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14)

텔레스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눈앞의 미친놈이 자신과 같은 핏줄이라는 게 부끄럽기를 넘어 정말로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영리하고 냉정하여 최소한의 선이란 걸 알던 작자였다.

그런데 최근에 여자를 돈으로 사서 황손을 얻으려고 하지 않나, 동복동생을 납치하질 않나, 갈수록 가관이었다.

물론, 블레논이 첼루나를 납치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심증은 차고 넘쳤다.

오늘 잠깐 외출했던 공주가 갑자기 증발하듯 사라졌다. 여태 공주궁과 황녀궁 사람들이 반나절이 넘도록 수색했으나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이토록 뜬금없는 행방불명이 자발적인 것일 리가 없으며, 일국의 황족을 이토록 감쪽같이 빼돌릴 수 있는 자는 같은 일국의 황족뿐이다.

황녀는 자기 부모의 결백을 믿었다. 지금 저들에게 호의적인 성녀가 사라져 봤자 황후 모녀가 얻는 이득은 전혀 없었다.

비록 막내딸을 미워하기는 하지만, 최고 권력을 가진 황제가 이토록 번거롭고 비겁한 방법으로 해코지할 리는 없다. 차라리 그냥 적당한 죄목을 씌워 쫓아내면 모를까.

그러니 처음부터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황태자였고, 지금 이놈의 태도를 보니 텔레스의 의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정신을 차리면, 뭐? 앞으로 계속 제정신으로 살 수 있도록 네가 얌전히 황궁에서 꺼져 줄 건가?”

블레논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웃음기는 없었다.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조언 같은 걸 건넬 처지는 아닌 것 같아. 이제 제발 사라져 줄래, 동생아? 네가 제 발로 나가지 않으면 시종들에게 널 끌어내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황족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거든.”

블레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텔레스는 일순 느껴지는 지독한 위압감에 무심코 움찔했지만, 결코 물러서지는 않았다. 남매는 지척에서 서로 쏘아보았다.

“같은 황족으로서 배려해 줄게.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나가.”

블레논이 씹어 뱉었다. 대치는 한동안 이어졌다. 결국 먼저 돌아선 건 텔레스였다.

블레논의 눈빛에서 슬슬 진짜 살의가 느껴졌을뿐더러, 여기서 더는 낭비할 시간도 없었다.

“미치려면 곱게 미쳐, 블레논.”

텔레스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블레논은 다시 나른하게 웃었다.

“너나 잘해, 텔레스.”

텔레스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성큼성큼 걸었다. 밖에서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던 호위가 곧장 뒤따랐다.

‘여기 와서 딱 하나 건졌네. 저놈이 범인인 게 확실해.’

텔레스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적어도 오늘 낮에 첼루나가 사라진 게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는 건 방금 황태자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숨겼어?’

단순히 막냇동생이 거슬려서 치워 두겠다는 목적으로 블레논이 황족 납치라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 리는 없다.

게다가 그냥 황족도 아닌 성녀였으니, 실종 사건의 파문은 별수 없이 거대했다. 벌써 소식을 주워들은 귀족들과 사제들은 난리가 났다.

이 정도 시끄러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일을 저질렀다면 분명 더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대체 뭐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황녀 전하!”

“소식은?”

“황태자궁의 하녀들이 떠들고 있습니다. 첼루나 공주님이 최근에 밤마다 침실로 남자들을 부르셨다는 내용을요.”

“뭐?”

황녀궁에 도착하자마자 접수한 정보를 듣고 텔레스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방금 첩보를 전한 세작은 몹시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의 분위기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황태자궁에 유독 집중적으로 공주님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 미친…….”

텔레스는 밀려오는 두통에 나지막이 탄식했다.

공주가 사라진 바로 당일에 공주에 대한 추잡한 악담이 퍼지기 시작한다, 라. 지나치게 의도적이라 놓칠 수도 없는 수작이었다.

‘설마.’

텔레스의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블레논이 어떤 이유로 첼루나를 납치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추론이 정확한지를 떠나서, 첼루나를 어서 찾아야 했다.

첼루나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느리게 떴다. 사실, 머리뿐만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

첼루나는 손목이 뒤로 묶여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혀의 운용이 불가능했다.

발목은 자유로웠으나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현재 첼루나는 마약이라도 삼킨 듯 정신이 몽롱하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발목이 풀려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도주를 시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첼루나는 간신히 시선만 굴려 자신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럴싸한 실마리는 없었다. 눅눅한 공기와 어두운 조명을 고려했을 때 일종의 지하 감방이라는 사실만 확실했다.

‘지하는 싫어…….’

첼루나는 흐리게 신음하며 덧없이 몸을 틀었다. 전생의 기억이 쏟아져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축축하고 어둑하던 황궁 감옥, 패배자의 동복동생인 그녀가 하릴없이 죽음만 기다리던 곳.

그곳에서 나와 데아론을 만났으나, 이후 뒤따른 일들도 절대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끝은 결국 죽음이었다. 본인의 죽음이냐 연인의 죽음이냐, 그 차이만 있을 뿐.

