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14)

“너무 고민이 많으셔서 그래요. 물론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마음 편히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당신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데아론은 첼루나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첼루나는 보드라운 온기를 느끼며 눈을 내리감았다. 연인의 마약 같은 감촉 덕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첼루나, 저는 당신이 황녀 전하 같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데아론이 속살거렸다. 그가 쓰다듬는 손길에 따라 첼루나의 뺨과 목에 열이 번졌다.

“꼭 황녀 전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다른 분이잖아요, 당신은. 저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요. 다른 누구도 닮을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냥 당신이야.”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첼루나가 웃었다. 그녀는 데아론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먼저 입술을 포갰다. 더운 숨결이 간지럽게 뒤엉켰다.

“이런 너랑 만나는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야, 그렇지?”

“그러게요. 당신한테 이런 말을 듣는 저도 참 복 받은 사람이에요.”

“나도 있는 그대로의 네가 좋아. 넌 이미 완벽해.”

“감사합니다, 첼루나.”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첼루나는 데아론의 몸을 제게 붙이며 그의 입술을 갈급히 빨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혀끝에 녹았다.

“너를 만난 게 내 인생 최대의 행복이야.”

어차피 너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었어. 끝까지 외롭고 까칠하고 미움받는 공주로 살다가, 회귀 같은 것도 없이 일찌감치 죽었겠지.

첼루나는 제 인생의 행복이자 의미 되는 남자를 껴안고 그의 입술을 오래오래 맛보았다.

곧, 날씨는 별로 춥지 않게 느껴졌다. 연인들의 지순한 정열 앞에서 꽃샘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첼루나, 사랑해요.”

그는 항상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녀도 항상 진심으로 답했다.

“나도 사랑해, 데아론.”

설령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회귀의 시간 때문에 서로의 기억이 어긋났어도.

그래도 사랑은 이어졌다.

황손을 밴 여자가 사라졌다. 비밀을 아는 황태자의 측근들은 발칵 뒤집혔다.

오히려 가장 침착한 건 황태자 본인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첼루나야.’

블레논은 본능처럼 직감했다.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이번 일을 다른 누가 어찌 알아냈을까.

사람이 언제 병을 얻어 쓰러질지마저 예측할 수 있는 위대하신 성녀님이었다. 이번에도 그녀의 짜증 나는 초인적 힘이 황태자의 앞길에 훼방을 놓았다.

‘설령 그 애가 아니라고 해도…….’

최근에 임신한 그 여자를 누군가 빼돌렸다는 건 그 누군가가 황태자의 비밀을 폭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은 조용한 걸 보니, 아마 여자가 아이를 출산한 뒤에야 스캔들을 만들려는 거겠지.

아이가 태어나면 친자 검사를 통해 황태자의 핏줄임을 증명할 수 있으니.

‘그전에 내가 선수를 쳐야 해.’

언제 어디서 비밀이 밝혀져 자신의 이름이 진창에 처박힐지 알 수 없었다. 그전에 자신이 먼저 소문을 만들어야 했다.

설령 자신이 평민 여자를 돈으로 사서 임신시켰다는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더라도, 그전에 이미 시작된 다른 소문이 그 사실을 말끔히 덮어 버리도록.

가십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가십을 던져 주면 된다. 자기에게 불리한 스캔들이 터지기 전에 다른 스캔들을 흩뿌리면 그만이다.

블레논은 화려한 무대를 준비했다. 이게 궁지에 몰린 작자의 처절한 발악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황녀가 빼돌린 여자는 은신처에서 착실히 배가 불러 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이는 가을쯤에 태어날 테고, 그때 황녀는 황태자를 공격할 수 있겠지.

‘이러다 황제가 전생보다 더 일찍 죽는 건 아닐지 몰라. 충격으로 인한 심장 마비 때문에.’

첼루나는 심란하게 고민했다. 전생에 사람들이 황태자비의 가짜 아들에 대해 알아낸 건 황제의 승하 직후였다.

적어도 황제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제위를 갖기 위해 어떤 헛수작을 부렸는지 영영 알아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번에 아들은 자신의 치부를 아비에게 적나라하게 들키고 말 것이다. 충격받은 황제의 죽음이 앞당겨지면 어떡하지? 첼루나는 마음이 거북해졌다.

‘그딴 놈도 아비라고…….’

혈육의 정이 대체 뭔지, 아빠의 임박한 죽음과 오빠의 예정된 몰락을 생각하자 가슴이 이상하게 답답했다. 첼루나는 저도 모르게 푹 한숨지었다.

“공주님, 혹시 피곤하십니까? 환궁할까요?”

“아니야, 괜찮아, 엘리나.”

첼루나는 오랜만에 시녀와 함께 외출했다. 교회 방문은 언제나처럼 적절한 핑계였다.

봄기운이 짙어지자 날씨가 훈훈하여 시내에서 산책하기에 딱 좋았다.

그간 여러 가지 이유로 궁에만 틀어박혀 있던 첼루나는 이번 기회에 바깥 공기를 쐬기로 했다.

얼핏 보면 첼루나와 엘리나 단둘이 돌아다니는 듯했지만, 사실 주변에는 공주의 안전을 위해 사복 차림으로 맴도는 호위병들이 있었다.

이제는 제게 당연하게 따라붙는 호위 인력을 생각하면 첼루나는 기분이 묘했다. 예전에는 호위는커녕 변변찮은 시녀 하나 없었는데.

‘팔자 폈네, 첼루나.’

첼루나는 다소 씁쓸하게 생각했다.

