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화 (86/114)

천하의 모리안 텔로아, 귀족의 고고한 아들, 뛰어난 검사, 냉철한 참모, 그 모든 것인 그가.

나이를 무려 스물여섯이나 먹고도 여자의 벗은 몸이 낯설어 이토록 쩔쩔매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본인의 초야에.

우습다고 해야 할까. 조금 귀엽기도 하고. 무엇보다 서러웠다.

단 한 번도 평범한 연인이었던 적 없던 우리의 사이가. 스스로 억제하고 정죄했던 내밀한 진심이.

“모리안.”

남편의 가운 끈을 움켜쥐며 텔레스가 속삭였다.

모리안은 여전히 선명한 딸기색이었지만, 더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한순간도 내가 연애 결혼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처음부터 황제가 돼야 했으니까. 어린 내게 어머니가 그토록 지독하게 속삭였기에.

“그래서 나는 정략적 이해관계가 내 마음과 일치하기를 늘 바랐어.”

텔레스가 끈을 당겼다. 천이 벌어졌고, 매끈한 근육이 드러났다.

“어차피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면, 기왕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는 게 나으니까.”

텔레스는 생긋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보이는 진짜 미소였다. 모리안은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네가 내 남편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텔레스는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주군이 신하에게 하듯이 아니라,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

그녀는 제 얼굴이 더는 미친 듯이 뜨겁지 않다는 사실에 지극히 안도했다. 완숙 토마토 같은 색깔로 초야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으니.

모리안의 가운은 이제 그의 허리까지 미끄러져 부부 사이에 더는 가림막이 없었다. 허물어진 건 아마도 서로의 의복만이 아니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뺨에 닿았다. 텔레스의 배 속이 다시 어지럽게 요동쳤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날뛰는 심장 때문에 텔레스는 잠시 호흡이 가빴다.

“저도 당신이 제 아내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리안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여자의 뺨에 여전히 손을 겹친 채.

이윽고, 누가 먼저 다가갔더라?

누가 먼저 입술을 겹치고, 숨결을 삼키고, 가슴을 맞댔더라.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고, 욕정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오직 냉철한 이성으로 매 순간 임해야 각자 원하는 걸 거머쥘 수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 다그치며 살아왔는데.

딱 하루만, 딱 하룻밤만이라도 반칙을 허락해 보자.

평생 사랑을 경계하며 외롭게 살았으니 이 정도 일탈은 서로 눈감아 주겠지.

“흣……!”

뜨겁게 하나로 맞물릴 때, 누군가 속삭였다.

“사랑해.”

이번에도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텔레스.”

누가 먼저 멋대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는지. 감긴 눈꺼풀 아래 눈물이 고였다.

“사랑해요.”

어차피 이렇게 무너질 거였으면, 미리 고백할 걸.

긴긴밤은 후회와 후련함, 희열과 허무감, 눅진한 신음과 달금한 교성의 범벅으로 흘러갔다.

단지 처음이라 잊을 수 없을 밤은 아니었다.

텔레스 황녀와 모리안 대공은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사이 황실에는 묘한 안정감이 깃들었다.

마냥 평화로운 건 아니었지만, 황제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다들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남매의 암투 전선은 고착 상태에 이르렀다.

그 상태가 별로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첼루나는 알았다. 예전에 미리 황녀에게 귀띔해 두었다.

조만간 황제는 다시 쓰러질 것이며, 이후 분위기는 다시 사뭇 살벌해지리라고.

황제가 두 번째로 쓰러진 뒤 잔뜩 초조해진 황태자는 그때부터 온갖 조급한 악수(惡手)를 두기 시작할 것이다.

그중 아마도 가장 무모하고 엽기적인 발상을 첼루나는 전생을 통해 생생히 기억했다.

‘그 사실을 이번 생에 더 일찍 밝히면 어쩌면 싸움은 빨리 끝날 수도 있어.’

첼루나는 감히 희망을 품어 보았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황제가 승하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조급한 마음에 총기가 흐려진 블레논이 어떤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미리 폭로하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해 그의 패배를 앞당길 수 있다.

‘나까지 덩달아 조급해져서 일을 그르치지만 않으면…….’

첼루나는 자꾸만 경솔하게 앞서가려는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다잡았다.

이미 언니에게 예측 가능한 날짜를 전부 알려 줬으니 나머지는 그분이 알아서 잘할 거다. 지금 첼루나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짧은 거짓 평화를 즐기는 거였다.

겨울에 황제가 또 쓰러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테니 첼루나는 그전에 연인과 데이트나 실컷 할 예정이었다.

그간 황제가 아프다는 이유로 유희를 삼가느라 미루고 미룬 데이트였다. 첼루나는 데아론과 매일 만났다.

장소는 대부분 황궁이었고, 때로는 그들이 이전에 함께 간 공원이었다.

“나중에는 더 멀리도 같이 가 봐요. 산이나 바다, 뭐 그런 곳.”

아쉬운 마음에 데아론이 제안했다.

혹시 자신이 수도를 비운 사이 무슨 예상치 못한 일이라도 터질까 봐 첼루나는 데이트를 위해 멀리 나가는 걸 극도로 꺼렸다.

데아론도 신중했다. 비록 황제의 건강이 부쩍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불안감이 남은 시국이었다. 괜히 놀러 다니는 일에 정신이 팔릴 때는 아니었다.

“그래, 실컷 다니자.”

첼루나는 기쁘게 동의했다. 이번 생에 제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이 벅차 설렘을 넘어 두려울 지경이었다.

