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14)

여자를 안전한 은신처에 옮겨 놓은 뒤, 데아론은 곧장 다른 기사들과 함께 황녀궁으로 복귀했다. 황녀와 대공, 첼루나 공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수고했다. 데아론 경 빼고는 모두 물러가.”

황녀가 지시했다. 곧 방 안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

“여자의 신병을 확보하고 은신처로 옮겼습니다. 한데 황녀 전하, 여자가 이미 임신했습니다.”

데아론은 나직이 보고했다. 첼루나는 당혹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발 늦었구나.’

수태 날짜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정확한 일시까지 알았더라면 황녀를 닦달해서라도 여자를 더 빨리 찾았을 텐데.

“차라리 잘됐군.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자가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도록 해야겠어.”

텔레스는 의외로 침착했다. 얼핏 몹시 인자하게 들리는 말에 데아론은 안도로 반색했다. 그러나 첼루나는 오히려 싸한 느낌을 받았다.

“그냥 낙태를 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모리안이 떨떨하게 제안했다. 그는 냉정하게 부연했다.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입니다. 부정한 의도로 잉태되었을뿐더러 나중에 전하께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황태자의 핏줄이니까.

백성을 속이기 위해 평민의 태를 빌려 낳은 아들이니 정통성을 가진 황녀와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모리안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니, 그 아이가 태어나면 오히려 확실한 증거로 사용할 수 있어. 만약 여자의 증언만 있다면 우리가 거짓 증인을 매수했다고 황태자가 반격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여자의 아이가 태어나면 친자 검사만으로도 황태자를 옭아맬 수 있어.”

마법으로 친자 검사가 가능한 시대였다.

전생에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아무도 친자 검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각자 그 아이가 저들 피라고 주장하는데 굳이 의심할 여지는 없으니까.

그러나 한 번 의혹이 제기되고 나자 친자 검사를 피할 수는 없었다.

황태자비가 아이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황태자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황녀조차 충분히 계산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 후에는요?”

첼루나가 불쑥 물었다. 그녀는 언니를 보고 있었다.

“황태자의 유죄가 입증되고 나면, 증거로 쓰인 아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금빛 눈이 파란 눈을 파고들었다. 제 아빠와 오빠를 똑 닮은 그 시선에서, 첼루나는 이미 예측한 정답을 읽어 냈다.

“설마, 죽이실 겁니까?”

데아론은 훨씬 직설적이었다. 그는 경악한 눈빛으로 황녀를 쳐다보았다.

여기서 표정 연기에 가장 서툰 쪽은 아무래도 15년간 평민으로 살았던 데아론이었다. 무표정한 황녀 내외와 달리, 그의 시선은 굉장히 솔직했다.

“살려 두면 화근이 될 거다.”

황녀는 침착하게 답했다. 아군에게까지 번지르르한 거짓을 말하는 건 그녀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설령 이로써 그 아군이 저를 괴물 취급하게 되더라도.

“하지만……!”

“데아론, 조용히 해.”

“형님!”

데아론은 왈칵 화를 냈다. 황녀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모리안의 눈빛은 슬슬 살벌해졌다.

평소 같았으면 자기 연인이 해를 입을까 봐 재빨리 개입했을 첼루나도 지금은 언니를 차갑게 보느라 바빴다.

“그냥 어미와 함께 조용히 빼돌리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 정도 비밀이 평생 묻히겠니? 황태자의 핏줄이야. 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된 아이도 아니고. 나중에 내 약점이 되거나 황실의 치부로 남겠지. 없애는 게 최선이다.”

동생은 뚝뚝하게 여쭈었고, 언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흠잡을 데 없이 합리적인 답이었으나 첼루나는 여전히 반박을 시도했다.

“황실의 치부가 아니라 황태자의 치부겠죠. 어차피 황태자의 유죄를 입증하려면 낱낱이 까발려질 일이니 아이가 살아 있다고 해서 나중에 더 수치스러워질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전하께 어찌 위협이 되겠습니까? 누가 미쳤다고 그 아이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겠어요.”

평민 피가 섞였는데. 첼루나는 데아론을 의식해서 뒷말은 그대로 되삼켰다.

“그 아이가 나중에 아비의 원수를 갚겠다고 개인적으로 설칠 수도 있겠지.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야. 미리 제거하는 게 가장 깔끔해.”

“그 아이가 평생 자기 아비를 모르고 살더라도요?”

“모를 방법이 있겠어? 아까도 말했지만, 그 정도 비밀은 평생 묻기도 어려워. 그리고 아이의 어미가 아이에게 그런 사실을 숨기겠니?”

“왜 안 숨기겠습니까? 저라면 본인과 아이의 목숨이 아까워 입도 벙긋 안 할걸요. 황실이 입막음을 위해 자기를 제거할 수도 있다고 그 여자가 생각을 안 해 봤겠어요? 평민들이 무지하다 해서 멍청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적당히 조용히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면 평생 숨죽이고 살 겁니다.”

“첼루나,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윗사람에게 요구하지 마.”

“제가 책임지겠다고 하면요?”

“뭐?”

“제가 거두어 키우겠습니다. 친모는 유모로 들이고요. 자식 삼아서 조용히 키울 테니 죽이지 말고 제게 주십시오.”