그리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첼루나는 주저 없이 전자를 택하리라.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부질없는 발버둥이 이어졌다.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결론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그 발상 자체가 너무나 황당하여 곧장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블레논이 이런 거야? 왜? 날 죽이려고? 내가 시체로 발견돼 봤자 걔한테 좋을 게 없잖아. 사람들은 당연히 걔를 의심할 텐데…….’

설마, 황녀 측에서 자작극을 벌이려는 걸까. 성녀를 납치해 살해한 뒤 황태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러나 제 언니가 그런 막장 소설 같은 방법을 택하지는 않을 거라고 첼루나는 굳게 믿었다.

자신이 죽어서보다는 살아서 훨씬 쓸모가 있다는 걸 황녀 전하도 분명 아실 테니.

‘그리고 블레논이 이랬다고 믿는 게 훨씬 덜 비참해.’

첼루나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 언니가 이런 어이없는 방식으로 저를 배신했다고 믿느니, 항상 미워했던 오빠의 술수에 얌전히 죽는 게 나았다.

다만, 만약 정말로 블레논이 범인이라면 첼루나는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이런다는 가설을 쉬이 수긍할 수 없었다.

아직도 제 오빠에게 아주 조금의 가족애라도 기대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미련함은 씁쓸하게도 오래전 이미 버렸다.

첼루나는 블레논의 우애가 아닌 그의 지능을 믿었다. 본인이 자동으로 가장 명백한 용의자가 될 만한 상황을 만들려는 이유가 대체 뭘까.

‘미치겠네, 진짜.’

첼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엉엉 울고 싶은 마음에 눈시울이 따끔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낯선 곳에 묶인 채 덩그러니 버려진 것도 서러운데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머리는 아프고, 그 와중에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숨통을 옥죄었다.

이곳은 정확히 어디며 범인은 대체 누구인가?

시간은 대관절 얼마나 흘렀으며, 엘리나와 앰벌리와 황녀 전하와 데아론은 지금쯤 나를 찾고 있을까.

‘……데아론.’

아아, 데아론.

‘보고 싶어.’

걱정할 텐데. 거의 나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막막하고 겁에 질려 제정신이 아닐 텐데.

‘괜히 나 찾는다고 무리하다가 다치는 건 아니겠지.’

오직 연인을 위한 근심만이 본인을 위한 공포를 밀어냈다.

자신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을지 몰라 두려운 와중에도 데아론을 떠올리면 전혀 다른 고통으로 명치끝이 날카롭게 아렸다.

그토록 심란하고 괴로운 상태에서 첼루나는 고작 몇 분, 또는 장장 몇 주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견뎠다.

일순인지 영원인지 모를 기다림 끝에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 첼루나는 겁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 깼네.”

사람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였고, 남자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으나 기사 같지는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 첼루나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날 정말 죽이려나 봐.’

나중에라도 첼루나를 살려 보낼 생각이었다면 복면을 쓰거나 첼루나의 눈을 가렸을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그녀가 상대방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그들을 고발하지 않을 테니까.

저렇게 얼굴을 감추려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첼루나가 저들의 얼굴을 기억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왜냐하면, 기억해 봤자 어차피 곧 죽을 테니.

첼루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검진하시오.”

검을 찬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첼루나 옆에 꿇어앉았다.

여자가 다짜고짜 그녀의 치마를 걷기 시작하자 첼루나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기겁했다.

“읍?!”

첼루나가 움찔거렸다. 여전히 모종의 약물 때문에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행동에 제약이 컸다.

그녀는 성질머리대로 상대방을 걷어차지도 못하고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쳐다보았다. 여자는 첼루나의 시선을 외면하며 손을 뻗었다.

“흡……!”

재갈과 약물만 아니었다면 첼루나는 이미 쌍욕을 줄줄이 쏟아 내고도 남았을 거다. 여자의 손이 첼루나의 다리를 벌리고 멋대로 안쪽을 더듬었다.

“처녀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아닙니다.”

환부를 살피는 의사처럼 첼루나의 몸을 쿡쿡 만져 보던 여자가 남자에게 공손히 아뢰었다. 남자가 저속하게 웃었다.

“그럼 귀찮게 증거 만들 일도 없겠구먼. 고귀하신 성녀님도 할 건 다 하고 다니나 봐, 어?”

진짜 죽이고 싶다. 첼루나는 수치심과 분노로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를 포악하게 쏘아보았다. 여자는 첼루나의 치마를 다시 내린 뒤 조용히 물러났다.

“수고했다. 이제 가도 돼.”

남자가 여자에게 손짓했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방을 떠났다.

음습한 공간에 첼루나와 단둘이 남은 남자는 탁한 눈을 게슴츠레 뜨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첼루나의 심장이 아까와는 또 다른 공포로 부풀었다.

“다른 놈이 이미 따먹은 걸 내가 못 먹을 이유는 없지, 안 그래?”

남자의 속삭임이 첼루나를 뱀처럼 옭아맸다. 첼루나는 혐오마저 초월하는 어떤 감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뭐, 괜히 성녀님 건드렸다가 천벌 받기는 싫으니까.”

남자가 또다시 이죽댔다. 그는 첼루나를 발끝으로 몇 번 쿡쿡 찔러 보더니 돌아서서 역시 방을 나갔다.

첼루나는 여전히 이 어둡고 축축한 공간이 싫었으나, 이곳에 다시 혼자 남겨졌다는 이유만으로 조금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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