문 앞에는 이미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공주궁에서 달려온 인원이었다. 데아론은 그중 선두에 선 남자를 알아보고 냅다 외쳤다.
“데아론 경?”
앰벌리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다른 공주궁 기사들은 황녀의 기사들을 알아보고 예를 갖췄다. 오직 데아론과 앰벌리만 다급하게 눈을 맞췄다.
“그대도 황녀 전하께서 보내셨습니까?”
“네, 공주님이 여기 계실지도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런데 뭐 해요, 어서 안 들어가고.”
평소에 친절하고 예의 바른 데아론은 상대방의 말을 자르며 왈칵 짜증을 냈다.
앰벌리는 당황하거나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 역시 지금 예법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앞이 막혔습니다.”
앰벌리는 차갑게 가리켰다. 데아론은 돌아보았다. 귀족 가문에 속한 경비병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대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들여보내 주지 않더군요. 공식 황명 없이는 문을 열 수 없다며—”
“비키세요.”
데아론은 또다시 상대방의 말을 잘랐다. 이제는 다른 공주궁 기사들의 기분이 상할 지경이었다. 지금 황녀궁의 위상이 더 높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그러나 데아론은 자신의 평판이나 황녀궁 기사들과 공주궁 기사들의 미묘한 알력 따위에 관심 없었다.
그는 말고삐를 당겨 앰벌리를 지나치며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기사들은 경악했고 경비병들은 기겁했다.
데아론은 대문에 건 자물쇠를 단숨에 내리쳤다. 쨍! 파열음과 동시에 금속이 갈라졌다.
“비켜.”
데아론이 씹어 뱉었다. 경비병들은 오직 생존 본능에 따라 후다닥 흩어졌다.
데아론은 헐거워진 자물쇠를 발로 걷어찬 뒤 검을 도로 집어넣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랴!”
말은 그대로 돌진했다. 잘 훈련된 기마는 아직 반쯤 닫혀 있던 대문을 박치기 한 번으로 열어젖히고 주인의 재촉에 따라 어둠을 가로질렀다.
다른 기사들도 곧장 뒤따랐다. 누군가는 데아론 텔로아의 무식한 정면 돌파에 살짝 얼이 빠졌지만, 대부분은 그저 차가운 목적의식으로 눈을 번뜩였다.
앰벌리는 단숨에 데아론을 따라잡았고, 두 남자는 대등한 속도로 앞만 보며 내달렸다.
목적지가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