외면받는 게 일상인 천덕꾸러기 공주에서 어엿한 황족 취급받는 성녀님이 되었다. 전생과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배부른 소리긴 하지만, 사람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려니 불편하긴 해.’

과거에 첼루나는 고독한 만큼 자유롭기도 했었다.

이제 시중과 호위를 이유로 주변에 아랫사람이 넘쳐 나니 편안하긴 했지만 그만큼 어색한 점도 있었다.

그래도 이 모든 게 결국 자신의 안전을 위함임을 알기에 첼루나는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경계 외에도 언니의 조언에 따른 조심성이 더해졌다.

<황태자 쪽에서 널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 항상 주의해라. 이젠 너도 거의 나만큼이나 중요한 인물이라는 점을 명심해.>

첼루나는 언니의 타이름이 감격스러우면서도 거북했다. 황녀의 자신을 위한 걱정이 어디까지 정략이고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서.

‘……생각하지 말자.’

회의감과 서운함은 과거에 묻어 두자. 어차피 자신도 계산적으로 접근했으니 상대방에게 완벽한 자매애를 요구할 자격은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 느낀 친밀감만으로도 전생의 상처는 조금 아물었기에, 첼루나는 큰 씁쓸함 없이 언니의 복합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히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미래의 조카를 어찌 처분할지 텔레스가 아직 확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생각해 보겠다는 약속 뒤로 텔레스는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가 먼저 물어보면 역효과만 나려나?’

첼루나는 잠잠히 궁리했다. 이때 문득 앞쪽에서 소란이 터졌고, 첼루나는 주춤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번 알아볼까요?”

첼루나가 까치발을 들고 정면을 살피자 옆에서 엘리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른 행인들도 저마다 웅성대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뭔 사고라도 난 것 같은데.”

“거참, 밀지 좀 마요!”

“뭐야, 앞에 뭐 있어?”

“꺅, 엄마!”

근방에서 마차 사고라도 났는지,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은 더는 앞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쪽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난데없이 응축된 인파에 떠밀려 첼루나와 엘리나는 반강제로 뒷걸음질했다.

사람들이 밀치고 당기고 뒤엉키는 느낌에 첼루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공, 아가씨!”

엘리나가 다급하게 불렀다. 사람들이 중간에 끼어들면서 시녀와 공주의 간격이 멀어졌다. 첼루나는 미처 돌아볼 틈도 없이 인파에 휩쓸렸다.

“엘리나!”

첼루나는 당황해서 응답했으나, 이미 상대방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첼루나의 당혹이 깊어졌다. 괜한 위화감에 뒷덜미가 오싹했다.

‘뭔가 이상해……!’

딱히 논리적인 이유도 없이 들짐승 같은 감각이 그녀의 무의식에 자꾸만 경고음을 속삭였다. 하지만 첼루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짐짝처럼 떠밀렸고, 사람들의 발에 옷자락이 밟히는 걸 피하고자 옆으로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으슥한 골목으로 내몰렸다.

“윽.”

하도 거칠게 밀려나서 온몸이 얼얼했다. 첼루나는 까칠한 한숨과 함께 외투에서 먼지를 툭툭 털어 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위들은 어디 있지?’

그녀의 신경이 다시 바짝 곤두섰다. 엘리나는 어디 있으며 호위들은 어디 있는가? 아마 방금 그 난리에 휩쓸려 뿔뿔이 흩어진 듯했다.

여전히 시끌벅적한 큰길에 비해 이곳 골목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첼루나의 심장 박동이 위태롭게 빨라졌다.

첼루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여기 혼자 계속 있느니 차라리 큰길에서 인파에 압사당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첼루나는 후다닥 걸음을 뗐다.

“흡……!”

그러나 얼마 가기도 전에 억센 손에 붙들렸다.

두툼한 천이 입을 가로막고 뾰족한 무언가 팔뚝을 찔렀다. 미처 비명을 지르기도 전, 첼루나는 기절했다.

축 늘어진 공주의 몸이 땅에 부딪히기 전 누군가 그녀를 품으로 받았다. 그자는 날쌘 몸짓으로 금방 현장을 벗어났다.

공주의 호위들은 간발의 차이로 납치범을 놓쳤다.

품위를 중시하는 자기 이복동생이 왜 이 늦은 시각에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왔는지 블레논은 알 것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야? 텔레스 황녀 전하.”

블레논은 느긋하게 비꼬며 텔레스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의 속마음은 전혀 느긋하지 않았다.

최근에 계속 일이 틀어지고 꼬이고 어긋나서,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은 계속 그를 방해할까. 왜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들은 자꾸 그를 괴롭힐까.

왜 마땅히 그의 몫인 권좌를 탐내고 그에게 당연히 주어진 미래를 질투하며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걸까, 대체 왜.

온 세상이 나서서 그를 핍박하는 듯한 착각에 블레논은 정신이 혼미했다. 그는 이미 반쯤 돌아 버린 눈빛으로 황녀를 삐딱하게 응시했다.

“첼루나 어디 갔어?”

황녀의 질문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녀의 송곳 같은 눈빛과 얼음 같은 음성이 알려 주듯, 상황 자체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글쎄, 어디로 갔을까.”

블레논이 이기죽댔다. 그저 얄미움을 넘어 보는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지는 그 모습에 텔레스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미친놈, 공주를 납치했어? 같은 황족을?!”

“워워, 침착해. 누가 납치했대? 근거도 없이 감히 어디서 그런 비난을 지껄여? 그것도 이 나라의 황태자한테.”

“황태자고 뭐고, 제발 정신 좀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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