데아론과 함께 누비는 산이나 바다. 연인과 함께 떠나는 관광.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장거리 여행.

모두 전생에 첼루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핍박받고 공주궁에 갇혀 지내며 원수 가문의 아들과 간신히 몰래 연애하던 그녀가 태평하게 여행 계획이나 짜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이번 생에야 그 모든 게 허락되었다.

나중에 이 싸움이 끝나고 둘 다 무사히 살아남으면, 과거에는 차마 꿈도 꾸지 못했던 밝은 미래가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또 무서우세요?”

데아론이 부드럽게 물었다.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그는 얼마 전 그의 품에서 겁에 질려 울던 연인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 모든 게 언제 끝날지 몰라 두렵다고 했던가.

데아론은 첼루나의 첨예한 불안을 그저 정쟁에 대한 신경과민으로 넘겨짚었다. 전생을 모르는 그에겐 가장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조금.”

첼루나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연인에게 최대한 솔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는 차마 거짓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아. 네가 있으니까.”

이 또한 진심이었다. 이 다정하고 용감한 남자가 제게 평생을 약속한 뒤로 그녀는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다잡을 힘을 얻었다.

“다행이에요.”

데아론은 웃으며 첼루나와 깍지를 꼈다. 서늘한 가을날이었다. 곧 겨울이 들이닥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둘은 함께야.”

공원의 달콤한 데이트에 더 달콤한 말이 얹어졌다. 첼루나는 힘껏 웃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리고 이번 생에는 둘 중 하나가 죽는 결말이 아닌, 둘이 함께 살아가는 결말이기를.

땅이 얼어붙는 계절이 왔다. 황녀와 대공은 날씨가 너무 추워지기 전에 일찌감치 환궁했다.

황제는 성녀가 예지한 날짜에 쓰러졌다.

황태자궁 사람들은 요즘 살얼음판을 디뎠다. 그건 황제의 병세가 다시 악화했다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도 그 사실에 대한 황태자의 반응 때문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어릴 때부터 아랫사람이나 동생에게 손찌검하는 등 난폭한 기질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자기 이득을 위해선 얼마든지 냉정을 유지할 수 있던 황태자였다. 분명 그랬는데.

“젠장, 대체 왜 또……!”

그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인 황제가 다시 쓰러진 이후 그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그는 냉정은커녕 평정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폭발 직전 화산처럼 부글대고 있었다.

“젠장!”

쨍그랑! 그런 그의 손짓에 박살 난 가구가 여태 한둘이 아니었다.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은 날카로운 파열음을 듣고 각자 자그맣게 움찔했다.

“후우.”

한창 힘차게 기물 파손을 저지르고 나자 그나마 이성이 좀 돌아왔다. 블레논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계속 일이 꼬이지.’

황제의 건강이 나아져서 안심했었다.

짜증 나는 이복동생이 기어코 국혼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대로 황제가 완쾌하고 나면 황녀가 황손을 생산하기 전에 그녀를 충분히 제거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황제는 다시 쓰러졌다. 사람들은 다시 술렁였다.

만약 황녀가 아직 신혼여행 중이었다면 이 틈에 황태자가 잽싸게 섭정 자리를 차지할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녀는 마치 황제의 와병을 예측한 것처럼 귀신같이 직전에 돌아왔다.

황녀와 황후는 황태자가 섭정의 ‘섭’ 자도 꺼내지 못하게 교묘하게 방해했고, 이는 이미 날카로운 블레논의 신경을 더욱 거슬렀다.

‘정말 미리 알기라도 한 것 같단 말이야. 미리 알기라도…….’

블레논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는 지난번 황제가 처음 쓰러졌을 때 첼루나의 비밀스러운 전갈을 받고 황궁에 도착했던 텔레스를 떠올렸다.

‘설마, 그년이 또?’

미래를 내다본다는 성녀님이 설마 이번에 또 개입한 걸까.

황제의 건강이 언제 나빠지고 언제 나아질지 미리 다 파악했으면서 그 귀한 정보를 다른 누구도 아닌 이복 언니와만 나눴다.

충분히 반역죄로 고발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부황의 건강이 나빠질 걸 미리 알고서도 그 어떤 예방도 하지 않았다니.

물론, 블레논은 첼루나가 아비의 와병을 예방하지 않아서 화난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자신이 아닌 텔레스와 공유했기에 화가 났을 뿐.

만약 첼루나가 오직 제게만 은밀하게 알렸다면 블레논은 이 사실을 의사에게 알려 예방 대책을 짜는 데 쓰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자기 측근들에게만 공유하고 제게 유리한 쪽으로 써먹기 위해 머리를 굴렸겠지. 마치 텔레스가 그러했듯.

‘……없애야 하나.’

블레논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온갖 질척한 감정이 일렁였다.

이 사실을 첼루나가 들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겠지만, 블레논은 내심 동복동생을 끝까지 살려 두고 싶었다. 살해 협박은 진심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동생이니까. 나와 어머니가 같으니까.

동생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어릴 적부터 황제에게 세뇌당해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미처 자각하지 못한 아주 연약한 한 줄기 온정이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남아, 싸움 끝에 그 아이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기를, 그렇게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하지만 역시, 블레논은 가장 사랑하는 게 따로 있었다.

‘선은 그 애가 먼저 넘었어.’

그깟 희미한 가족애보다도 그에게 더 소중한 건 권력욕과 야심, 마땅히 자기 것이라 믿는 권좌를 향한 집념이었다.

‘사사건건 방해하잖아.’

평생의 꿈에 닿기 위해서라면 고작 동생 하나 제거 못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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