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숱한 군주가 가장 귀한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며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혈육의 정에 휘둘리는 건 멍청하고 무르며 군주답지 않은 일이다. 블레논은 이미 그렇게 합리화를 마쳤다.
‘처리해야겠어.’
블레논은 결론에 다다랐다. 제가 그토록 싫어하는 아비와 쏙 빼닮은 그의 파란 눈은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다.
‘그전에 더 중요한 게 있긴 하지만.’
사사건건 방해하는 성녀 동생도 문제는 문제였으나, 블레논의 우선순위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간 거의 필사적으로 황태자비와 동침했으나 아내는 아직도 태기가 없었다.
블레논은 애꿎은 태자비에게 계속 신경질을 냈지만, 그런다고 없는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님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정부를 들일 수도 없다.
다른 여자가 그의 아이를 낳아 봤자 황제께서 편찮으신 와중에 음탕한 방식으로 태어난 사생아라고 황녀 측이 트집 잡기 딱 좋았다.
그러니 무조건 황태자비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 아니면, 또는…….
‘……결국 그 방법뿐인가.’
황태자비가 낳은 아이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믿든가.
무모하고 엽기적인 발상이었다. 전생에 그가 똑같이 저지른 조급한 악수였다.
그는 이미 파국에 가까웠다. 그리고 으레 파국이란 게 그렇듯, 당사자는 이를 미처 몰랐다.
전생에 황태자비는 아들을 한 명 낳았다. 첼루나가 스물두 살, 텔레스가 스물여섯 살, 블레논이 스물일곱 살이던 해였다.
황녀 측이 경악한 건 당연했다. 후계마저 갖춘 황제의 장자라니, 조건이 유리해도 너무 유리했다.
황제가 쓰러진 이후 슬슬 황녀에게 붙으려고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다시 황태자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블레논과 라토르 공작은 의기양양했다. 그리고 황태자비 혼자 불행했다.
이 파격적인 스캔들의 진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황태자비가 도통 수태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황태자는 은밀히 어느 평민 여자를 샀고, 그 여자가 아들을 낳자 갓난쟁이를 황태자비의 핏줄로 꾸며 몰래 입궁시켰다.
아이의 친모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했다.
보수적인 제국에서 임신한 여자는 대단히 폐쇄적인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기에 가능했던 속임수였다.
황태자비가 임신했다고 알려진 이후 그녀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인 황태자와 친정 부모, 가장 가까운 시녀들뿐이었다.
그들만 철저히 입을 다문다면 황태자비가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몇 달간 배가 착실히 불러 오는 것처럼 꾸밀 수 있었다.
거의 아홉 달 만에 황태자비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자기 배로 낳았다고 주장하는 갓난아이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실로 과감한 연기였다. 또한, 결과적으로 황태자의 패망을 앞당긴 일이었다.
혈통주의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런 망측한 기만을 용납할 리가 없다.
어디선가 말이 새어 나갔고, 제국은 발칵 뒤집혔다. 가히 세기의 가십이었다.
그동안 황태자를 지지하던 교회가 그를 손가락질했고 황녀는 부지런히 민중을 선동해 공격적인 여론을 만들었다.
이에 한층 궁지에 몰린 황태자가 황녀 독살 시도 등 온갖 절박한 발악을 거듭하자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그 결과는 패배였다.
첼루나는 그때의 과정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했다.
웬만한 삼류 막장 소설보다도 못한 파국은 블레논뿐만 아니라 그의 동복 첼루나까지 진창으로 끌어들였다.
‘이제는 아니야.’
이번 생에는 확실히 많은 게 달라졌다.
“황태자가 정말로 그럴 거라고?”
첼루나가 처음 황녀에게 예지력을 변명 삼아 황태자의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텔레스는 제대로 질린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가?”
첼루나가 황제의 와병 시기를 예지한 뒤로 동생을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황녀였지만, 그때는 별수 없이 되묻고야 말았다. 그만큼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네, 전하. 그 여자의 신병을 미리 확보해서 보호하고 증언을 받아 내야 합니다. 그러면 가짜 황손의 탄생을 막고 황태자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겁니다.”
전생에 블레논은 입막음을 위해 아이의 친모를 끝내 죽였다. 그러나 비밀을 아는 모든 사람을 없애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혹하게 제거될 동안 여자의 친구 한 명은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훗날 황녀에게 모든 걸 고발해 파장을 일으켰다.
“진짜 말도 안 돼.”
텔레스가 허탈하게 탄식했다. 그녀도 결국은 혈통을 신성시하는 보수적인 황족이었다.
아무리 후계가 없어도 가짜 황손을 내세우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말이 되든 안 되든 그게 황태자의 계획입니다.”
첼루나의 말투가 조금 삐딱해졌다.
아직도 멍하니 있는 황녀와 달리 전생에 이미 모든 걸 직접 목격한 첼루나는 언니의 현실 부정이 조금은 지루했다.
‘뭐가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지도 모르겠고.’
첼루나는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사생아여도 황태자 핏줄인데 그걸 가짜라고 볼 수 있나? 황태자비 자식이라고 속인 게 문제지, 혈통 자체는 걸릴 게 없는데.
‘아이의 친모가 평민인 게 진짜 문제였지.’
나중에 입막음을 위해 친모를 죽여도 후환이 없도록 블레논은 일부러 평민을 골랐다. 귀족이 실종되면 아무래도 신경 쓰는 이가 많을 테니.