다소 충동적인 발언이었다.

첼루나는 데아론에게 슬쩍 미안해졌다. 서로 사실상 청혼까지 한 사이에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입양을 논하는 판이었으니.

그러나 첼루나는 자신의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황녀 앞에서 이미 말을 뱉은 이상 주워 담을 수도 없었거니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은 아기가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그냥 개인적으로 화가 났다.

‘누군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냐고?’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목숨이 간당간당한 가련한 생명체가 자기 자신 같기도 했고, 자기 연인 같기도 했다.

어미를 죽이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핍박받은 천덕꾸러기 공주.

불륜의 열매이자 평민의 아들인 탓에 오래 고통받은 어느 소년.

잘못을 저지른 건 어른들인데 어째서 아이들이 괴로운가. 그저 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제 조카니 완전히 남남도 아니지 않습니까.”

첼루나는 쌀쌀맞게 지적했다. 그제야 처음으로 텔레스의 파란 눈에 흔들림이 번졌다.

첼루나의 조카라면 텔레스의 조카이기도 했다.

여태 텔레스는 한 번도 그 태아를 그런 시각으로 바라본 적 없었다. 그건 그저 남이 품은 아기였고, 정적의 망측한 계략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그 아이가 황태자의 자식이라는 건 밝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아무 연고 없는 고아가 가엾어 입양한 것처럼 하겠습니다. 그저 평범한 아이로 자라도록 잘 돌보겠습니다.”

아빠와 딸이 서로 미워하고, 동생과 오빠가 서로 적대하는 나날.

어떤 엄마는 딸에게 황제가 되라고 강요하고, 그 딸은 한동안 자기 이복동생을 외면했다.

그런 시절이 끝나고 나면, 적어도 숙모가 조카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쯤은 왔으면 좋겠다고 첼루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전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황제가 될 사람은 언니 당신이지, 내가 아니잖아.

냉철한 지도자는 당신만으로 족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는 군주의 길은 당신이 걸으면 돼.

당신처럼 잔인하지도 강인하지도 못한 나는 그냥 무르고 멍청하게 살래.

설령 바보처럼 삿된 정에 휘둘리는 걸지라도, 나는 당신이 죽여야 하는 어느 아이를 살리고 싶어.

“……생각해 볼게.”

텔레스는 확답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일렁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첼루나는 자신과 달리 때로는 잔인해야 하는 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첼루나, 데아론 경, 이제 둘 다 나가 봐.”

황녀는 지친 태도로 명령했다. 그때까지 데아론은 황녀를, 모리안은 공주를 꾸준히 노려보고 있었다.

자매의 대치가 끝나자 형제의 시선도 각각 누그러졌다. 첼루나와 데아론은 황녀와 대공께 인사한 뒤 말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데안, 나랑 같이 좀 걷자.”

첼루나가 중얼거렸다. 데아론은 잠잠히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공주궁 후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너무 춥지는 않으십니까?”

“으응, 쌀쌀하긴 한데, 안은 너무 갑갑해서.”

그새 계절은 또 바뀌어 어느덧 초봄이었다. 하지만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였다.

데아론은 즉시 자기 외투를 벗어 첼루나의 어깨에 포근히 둘렀다. 첼루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러면 네가 춥잖아.”

“제가 당신보다 튼튼합니다.”

“데안, 너 왠지 재수 없어.”

“그래서 싫으십니까?”

“아니, 전혀.”

데아론은 웃는 낯이었고, 첼루나의 눈빛도 부드러웠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손을 맞잡았다.

“데아론. 나는 절대 황제 같은 건 못 될 거야, 그렇지?”

첼루나가 속닥였다. 데아론의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내 언니가 부러운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냥 그분이 나랑 무척 다르다는 것만 알겠어.”

훗날 화근이 될 수도 있는 갓난아기를 죽이겠다고 다짐하는 건 어쩌면 현군의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때로 통치자는 일반적인 도덕과 살짝 어긋난 결정을 과감하게 내려야 할 때도 있으니까.

첼루나는 자신이 별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군주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녀가 딱히 자비롭거나 지나치게 온화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타인의 죽음을 평범하게 겁내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분은 두려운 게 별로 없나 봐. 나는 지금도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이번 생에 텔레스를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첼루나는 훗날 새 황제의 손에 죽을 친오빠의 명을 재촉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번 생에도 텔레스가 승리한다면 그녀는 블레논을 포함한 숱한 정적의 죽음을 명령할 것이며, 그들의 최후를 앞당긴 것이 첼루나의 주된 공적이 되리라.

미래의 조카를 살리려는 몸부림도 결국 같잖은 속죄에 불과할지 모른다.

첼루나는 자기 손이 이미 피로 더럽혀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과연 아기를 살려 기른다고 해서 이 느낌이 사라질까 궁금했다.

“악몽을 꾸시나요?”

데아론은 걱정스레 물었다.

그는 여전히 황녀와 형에게 화가 나 있었고 역시 아기 문제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최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연인의 안녕이었다.

“가끔.”

첼루나는 오랜만에 연인에게 거짓말했다. 요즘 악몽이 유독 잦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필 악몽의 내용도…….’

전생에 데아론이 죽는 꿈이었다. 회귀 이후 지겹도록 거듭한 악몽이거늘,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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