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지금……. 무슨…….’
생각을 이어 나가는 것조차 힘겨웠다. 첼루나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재갈이 우그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기사도 아니야. 저 억양도 걸음걸이도 정식으로 기사 훈련을 받은 자의 것이 아니야. 아무 용병이나 고용한 거야. 나중에 언제든 입막음을 위해 제거할 수 있도록.’
첼루나는 가늘게 새근덕대며 억지로 추리를 이어 붙였다. 눈가에 고였다가 속눈썹에 맺힌 눈물이 뺨의 굴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내가 처녀인지 아닌지 확인한 이유는…….’
정숙한 여인은 반드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둥, 그런 고리타분한 헛소리에 첼루나는 개인적으로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고리타분한 헛소리가 여전히 사회의 굳건한 통념임은 틀림없었다.
‘내가 만약 처녀가 아닌 상태로 시체가 되어 나타나면…….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지……?’
성녀가 죽었다. 그런데 부검해 보니 처녀가 아니더라. 사내와 관계한 흔적을 적나라하게 남긴 채로 죽었다. 그렇게 되면?
‘욕을 더럽게 많이 먹겠지.’
실은 성녀가 아니라 요녀였다, 한낱 천박한 창부다, 백성과 교회와 황실을 기만했다, 온갖 개소리를 덧붙이기 딱 좋겠지.
‘오래오래 기억될 가십일 거야. 아마 이 스캔들로 몇 년은 버틸걸. 살인 사건에 염문에, 온갖 자극적인 요소는 다 들어가 있잖아. 그럼 나와 친했던 황녀 전하도 덩달아 욕먹고, 또…….’
또, 설령 황녀가 황태자의 가짜 아들 스캔들을 제때 터트린다 해도.
‘블레논의 죄는 묻히겠지.’
황태자비의 아들로 알려졌던 아이가 가짜라고 판정된 게 문제가 아니다. 우리 성녀님이 처녀가 아니었다니까? 남자가 끊이지 않았대!
‘물론 워낙 심각한 사안이라 아예 묻히지는 않겠지만, 파문의 위력이 줄어들겠지.’
심지어 황녀 측이 성녀에 대한 소문을 묻기 위해 또 다른 소문을 조작했을 뿐이라고 황태자가 반박할 수도 있었다.
‘아, 어떡해. 어떡하지?’
눈물이 점점 더 많이 떨어졌다. 이 상황이 막막해서, 곧 죽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서, 죽음 후의 일이 걱정돼서, 절망이 몰려왔다.
‘제발, 아무나……. 제발 누가 나 좀 구해 줘…….’
데아론, 데아론, 데아론. 이곳에서 나를 꺼내 줘.
첼루나는 탈진하듯 눈을 감았다. 바닥없는 무의식이 그녀를 삼켰다.
텔레스는 공주궁에 도착했다. 그녀는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공주궁에 딸린 기도실이었다.
‘그 애는 항상 준비성이 철저했어.’
텔레스는 활활 타는 파란 눈으로 기도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심호흡으로 평정을 다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약 첼루나가 정말로 이럴 때를 대비했다면……. 단서가 적힌 비밀 문서라도…….’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텔레스는 다시금 냉철한 행동력을 쥐어짰다.
그녀는 동생이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 가능성을 떠올렸고, 이에 대비해 공주궁에 해결책의 실마리를 숨겨 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블레논이 언제든 나뿐만 아니라 그 애까지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건 우리가 평소에 충분히 얘기한 부분이니까.’
만약 첼루나가 단서를 숨겨 놨다면 어디일까? 텔레스는 우선 기도실을 떠올렸다.
종교와 신앙이 중요시되는 제국에서 기도실은 예배당만큼이나 거룩한 공간으로, 다른 사람이 함부로 헤집을 수 없었다.
설령 황태자가 사람을 보내 공주궁을 뒤지더라도 기도실만큼은 세간의 눈치를 보느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도실은 적절한 은폐의 장소였다. 텔레스는 분석을 이어 갔다.
‘기도실의 어디?’
첼루나의 키가 얼마쯤 되더라. 동생은 언니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텔레스는 제 눈높이보다 한 뼘쯤 낮은 구간을 훑었다. 서랍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유사시에 본인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어야 하니까, 아마 본능적으로 자기 눈높이에 맞췄겠지.’
첼루나 정도 키면 이 정도 높이에서 손이 가장 쉽게 닿을 거다. 텔레스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쪽을 매만지자 매끈한 나무가 느껴졌다. 그러다가.
‘앗.’
덜컥, 하고 이물질이 걸렸다.
‘이건…….’
조심스레 살짝 잡아당기자, 단추가 풀리듯 톡! 하는 소리와 함께 서랍 바닥이 스르르 열렸다.
텔레스는 열린 공간에 손을 집어넣었다. 두툼한 봉투가 딸려 나왔다.
[텔레스 황녀 전하께.]
첼루나의 길쭉한 글씨체가 텔레스를 맞이했다. 그녀는 지면에 적힌 줄글을 다급하게 읽었다.
[제가 여태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에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거의 삶 하나를 통째로 사는 것처럼 긴긴 꿈이었습니다.]
첼루나는 자신이 혹 중간에 잘못되더라도 텔레스는 끝까지 살아남아 전생에 그랬듯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데아론도 무사할 테니까.
전생에는 회귀자의 도움 없이도 승리했으니 첼루나 혼자서만 기억하는 지난 삶이 텔레스에게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으나, 첼루나는 혹시 몰라 모든 걸 기록했다.