‘그냥 다 똑같이 기분 나빠.’
그 점이 첼루나는 참 싫었다. 전생에도 다른 모두가 황손 사칭에 대해 분노하며 난리 칠 때, 천덕꾸러기 공주는 다른 점이 마음에 걸렸다.
평민이라는 이유로 너무 쉽게 제거당한 여자는 무슨 죄인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 그 아이는 또 어떻고.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가짜가 돼 버린 그 아기는 전생에 결국 어떻게 됐을까. 첼루나는 침울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 첼루나는 전생에는 태어났던 아이가 이번 생에는 태어나지 못하게 막는 중이었다.
그럼 그 아이의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예 지워지는 건가?
‘부디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나서 행복하게 태어나렴.’
어쩌면 자신의 개입으로 이번 생에 그 아이의 영혼은 더 좋은 가정에서 모두에게 환영받으며 태어날 수 있을지도.
차라리 그럴 수 있기를, 첼루나는 간절하게 소원했다.
“황태자가 여자와 접촉하는 정확한 시점은 모릅니다. 하지만 여자가 언제쯤 수태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부디 여자를 찾으세요. 가장 현명한 방식대로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첼루나는 보고를 끝마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신은 아는 것을 전부 말했으니,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리는 건 미래의 군주인 텔레스의 몫이었다.
이제 첼루나의 주된 역할은 싸움의 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블레논이 처음 자신의 계획을 외가와 처가에 말했을 때, 라토르 공작과 메르타 후작은 당연히 반대했었다.
보수적인 늙은이들이 보기엔 너무 파격적인 계획일뿐더러, 만약 들킨다면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메르타 후작의 경우 자기 딸을 생각했을 때 차마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블레논은 원래 언변이 유려한 자였다. 그래도 나름 한평생 황제의 자리를 꿈꿔 온 자였다.
제게 반대하는 사람을 단지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 외에도 교활한 세 치 혀로 살살 구슬리는 일에 블레논은 꽤 능숙했다.
하여, 끝내 외손자의 계략을 돕기로 한 라토르 공작은 은밀하게 적당한 씨받이를 구했다.
신분이 비천하여 나중에 입막음해도 뒤탈이 없되,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와 몸을 섞을 자이니 자라난 환경이 너무 천박해서도 안 되며, 생식 능력이 검증된 여자여야 했다.
여자를 매수하는 건 쉬웠다. 블레논은 제 신분을 속이고 여자에게 거금의 보상을 약속했다.
여자는 그가 설마 황태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아내가 불임으로 판정된 웬 귀족 자제로만 알았을 뿐.
황녀 측에서 여자를 찾아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을 때, 여자는 이미 황태자에게 돈을 받고 그와 여러 번 동침한 뒤였다.
“화, 화, 황태자 전하라뇨.”
여자는 송장처럼 새파랗게 질려 떠듬떠듬 되뇌었다.
여자와 접촉하는 역할을 맡은 데아론 텔로아는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죄가 없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증언한다 해서 당신이 받을 피해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침묵하거나 어설프게 도망치려 하면 황태자 전하가 당신을 찾아 해치려 하겠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불가피하게 퍽 살벌한 내용이었으나, 이를 설명하는 사람의 태도는 자못 친절했다.
데아론은 상대방이 겁먹지 않도록 조심히 몸을 낮추며 부드럽게 설득했다.
“그러니 부인, 부디 우리와 함께 가 주세요. 당신을 감쪽같이 숨겨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도 당연히 보호받을 거고요. 대신 당신은 나중에 황녀 전하께서 부탁하실 때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됩니다. 당신을 찾아온 그 남자가 황태자 전하라는 사실을요.”
데아론과 동행한 다른 기사들은 데아론의 저자세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돈을 받고 황태자와 동침한 이 여자는 그들의 눈에 긍지 없는 창부나 다름없었고, 가짜 황손을 만들려는 사기극의 공범이었다.
여자가 어마어마한 금액을 약속받았다는 사실과 동침 상대가 황태자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기사들의 차가운 태도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데아론 홀로 여자를 동정했다. 그의 다정한 천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귀족 출신 동료들과 달리 이 평민 여자의 곤궁함과 금전욕을 조금 더 잘 이해했다.
또한, 귀족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자신을 찾아와 돈을 줄 테니 입 닥치고 침대에 누우라고 요구했을 때 차마 거절하지 못했을 여자의 심정도 십분 헤아렸다.
만약 데아론이 아닌 그의 형이 여자를 데리러 왔다면 이토록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대신 다짜고짜 여자를 연행했을 것이다.
여자에겐 다행히도 모리안 대공 각하는 고작 이런 일에 직접 나서기엔 너무 고귀한 인물이었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역할은 동생의 몫이었다.
“제, 제가 당신들과 같이 가면. 저랑 제 아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거죠?”
여자는 겁먹은 낯으로 물으며 반사적으로 자신의 납작한 배를 감싸 안았다. 데아론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이미 임신하셨군요.”
“네…….”
“……태아에겐 무리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데아론은 자신이 지키기 힘든 약속을 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겁에 질려 덜덜 떠는 여인에게 달리 할 만한 말이 없었다.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세요.”
데아론은 끝까지 상냥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정녕 황태자의 씨를 품었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이 상냥함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 기분이 착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