회귀라는 단어는 당연히 설명하지 않았다. 첼루나는 그저 자신이 성녀의 예지력을 통해 매우 길고 자세한 꿈을 꾼 것처럼 꾸몄다.
첼루나는 전생에 있었던 다양한 사건과 복잡한 인간관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또 자세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그 기록을 기도실에 숨긴 채 필요하다면 언니가 이를 유용하게 써먹기를 기도했다.
[꿈속에서 저는 황녀 전하의 적이었으며 전하는 끝내 승리하시어 권좌에 앉으셨습니다. 저는 반역자의 동복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고요. 꿈에서 깬 저는 그 꿈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 황녀 전하를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텔레스는 속독했다. 이 놀라운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5년 전 어째서 첼루나가 갑자기 제게 충성하고 싶다고 찾아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꿈속의 삶은 현실의 삶과 매우 닮은 듯 닮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꿈에서 보고 들은 모든 걸 전하께 말씀드리지 않고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골라서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들어,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신다는 사실과 그 날짜 같은 거요.]
텔레스는 진지한 눈빛으로 종이를 넘겼다. 편지는 상세하게 이어졌다.
[나머지를 전부 곧장 말씀드리지 않은 건 전하께서 꿈속 상황에 얽매여 정작 바른 선택을 내리지 못하실까 봐 두려워서였습니다. 모든 게 꿈대로만 흘러갈 거라고 안일하게 넘겨짚었다가 변수가 생기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혹 제 이야기가 전하를 방해할까 봐 말을 삼갔습니다.]
실제로 지난 생과 이번 생은 많은 부분에서 닮은 듯 달랐다. 전생과 달라진 첼루나의 행동이 차이점을 만들었다.
물론, 그 부분까지는 편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 정보가 전하께 유용하게 쓰일까 싶어 편지로라도 모든 걸 고합니다. 혹시 제가 잘못된다면 이 편지를 보시고 부디 요긴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뒤따른 정보는 방대했다.
꿈속에서, 사실은 전생에서 누가 언제 병으로 죽고 언제 사고로 죽는지.
어떤 귀족이 누구와 결혼하고 어떤 시종이 누구와 야반도주하는지.
어떤 가문이 끝까지 황태자에게 충성하고, 어떤 가문이 막판에 배신하는지.
역으로 어떤 집안이 끝까지 황녀에게 충성해 공신의 영예를 얻고 어떤 집안이 황녀를 배신해 평생의 후회를 얻는지, 구구절절 연도별로 적혀 있었다.
[이건 모두 오로지 꿈속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하께서 이 편지에 적힌 이름들을 보시고 선입견을 품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꿈과 실제는 다른 점도 많으며 아마 점점 더 많이 달라질 겁니다. 부디 참고만 해 주세요.]
텔레스는 정보 과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막판에 황태자를 배신하고 자기 쪽으로 넘어온다는 가문 이름과 역으로 자기 대신 황태자에게 간다는 가문 이름을 샅샅이 살폈다.
텔레스는 끝까지 황태자를 따르다가 망하는 가문 명단에 프란체스의 이름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래서 내게 선입견을 주의하라고 했군.’
텔레스는 수긍했다. 현재 프란체스 백작가는 아델라의 활약 덕에 거의 온전히 자기 수중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과연, 꿈과 실제는 달랐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달라지리라.
텔레스는 편지를 한층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녀는 올해 연도를 확인했다.
현재 기준으로 그녀를 따르는 자와 황태자를 따르는 자, 그리고 둘 중 한쪽을 따르는 척하며 실은 상대편을 위해 첩자로 일하는 자가 꼼꼼히 나열되어 있었다.
첩자의 이름을 확인한 텔레스의 얼굴이 굳었다. 친근한 이름이 하나 보였다. 지금도 제게 열렬히 충성하는 어느 수도 귀족의 이름이었다.
‘실제로도 이 사람이 첩자라면?’
만약 꿈과 실제가 일치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도 제게 충성하는 척하는 황태자의 부하일 터.
‘만약, 그렇다면…….’
첼루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조금은 사건의 실마리가 잡혔다.
텔레스는 동생이 정성 들여 작성한 서류를 움켜쥔 채 서랍 문을 닫았다. 그녀는 재빠른 걸음으로 기도실을 벗어났다.
그사이 벌써 해가 졌다. 이제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데아론은 황녀의 명에 따라 수도로 통하는 모든 관문을 차례로 검사 중이었다.
만약 납치범들이 공주를 수도 바깥으로 빼돌렸다면 별수 없이 관문을 통과했을 것이므로.
그러나 관문의 문지기를 닦달하고 구슬리고 위협해도 데아론이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 어떤 수상한 무리도 오늘 관문을 거치지 않았으며, 공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도 보인 적 없었다.
공주가 진정 관문을 통해 수도를 빠져나갔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즉, 남은 가능성은 세 개였다.
첫 번째, 공주가 아직 수도에 있을 가능성. 납치범은 공주를 몰래 어디 으슥한 시골로 빼돌리지 않고 수도 어딘가에 꼭꼭 숨겨 두고 있다.
두 번째, 관문이 아닌 다른 기상천외한 경로로 납치범이 수도를 빠져나갔을 가능성.
세 번째, 공주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
“젠장……!”
마지막 관문의 수색마저 헛수고로 돌아가자 데아론은 사납게 욕하며 애꿎은 벽을 쾅, 내리쳤다. 튼튼한 승마용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그 충격에 손이 얼얼했다.
다른 기사들이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에 온화하고 다정해 무르다는 평마저 듣던 데아론 텔로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지금 미치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